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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와 신앙: 안녕, 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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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359

[영화와 신앙] 안녕, 형아

 

 

슬픔을 희망으로 바꾸는 아이들, 우리도 그들처럼 할리우드에는 어린이와 동물이 등장하면 흥행에 성공한다는 속설이 있다. 이 같은 영화들은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계급이나 성별, 인종에 관계없이 보편적 호소력을 가지므로 관객층의 저변이 넓은 데다가, 어린이의 순수함과 동물의 재롱이 어른들에게 동심을 일깨우면서 어른 누구나가 거쳐왔던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또 때로는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자, 워즈워드(W. Wordsworth)의 표현대로라면 ‘어른의 아버지’로서 어른이 잃어버리고 살아온 것들에 대한 새삼스러운 교훈과 반성을 안겨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린이가 등장하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예는 적지 않다. 3년 전 <집으로>(이정향 감독, 2002년)가 ‘국민영화’로 불릴 만큼 대단한 흥행성과를 기록하더니 지난해 <아홉살 인생>(윤인호 감독, 2004년)에 이어 올해에는 <안녕, 형아>(임태형 감독, 2005년)가 한국 관객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다.

 

 

소아암 환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적절한 정서적 자극이 미덕

 

<안녕, 형아>는 이 영화의 각본을 담당한 김은정 작가의 조카들에 관한 실화라고 알려졌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조카 설휘가 뇌종양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는 과정 그리고 설휘와 동생 창휘의 이야기를 담은 「슬픔이 희망에게」라는 김 작가 언니의 수필집을 원작으로 하여 <안녕, 형아>가 탄생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설휘, 창휘 형제가 한별(서대한 분)이와 한이(박지빈 분)로 바뀌면서 한이의 시선을 중심 화자로 차용한다. 어느 날 형 한별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면서 개구쟁이 아홉 살 한이의 일상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아빠, 엄마가 형에게 매달려있자 심심한 한이도 형이 있는 병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형 한별이 같은 소아병동의 어린 환자 욱이와 친하게 지내자 한이는 은근히 심술이 난다. 그래서 욱이와 티격태격하는데, 학교에서의 말썽으로 엄마에게 혼이 날 것 같자, 마침 퇴원하는 욱이 집으로 피신한다. 한이는 욱이와 함께 뒷산의 타잔 아저씨도 만나고, 시골생활도 경험하며 서로 가까워진다. 그러나 욱이는 병세가 더 악화되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고 형 한별도 재수술을 받는다. 한이는 형을 위해 타잔 아저씨의 약수를 가지러 욱이네 뒷산으로 찾아간다.

 

이 영화가 영화적 완성도와 깊이 면에서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관계없이 인상적인 부분도 눈에 띈다. 우선 한이 역을 맡은 박지빈의 야무진 연기는 관객들을 대책 없이 울리고 웃긴다. 이 꼬마 배우 하나가 영화를 끌고 나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박지빈의 비중은 크다.

 

또한 소아암 환자에 대한 영화의 따뜻한 시선도 이 영화의 미덕 가운데 하나이며, 지나치지 않을 만큼의 정서적 자극도 대중영화로서 거둘 수 있는 성과이다. 특히 어린이들의 해맑은 모습과 형을 사랑하는 동생의 마음 등 어린이들이 가진 낙천성과 순수함은 이 영화가 암과 투병하는 아이들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맑은 기운을 끌어올린다.

 

 

어린아이의 단순함과 순수함이 기적을 낳는다

 

“어린이 전문병원의 암 병동을 오가면서 나는 느꼈다. 희망은 본능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슬픔을 느끼고 아파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워나갔다.”

 

<안녕, 형아>의 원작 「슬픔이 희망에게」에 들어있는 한 대목이다. 어린이들이 본능적으로 희망을 가지고 있더라는 그 구절이 강하게 마음을 흔든다. 우리가 어린이들을 보면서 잠시 고단한 현실을 잊고 위안을 받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희망’ 때문일까? 그들의 본능적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 그들에게 단순함과 순수함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에 대한 비유로 어린이를 세우신 것도(마태 18,1-5),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마태 19,13-15)이라고 어린이들을 축복하신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신앙에는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순수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복잡하게 이것저것을 가리고 재고, 여러 계산들이 끼어들면 그때부터 믿음의 힘은 약화된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도 바로 어린이들의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리라. 하느님께 대한, 하늘나라에 대한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이야말로 사람에게 본능적 또는 근원적 희망으로 각인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안녕, 형아>에서 한이는 형에게 타잔 아저씨의 약수를 마시게 하겠다는 그 생각 하나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초겨울 험한 산이 초래할 위험이나 어른들의 걱정 따위를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형을 위해서 약수를 가져가야만 한다. 아이의 이 단순하고 순수하며 강한 믿음이 기적을 낳는다. 아이와 친구가 산을 헤매며 기진맥진했을 때 홀연히 타잔 아저씨가 나타나 약수를 떠갈 수 있게 된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다분히 환상적으로 묘사된다. 아저씨가 있던 움막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화환이 걸린 십자가 형상의 나무가 서있으며, 아이들이 산을 헤매다 지쳐 쓰러질 즈음 타잔 아저씨가 나타나 아이들을 안고 산을 달려 내려가는 모습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이 하늘을 나는 듯한 아이의 느낌을 나타낸 것이든 타잔 아저씨를 일종의 구원의 천사(또는 아이들에게는 예수님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로서 의미화하는 것이든, 중요한 것은 아이의 간절한 바람(기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형이 약수를 마시지는 않지만, 그리고 한별이가 눈을 뜨는 시점이 한이가 형을 부르며 울부짖는 시점과 우연히 일치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 한이의 마음은 형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어린이 같은 단순한 믿음과 간절한 기도는 기적을 일으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시가 안다는 사람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마태 11,25-26).

 

[사목, 2005년 8월호, 조혜정(영화평론가 · 수원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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