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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와 신앙: 거북이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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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6 ㅣ No.337

[영화와 신앙] 거북이도 난다 - 그래도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시오.”

 

지난 4월 2일 선종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남기신 마지막 전언이라고 한다. 단순하지만 따뜻한 말이,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당부와 배려가 어떤 화려하고 장중한 수사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더구나 교황께서 세상과 인연을 맺은 시간 동안 참혹한 전쟁과 수많은 사람이 고통으로 가득한 상황에서 화해와 평화의 사도로서 소임을 다하고자 노력했던 행적들을 기억하면 ‘행복’이라는 말의 간절함은 더해진다.

 

 

참혹한 고통의 땅에서

 

세상은 아직 행복하지 않다.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거북이도 난다> (Turtles can fly, 2004년 작품)에서의 세상은 불행하고 참혹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이들이 있다. 이 영화는 이라크 전쟁이 임박한 무렵의 이라크 국경 지역 쿠르디스탄을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전개된다. 

 

바흐만 고바디는 쿠르드족 출신 영화감독이다. 2천만이 넘는 쿠르드인들은 이란과 이라크, 터키, 시리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쿠르드인들은 독립을 위해 걸프전에서 미국을 지원했고, 사담 후세인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라크 영토 내의 쿠르드인 거주 지역을 폭격했다. 쿠르드인들의 고난은 참혹했다. 화학무기와 지뢰로 팔다리가 날아가고 죽어나간 사람들로 넘쳐나는 끔찍한 상황 앞에서 이 쿠르드인 감독은 카메라를 잡고 자기 민족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북이도 난다>는 전쟁이 일상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아이들은 지뢰밭에서 지뢰를 캐내 이를 내다 팔며 살아간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터져버려 팔다리가 날아가는 위험천만한 일을 하는 아이들에게는 오랜 전쟁으로 생긴 나름대로의 대처방식과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삶의 숨결이 질기게 붙어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지천에 날개를 펴고 있는 땅에서 모질게 목숨을 부지해 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아이들은 하루하루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사랑의 마음을 키우고, 목발에 의지해서도 활기차게 뛰어다닌다. 

 

그러나 전쟁은 참으로 가혹하다. 피난민 행렬에 섞여 들어온 헹고(히레쉬 페이살 라흐만 분) 남매는 전쟁의 참혹함을 그 누구보다 혹독하게 겪은 아이들이다. 헹고는 두 팔을 잃었고, 그의 누이동생 아그린(아바즈 라티프 분)은 전쟁 중 이라크 군인들에게 부모를 잃고 자신마저 겁탈당한 뒤 아이를 낳았다. 

 

리가(아브돌 라흐만 카림 분)라는 이름의 이 아이는 앞을 보지 못한다. 어린 나이에 참혹한 일을 당하고 아이까지 낳게 된 아그린은 리가를 볼 때마다 끔찍한 고통으로 몸서리친다. 아그린은 악몽에 뒤척이다 리가를 물가에 갖다 버리면서 아이의 존재를 지우려 애쓴다. 리가는 제 운명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치기 바쁘다. 

 

아그린의 극심한 고통을 아는 오빠 헹고는 아그린과 리가를 돌보는 데 헌신적이다. 두 팔을 잃어 부자유스런 상황에서도 입과 다리를 이용하여 리가의 이불을 덮어주고, 아그린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늘 신경을 쓴다. 그러나 오빠의 헌신적인 사랑에도 아그린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다.

 

 

서로의 짐을 져주는 것, 그리스도 사랑의 시작

 

<거북이도 난다>를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죄 없는 아이들에게 왜 이런 가혹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왜 세상은 이처럼 극심한 불화와 대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세상의 평화는 정말 요원한 것인지, 묻고 또 물어도 답답하고 참담한 생각은 가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뒤에도 끊임없이 반목하고 대립하며 쌓아올린 증오로 인간은 서로를 부정하고 파괴해 왔다. 전쟁은 대량살상과 극단적이고 무차별적인 인성 파괴를 감행해 왔으며,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첨단무기의 가공할 위력은 세상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시대, 이러한 세상에서 과연 종교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참혹한 땅에서 용서와 화해를 어찌 구할 수 있을까?

 

끝없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래도 사람을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을 통하여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히브 7,9)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심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그 믿음으로 사람은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거북이도 난다>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무를 다하려는 헹고를 통하여, 앞 못 보는 리가가 지뢰밭을 헤맬 때 그를 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쓴 위성(소란 이브라힘 분)과 다른 소년들을 통하여 희망은 여전히 숨 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본능적으로 실천하며 서로의 아픔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서로 남의 짐을 져주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십시오.”(갈라 6,2)라고 쓰고 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힘든 아이들의 짐을 나눠지려 하며, 무언가 기쁘게 해줄 것을 찾으려고 고민한다. 작은 것이라도 같이 할 수 있다는 것,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법, 사랑과 연민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아이들의 실제 경험이 반영된 영화의 진정성

 

영화에 등장한 아이들은 대체로 연기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다. 특히 아이들의 실제 경험은 이 영화에 많이 반영되었다. 두 팔이 없는 헹고는 일곱 살 때 불발탄이 흩어져 있는 옛 전쟁터에서 놀던 가운데 고압선에 걸린 새를 구하려다 양팔을 잃게 된 소년이다. 리가 역시 실제로 앞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경험과 현실이 반영된 영화는 그래서 더욱 절실하고 소름 돋도록 사실적이다.

 

앞 못 보는 아기 리가가 수술을 받게 되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고, 영악한 소년 위성이 고바디 감독의 조감독으로 고용되었다는 후일담은 그나마 위안을 주는 소식이다. 영화는 이라크에 미군이 공습을 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미 고난과 고통을 받을 대로 받은 아이들에게 또 다른 전쟁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주님, 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사목, 2005년 5월호, 조혜정(영화평론가 · 수원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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