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교구 사제의 모범인 바오로 사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5 ㅣ No.334

교구 사제의 모범인 바오로 사도

 

 

강한 의지의 소유자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오로는 현대의 교구 사제들에게 무엇인가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사도행전에서 독자들이 처음으로 바오로를 만나는 것은 스테파노의 순교 현장인데, 여기서 사울이라고 불리던 젊은이는 스테파노를 죽이는 사람들의 외투를 지키고 있었다(8,1). 사울은 분명히 스테파노를 사악한 사람이라고 거부하던 군중의 유죄판결에 동참했다. 그는 비록 디아스포라 경험 때문에 매일의 성전 예식에서 멀어졌고, 희생제물보다 회당에서의 기도와 축복을 강조한 갈릴래아 신심에 더 가까웠지만 성전의 중요성을 격하시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사울은 이제 막 탄생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한 박해에 동참했고, 스테파노와 같은 사람들을 잡아서 감옥에 보내려고 집집마다 돌아다녔다(8,3). 사울은 또한 신중하게 법을 이용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심지어 다마스쿠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마저 색출하려고 대사제에게서 완전한 권한을 위임받으려고 노력했다(9,1 이하). 그는 일을 정확히 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조직 활동에도 능숙한 사람이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완벽한 순종, 헌신과 열정으로 충만했던 젊은 사울에게는 그 어떤 애매모호함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강한 개성과 분명하고 일관된 성품은 그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런데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그의 반응은 위에서 묘사된 요소들과 놀라운 대조를 이룬다. 그는 자신을 성 안으로 인도한 사람들에게 온순하고 개방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9,8). 곧은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도착해서 그는 후속 지시를 기다렸다. 3일 뒤에 사울은 아나니아라고 불린 탁월한 제자의 방문을 받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신비로운 영상 안에서 사울을 “내가 뽑은 인재”(9,15)라고 묘사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인들과 제왕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는 임무를 그에게 맡기셨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바오로의 성격은 명석하고 의지가 강하고 진지하다. 예를 들면 키프로스 섬의 바포에서 바오로가 마술사 엘리마와 격렬하게 부딪쳤을 때, 바오로는 그에게 “기만과 죄악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13,10)이라고 말하고서 즉시 맹인으로 만들어버렸다. 바오로의 인간적 태도는 너무나 당당하고 그의 발언은 대단한 권위가 있어서 리스트라 사람들은 그리스의 신 헤르메스와 혼동할 정도였다(14,12).

 

매일같이 기도를 하러 가는 그를 따라가며 수다스럽게 예언하는 말을 반복하는 여종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던 바오로는 자연스런 구마 의식을 행했고(16,18), 이 때문에 필립비에 커다란 소동이 일어나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치안관들이 로마 시민인 사람에게 공중 앞에서 매질을 하는 중대한 법적 실수를 하고, 그에게서 법 앞에서의 정당한 절차를 박탈했음을 알았을 때, 그들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바오로와 실라의 출발이 이루어지도록 시도했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그들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자 했다(16,39). 그는 로마로 가겠다는 자신의 열망을 완강하게 고집했고(19,21), 모호함 없이 진리를 말하는 기질을 자랑스럽게 선언했고(20,20.27), 예루살렘에서의 투옥과 고통의 징후 때문에 위협 당하는 것을 거부했다(20,23). 

 

자신의 입을 때리라고 명한 대사제 아나니아에 대해서 바오로는 격렬한 분노를 표시했다(23,2). 또 석방을 조건으로 뇌물을 요구하는 로마 총독 펠릭스의 제안을 거절했고(24,26), 아그리파 왕의 승인으로 석방될 수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로마 시민의 권리로서 로마에서 황제 앞에서 재판 받기를 완강하게 요구했다(26,32). 

