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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와 신앙: 안개 속의 풍경 -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남매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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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7 ㅣ No.355

[영화와 신앙]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남매의 여정 - 안개 속의 풍경

 

 

그리스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 (Landscape in the Mist, 1988년)은 어린 남매가 독일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 로드무비이다.

 

사실 이들 남매는 사생아로서, 아버지가 독일에 있다는 것은 아버지를 찾고 그리워하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둘러댄 말일 뿐이지만, 남매는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 없이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불라(타니아 파레올로구 분)와 알렉산더(미칼리스 제케 분) 남매는 아버지에게 가려고 기차에 오르기를 거듭한다. 도중에 무임승차로 발각되어 집으로 되돌려 보내져도 남매는 포기하지 않는다. 걷거나 버스 또는 트럭을 얻어 타며 계속되는 여행에서 남매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절제되어 더욱 참혹하고 비극적인

 

<안개 속의 풍경>은 매우 절제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어린 남매가 길을 가며 세상의 신산함과 잔혹함으로 상처 받을 때조차 감독은 섣불리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무심할 만큼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11살 된 불라가 트럭 운전기사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에서 이 영화의 절제된 시선은 소름 돋도록 냉정하다. 영화는 이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징적으로 처리하거나 은유로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카메라는 불라가 강간을 당하는 지점에서 포장이 드리워진 트럭을 뒤에서 비추기만 할 뿐이다. 대사도 비명도 음악도 없이 침묵한 채 바라만 볼 뿐이다. 옷매무새가 흩어진 운전기사가 트럭에서 내린 후에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미동도 않고 바라보기만 한다. 

 

이윽고 포장이 걷히며 불라의 다리가 드러나고 고개를 숙여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 불라는 다리 사이에 손을 넣다 뺀다.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는 불라. ‘아야’ 소리 한 번, 슬픈 표정 하나 없이 무표정한 불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프다. 지독히 냉정하게 절제된 표현은 그래서 더욱 참혹하고 비극적이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불라의 참혹한 경험에 대한 관객의 정서를 바닷가 장면에서 폭발시킨다. 불라가 여행 중에 만나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낀 유랑극단의 청년이 바닷가에서 불라에게 춤을 추자며 손을 잡고 리드할 때 불라의 감정은 생생하게 관객에게 전달된다. 불라는 벅찬 감정으로 멍하니 청년을 바라보다 해변을 따라 마구 달린다. 그러고는 주저앉아 흐느낀다. 카메라는 여전히 아주 작게 흐느끼는 소녀의 뒷모습만 지켜볼 뿐이지만, 어린 소녀가 감당해야 할 감정의 무게와 혼란은 보는 이에게 너무나 절절하게 전달된다.

 

남매는 그리스의 우울하고 절망적인 현실과 부딪히고 조우하며 독일의 국경까지 간다. 저 국경을 넘으면 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이윽고 안개 속에서 ‘태초에 어둠이 있었지. 그 후에 빛이 생겼어.’라고 말하는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이 대사는 영화의 초입에서 불라가 한 것과 똑같은 말이다). 그리고 안개 저편으로 나무가 서있는 풍경이 보인다. 

 

이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하나는 남매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남매가 무사히 국경을 넘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으면 볼 것이고, 간구하면 얻을 것이다

 

사실 영화에는 정답이 필요하지 않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자유로운 해석과 상상이 영화의 담론을 더 풍부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개 속의 풍경>의 결말도 다양하게 읽어낼 수 있다. 

 

신앙의 관점으로 본다면 남매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행은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여행, 곧 신앙의 성숙과정으로 등치시켜도 좋을 것이다. 남매가 겪은 혹독한 시련은 신앙의 성숙을 위한 과정에서 겪어내야 할 혼란과 시련과 위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 불라처럼 ‘아야’ 소리 한 번 없이 참혹함을 견뎌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육신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확실한 안개 속에 나무가 서있고, 그 나무를 찾는 순간 빛이 나타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신앙을 통하여 빛, 곧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메타포로 수용할 때 더욱 의미심장하다. 성서에는 하느님을 ‘빛’으로 의미화하는 대목이 많지 않은가. 

 

어쩌면 신앙이란 ‘안개 속의 풍경’처럼 어렴풋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유랑극단 청년이 길에서 주운 필름 한 조각을 남매에게 보여주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청년은 안개 속에 서있는 나무가 보이지 않느냐고 묻지만, 남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이윽고 청년도 사실은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무’를 ‘하느님 나라’라고 생각하면, 신자들이 ‘안개’ 속에서 ‘나무’가 있으리라고 믿는 지점을 향하여 나아갈 때 나무는 신앙의 목표가 된다. 그곳에 도달하면 빛(하느님)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안개 속을 헤매다 길을 잃을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나무’는 없다고 생각하며 끝없이 회의할지도 모른다. 

 

불라 남매는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독일로 향했다. 그들이 수없는 고통과 난관에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남매는 ‘안개 속의 풍경’을 보게 된 것이다. 믿으면 보게 될 것이고, 간구하면 얻게 될 것이다. 절망적이고 가장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은 찾아오지 않던가.

 

[사목, 2005년 7월호, 조혜정(영화평론가 · 수원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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