 

이상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오로의 성격에 대한 묘사이다. 이것은 어쩌면 교회의 창립을 위해, 또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하고자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에 대하여 사도행전이 제안한 모델일 수도 있다. 바오로는 강하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이고 솔직하고 인간적 품위를 의식하고, 쉽게 동요되지는 않지만 그 대가가 무엇이든 옳은 일을 하는 데에 정열적으로 투신하고 증언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그런 사람이다. 

 

당시와 비교해서 오늘날 사제 교역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엄청나게 변했다. 그러나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일시적인 실패에 좌우되지 않고, 하느님의 권능과 부르심 안에서 강한 확신을 갖는 깊은 신념의 소유자는 어느 시대에나 직무에 이상적인 자질을 갖춘 사람이다. 오늘날 교구 사제들에게 바오로가 보여주는 본보기는 존재의 핵심이 될 정도로 강하고, 그것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할 정도로 중요한 기본적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더욱이 오랫동안 열심히 일하려는 열망은 전도 여행 중에 집주인에게 의지하기보다는 함께 텐트 만드는 일을 함으로써 생계를 해결한 바오로에 의해 분명히 보였던 특성이다(18,3). 힘든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 역시 오늘의 사제들을 위해 바오로가 보여준 본보기의 일부이다.

 

 

기도하는 사람

 

사도행전이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오로는 처음부터 기도를 삶의 중심에 놓고 거기서 형성된 사람이다.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한 서간에서 바오로는 자신이 유다교 전통을 열광적으로 끌어안았고(갈라 1,14), 독실하고 실천적인 바리사이파로서 확실하게 교육받았다고 말한다. 바리사이파가 했던 매일 기도를 그 역시 행했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충격적인 만남 뒤에 곧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의 집으로 인도되었다. 거기서 바오로는 예전에 하느님의 섭리를 기다릴 때 했던 대로 금식과 3일 기도를 시작했다. 유다교에서 금식은 깊은 슬픔, 상실, 참회의 표지이다. 곧 바오로가 금식을 했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적 오만과 죄스런 완고함을 정확히 깨달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바오로는 또한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세례를 받고 식사를 한 뒤(9,18-19) 곧바로 다마스쿠스의 회당으로 나가서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열정적으로 증언하기 시작했다(9,22). 열정적인 활동에 기도를 함께하는 것은 현대의 사제들에게도 여전히 적절한 것이다. 

 

훗날 바르나바와 함께 기아로 고통받는 예루살렘의 제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임무를 완수한 뒤에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서 “예언자와 교사”라고 불리던 초기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시므온 니게르, 키레네 사람 루기오, 마나엔 등)의 모임에 가입했다(13,1). 거기서 그들은 백성의 예배와 금식에 참여했지만, 성령께서는 따로 특별한 일을 맡기셨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기도와 금식을 계속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대표들로부터 안수를 받고 셀류기아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 섬으로 건너갔다(13,4). 이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노력을 동반했고, 하느님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것을 부탁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하느님의 성령께 대한 개방성은 일상을 성화하는 방식을 가르쳤다.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 분도 같은 성령이셨다(16,6). 성령의 요청에 대한 지속적인 개방성은 하느님의 뜻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믿는 사람의 보증이다. 전통적이고 거룩했지만 바오로의 깊은 신앙생활은 단순히 말씀을 반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바오로에게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신비 앞에서 갖는 마음가짐이었다.

 

바오로는 개인적으로 고립되어서가 아니라 여행할 때는 회당에서, 또는 독실한 유다인들의 기도처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를 했다. 예를 들면 필립비에서 사울은 성문 밖으로 나가 강가에 있는 유다인의 기도 장소를 발견하여 함께했다(16,13 참조).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신비로운 영상을 본 뒤에 세 번 더 이와 같은 경험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는 알렉산드리아의 트로아스에서 보았는데, 마케도니아 지방에 와서 말씀을 선포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16,9). 이 신비로운 영상은 그들을 헬러스폰트를 가로질러 처음으로 유럽 땅으로 인도했고, 거기서 사울은 필립비에 도착했다. 유다 회당의 지도자들과 자주 격렬한 토론을 벌인 뒤 고린토에 도착한 바오로는 두려워하지 말고 분명하게, 그리고 앞으로 전진하면서 전도를 계속하라고 신비로운 영상 속에서 주님께 격려를 받았다(18,9). 하느님 현존의 약속과 위해(危害)로부터의 안전 보장은 바오로에게 1년 반 동안 그 도시에서 정력적으로 가르칠 수 있게 했다(18,11). 마침내 또 다른 성전 소동 사건 뒤에 예루살렘에서 바오로는 산헤드린 의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바오로는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의 교리에서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차이점을 부각시켜 양 진영 간의 논쟁을 촉발시켰는데, 이것이 너무 격렬해지자 파견대장은 그의 안전을 위해 군인들을 보내서 병영으로 피신시켰다. 그날 밤 주님이 나타나서 로마에서도 증언하라고 하셨다(23,11). 

 

로마 총독 펠릭스의 법정에서 명확하게 진술한 것처럼 바오로는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고 그의 조상들의 하느님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믿는 사람이었다(24,14). 바오로는 감옥과 법정 그리고 회당에서, 또한 개인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때 하느님의 현존을 받아들이고, 기도를 통해 정화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교구 사제들을 위해 바오로가 제시한 본보기는 모든 활동의 중심과 원천에 언제나 기도를 위치시켰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성원

 

아나니아의 방문과 안수를 통해 바오로는 본격적으로 복음선교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9,17 이하). 그의 세례는 분명히 신앙 공동체로의 입문이고, 음식을 먹고 건강을 회복했다는 성서의 언급은 성찬례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전에 그렇게 파괴하고자 했던 바로 그 공동체에 사회적으로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오로는 일생 동안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가르치고 기도했던 회당으로 정기적으로 돌아오곤 했다. 곧 다마스쿠스에서(9,20), 이고니온에서(14,1), 고린토에서(18,5), 그리고 에페소에서(18,19; 19,8) 그러했다. 그는 오랫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유산과 유다적인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도시에 들어설 때마다 본능적으로 공동체 생활과 기도의 리듬으로 돌아갔다. 

 

바르나바는 회심한 바오로를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서 사도들에게 소개했고(9,27), 바오로의 안전을 위해 다르소로 피신시킨 사람들은 바로 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었다. 바르나바를 보내 바오로를 데리고 오게 한 것도 바로 이 사람들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자격이 있고 유능한 교사를 긴급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기에, 안티오키아 공동체 속으로 바오로를 다시 한 번 보냈다(11,26).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먼저 유다 지방의 기근 피해자들을 위해 안티오키아에서 모금한 구호금을 전달하고자(11,30), 이어서 디아스포라에 대한 더욱 일반적인 사명을 수행하도록(13,2) 함께 파견되었다. 바오로와 안티오키아의 예언자들 그리고 교사들과의 관계는 그를 핵심 교역자에 들게 했고(13,1), 그와 바르나바는 성령에 의해 따로 세워졌다. 둘씩 짝을 지어 다닌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법적 증언에서 두 개의 증언을 요구하는 관습적 실천에 따르는 것이지만, 그들은 협력자로서 수년 동안 많은 일을 함께 수행했다.

 

초기 교회에서 핵심적인 문제였던 모세 율법의 준수 여부 때문에 서로 상의하러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예루살렘에 다시 파견되었고(15,2) 그 결과로 첫 번째 예루살렘 회의의 교령을 이행하기 위해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15,23). 또 다른 상황에서 바오로는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고린토에서 일했다(18,2). 바오로는 필요할 때는 성별을 초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옷감 장수였던 리디아와 교역에서 동반자 관계를 수용했고(16,13-40), 데살로니카(17,4)와 베레아(17,12)의 공동체에서 높은 지위의 많은 여성의 환대를 받았다. 

 

그들은 결코 고립되지 않으면서 공동체와 교회의 일에 봉사했다. 여기서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직무가 특수한 임무이든지, 아니면 하느님 말씀의 일반적인 선포이든지(15,35) 신뢰에 대한 어떤 증거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오로는 첫 번째 선교 여행 뒤에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그 결과를 보고했고(14,26-28), 세 번째 선교 여행 뒤에도 예루살렘에 있는 야고보와 원로들에게 관련 사항을 보고했다(21,17-20). 이것 역시 교구 사제들을 위해 바오로가 보여준 본보기의 또 다른 요소로, 바오로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밀접한 관련 아래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활에 대한 증언

 

겉으로 보기에 사도행전은 개별적인 행위와 사건들로 채워져 있지만 어떤 포괄적인 계획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다. 바오로가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눈이 멀고, 아나니아가 역사적으로 최초의 개별적 회개자에게 지침을 주기 위해 선택된 뒤 바오로는 어쨌든 이스라엘의 백성뿐 아니라 민족과 제왕들에게 하느님의 참된 이름을 알려주기 위한 복음전파의 도구로 임명되었다(9,15). 

 

처음에 그 메시지는 “하느님의 말씀”(13,5.7; 15,35)이라는 일반적인 명칭을 갖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그 메시지가 격려의 말로(13,15; 20,1 이하), 하느님의 실현된 약속인 기쁜 소식(13,32), 그리스도이신 예수님(18,5), 성령의 선물(19,4),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19,8; 28,31)로 점차 정확하게 묘사되었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 그날의 성서 본문, 전례주년, 회중의 필요에 따라 각 나라에 주어진 매일의 강론 주제가 된다. 

 

그럼에도 다마스쿠스 도상에서의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첫 번째 만남(9,5)에서 시작된 바오로의 증언의 초점은 죽음과 죄에 대항해서 승리를 쟁취하신 예수님이시다. 예루살렘에서 의회의 고소에 직면했을 때(23,6), 또는 로마 총독의 법정에서 대사제와 원로들에게 고소를 당했을 때(24,21), 바오로는 그가 재판을 받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부활을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것은 진리일 뿐만 아니라 유다교의 커다란 두 집단을 분열시키는 현명한 방식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부활을 바리사이파는 열정적으로 옹호했지만 사두가이파는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오로의 서간들은 부활에 대한 바오로의 증언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특히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에서의 연설은 아주 유명하다(17,22-31).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신 하느님”은 바오로가 민족들에게 전하기로 되어있는 바로 그 하느님의 이름이다.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그는 이 위대한 사건을 선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오늘날 바오로 사도를 하나의 본보기로 삼는 교구 사제들 역시 모든 사목 실천에서 부활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라는 점에 대해 열정적인 확신을 가져야 한다.

 

 

회개와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먼저 백성들의 회당을 향했다. 이 회당에서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바로 약속된 그리스도라고 성서를 들어 이야기했다(18,5; 17,11). 바오로의 말이 회당에서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에(17,32) 설명과 주장들은 아주 자주 반복되었다. 이방인도 유다인과 동등하게 유산을 상속할 권리를 가질 수 있으며, 토라 준수가 부차적이라는 그의 주장은 유다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은 많은 시간과 인내,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메시지의 반복과 같은 방법을 필요로 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사람들의 마음을 전환시키고 변화시키는 교역자들이었다. 그들은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에서 죄의 용서에 대해 말했다(13,38). 그리고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그리스도인 윤리의 4가지 기본 사항에 대해 설명했다. 곧 우상숭배의 금지, (생명에 대한 존중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는) 피와 (폭력의 거부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는)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취식 금지, 그리고 음란한 행동에 대한 금지가 그러하다(15,29). 그러나 이런 임무가 쉽게 수행되지는 않았다. 여기에 강력히 반발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고 그들은 바오로의 직무 수행을 어렵게 했다. 

 

바오로는 밀레도스에서도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자신의 활동을 정리해 주면서 하느님 앞에서의 회개 행위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에 대해 말했다(20,21). 이것은 교사들에게 쉽지 않은 임무였고, 변화를 이뤄내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바오로와 그 동료들은 각 공동체에서 오랜 기간 머물렀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카에서 3주(17,2), 고린토에서 1년 6개월(18,11), 에페소의 회당에서 3개월(19,8), 에페소의 옛 항구 근처에 있는 디란노의 학원에서 만 2년(19,10), 체사레아에서 2년(24,29) 그리고 로마에서 2년(28,3) 동안 그는 활동했다. 

 

이 기간에 바오로는 자주 자신의 가르침 때문에 기본적인 생계가 위협받거나 감소한 것에 성난 사람들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필립비에서 한 여자 노예의 주인은 자신의 점치는 여자 노예가 바오로의 구마 행위로 자유롭게 되었을 때 일어난 수입의 손실로 격분했다. 에페소의 데메드리오와 은세공인 조합은 바오로가 아르데미스 여신상에 대한 숭배는 우상숭배라고 주장하자 크게 분노했다(19,23-41). 

 

이 모든 것은 바오로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사람으로서 스스로의 소명을 확신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것은 교구 사제에게도 역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는 한 방법이고, 일정한 기간에 특정한 공동체에서 사목하면서 사제는 본당 회중의 사고를 복음적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공동체의 봉사자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오로의 모습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 공동체에 봉사하도록 봉헌된 사람의 그것이다. 예를 들면 데르베에서 바르나바와 함께한 그의 활동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는 것으로 요약된다(14,21). 바오로는 가르침을 통해 지역 공동체를 확산시키고, 신자들의 신앙을 굳게 함으로써 공동체에 봉사했다. 리스트라와 이고니온처럼 이전에 선교활동을 했던 도시의 신자들에게 가서 바오로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말하면서 어려움들을 인내하도록 격려하는 데 전념했다(14,22). 초기 입교자들의 결심과 헌신을 강화시키려는 바오로의 노력은 사도행전의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18,23). 

 

이방인과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루살렘 회의의 가르침을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전한 것 역시 공동체에 대한 봉사의 또 다른 예이다(15,30-35). 바오로는 밀레도스의 항구 도시로 초대한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마지막 격려와 조언을 했다(20,17-38). 

 

필립비 감옥의 간수는 지진으로 쇠사슬이 풀린 뒤에도 도망치지 않은 바오로에게 구원의 가르침을 청했고 그의 상처를 씻어주었다. (결국, 신앙 안에서의 참된 가르침은 항상 애덕의 행위로 인도한다!) 그 뒤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은 차례로 세례를 받았고, 큰 기쁨 안에서 식사(성찬례?)가 뒤따랐다(16,29-34). 초기 교회의 모든 예식 거행은 신앙을 강하게 하고, 지역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생활과 직무 안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백성을 결합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리디아와 그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간수와 그의 가족을 환대할 수 있었던 것이 오직 놀라울 뿐이다. 

 

여러 교회들은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굳건해졌다. 바오로는 베레아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던 사람들을 환영했고(17,12) 아레오파고가 있던 아테네에서는 많이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가르쳤다(17,22-31). 각 공동체의 건강과 안녕을 위한 그의 주된 관심에서 바오로는 여전히 교구 사제들을 위한 독특한 모범이 된다. 

 

바오로는 선교 여행 가운데 머물게 되는 공동체 하나하나에서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였다. 공동체마다 오래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키고 그들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여기서 자신의 편안함과 안락함은 오래전 아나니아가 그에게 맡긴 임무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왕성하고 힘있게 각 공동체에 봉사했고, 그러고 나서 자신을 계승한 원로들에게 이것을 양도했다. 이것은 인사 이동을 통해 움직이는 교구 사제들 - 짐을 풀 때마다 자기 역량을 다하도록 결심을 새롭게 하는 - 에게 분명히 하나의 모범이 된다.

 

 

고통 중의 사목활동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대,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받은 욕설과 학대는 극심한 것이었다. 아테네인들에게는 조롱을 받았고(17,32), 리스트라에서는 죽은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의 돌팔매질을 받았고(14,19), 필립비에서는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16,23). 예루살렘에서 바오로는 그를 죽이려는 군중들에 의해 성전 밖으로 끌려갔는데, 만일 여기서 로마 군인들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21,39-32). 로마 군인들이 그의 보호와 안전을 위해 체포하고 있을 동안에도 그를 죽이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23,12). 

 

사도행전에서 자료의 배치와 관련해서 가장 놀라운 일 중 하나는 첫 번째 선교 여행의 사건들과 관련된다. 도시 방문의 순서가 바로 그 점을 보여준다. 이방인 공동체에 대한 바오로의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시기하고 새로운 교사의 말을 들으려고 많은 사람이 회당으로 몰려들면서 일어난 소란에 당황한 회당의 지도자들과 유력한 인사들의 모임에 의해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에서 쫓겨났다(13,50). 그래서 그들은 이고니아로 갔다. 여기서도 이방인들과 유다인들은 그들을 학대하고 돌로 쳐 죽이려 하였다(14,5). 이때 그들은 리스트라로 갔는데, 여기서 군중의 돌팔매질로 바오로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다(14,19). 이어 일어나는 일은 전혀 긍정적이지도 성공적이지도 못하였다. 

 

진정 놀라운 일은 바오로가 전에 그렇게 무자비하게 중단되었던 선교활동을 계속하고자 리스트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14,20). 사도행전은 바오로를 아주 비참하게 대우했고 그의 메시지를 결정적으로 거부했던 리스트라, 이고니온, 안티오키아 비시디아로 되돌아갔다고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14,21). 그는 돌아왔다! 그는 떠나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안티오키아(13,46), 고린토(18,6), 로마(28,28)에서와 같이 유다교 회당의 지도자들이 그의 노력을 거부했을 때 이방인 공동체로 간 적이 있지만, 바오로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선교의 출발지인 각 도시의 회당으로 거듭해서 돌아왔다. 이 도시들에 있는 각 신앙 공동체를 위한 바오로의 격려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14,22)라는 선언과 함께 이루어졌다. 

 

바오로의 교역 모습은 오늘날 거듭 교구 사제들의 모범이 된다. 바오로는 봉사하고 떠나고, 새로운 공동체들에서 전체적으로 다시 시작하고, 그가 아주 힘들게 이룩한 일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그의 일을 다른 누군가가 계속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오늘날 교구 사제에게 요구되는 특별한 종류의 가난이다. 바오로는 모범과 도전의 정신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다. 어떤 종류의 압박감, 반대나 거부 없이 회중을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할 수 없다. 적어도 바오로의 판단에서는 그러하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바오로의 업적을 반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오로의 독특함(인간적 개성, 유산, 재능, 능력 등)은 똑같이 재현될 수 없다. 그러나 더욱 큰 그림에서 보면 바오로는 오늘날 사제들을 위한 사목 직무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는 모범이다. 

 

문학적 견지에서 볼 때 바오로의 모습은 하느님의 말씀을 힘 있게 선포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바오로의 모습은 또한 모든 세대의 교리교사들에게 영감을 준다. 쇄신된 교회에 필요한 사목자의 유형을 구체적으로 그릴 때 바오로의 모습은 여전히 모든 시대에 적절한 영감을 준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다는 감동적인 말로 끝난다(28,30). 그가 알았던 유일한 문명의 바로 그 중심에서, 바오로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공개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가르쳤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시대 교구 사제직의 전형이다.

 

* 출처 : “Paul of Tarsus : A Model for Diocesan Priesthood”, Donald B. Cozzens(ed.), The Spirituality of the Diocesan Priest, The Liturgical Press, 1997년, 59-71면, 엄재중 기자 편역.

 

[사목, 2005년 4월호, 리차드 j. 스클바(미국 밀워키 대교구 보좌 주교)]



88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