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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교황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을 중심으로 본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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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9-11 ㅣ No.140

[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교황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을 중심으로 본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

 

 

존경하는 대주교님,

친애하는 동료 주교님 그리고 신부님,

아시아주교회의 대표 여러분,

교회 운동과 공동체 대표 여러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형제 자매 여러분,

 

 

I. 서론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신학 교수님이셨고, 후에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님이 되셨다가, 이제는 베네딕토 16세가 되신 교황님은 “모호하게 남아있는” 문제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신학과 사목에 있어서 정말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이나 보다 심층적인 조사와 해결책이 요구되는 문제들을 정확히 파악하십니다. 지난 40년 동안 교황님의 신학적, 철학적, 그리고 사회정치학적 저서 제목과 출판물의 시기를 비교해 보면 그분이 얼마나 정확하게 문제점들을 감지하고 계셨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바이에른 주 프라이징 대학의 젊은 교수였던 요제프 라칭거는 이브 콩가르(Yves Congar)의 저서 “교회의 평신도들(Lay People in the Church)"의 서평을 통해 제가 알기로는 처음으로 우리들의 현안들을 언급하셨습니다. 이미 1958년에 그분은 그 당시 가톨릭 평신도들의 ”이론과 실천“ 모두에 개혁이 필요한 주요 쟁점들을 예견하십니다. 그때 언급하신 점들은 가톨릭 평신도의 변화된 지위(”성숙도“), 그에 상응하는 신학의 발전 결여(평신도의 신학적 교회적 위치에 관하여), 보통의 사제직과 행정의 사제직 사이의 명료한 구별의 필요성, 평신도의 세속적 특징, 그리고 평신도 영성의 구체화 필요성, 등입니다.

 

3년 후 본(Bonn) 대학 교수 시절 그분은 권위 있는 신학 사전에 교회학에 대해 매우 독창적인 글을 남기십니다. 교회에서의 평신도의 위치에 대하여 “평신도의 위치는 단순히 부차적인 중요성을 지닌 봉사직으로 정의될 수 없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세속에서의 교회의 구원의 징표인 그리스도의 신비를 증거하는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 후 26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제7차 세계주교대의원회총회에서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행한 라칭거 추기경님의 강론들이 오늘날 우리의 현안들에게도 매우 시사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87년 세계주교대위원회에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에 관해 강론하셨고 하느님의 종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세계주교대위원회 후속 권고에 대해 기본적인 실무적 핵심을 제시하였습니다.

 

첫 강론은 세계주교대위원회 총회 첫 모임에서였습니다(1987.10.1). 추기경님은 <가톨릭교회 교리서(the Catechism of the Universal Church)> 준비위원회를 이끌며 위원회의 활동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교리서는 “타당하고(valid)” “시대에 맞는(current)” 기준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가톨릭 평신도 구성이 매우 필요함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교리서가 신앙교육을 위한 특권의 도구입니다.

 

추기경님의 두 번째 강론은 세계주교대의원회 첫 주 마지막 날(1987.10.6)에 있었습니다. “평신도”라는 말의 의미를 언급하시면서 평신도의 본질과 존엄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 [세 번째 강론(1987.10.29)은 위원장으로서 마르셀 레페브레(Marcel Lefebvre) 총대주교의 경우를 예시하셨으나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신학자, 추기경, 교황님으로서의 특별한 예지력을 지니신 분이시므로 저는 교황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을 통한 우리의 여정에 그분의 사상이 우리와 함께하길 바랍니다. 우리들 자신에게 자문을 해 봅시다. 신학자요 사목자로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님이 기다리셨던 신학적 발전은 무엇이었습니까? 교회의 교도권으로부터 추구하는 바는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조명하려는 주요 쟁점들은 일종의 “삼위 일체(trialogue)”를 이룹니다.

 

1. 친교로서의 교회의 신비

2.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

3. 아시아 평신도들의 가장 시급한 도전들

 

이 세 쟁점들을 짚어보기 전에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평신도들의 “지침서”이자 일종의 “권리장전(magna charta)”입니다. 그 영원한 가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선, 교회의 실천과 그에 따른 교도권에 비추어 평신도에 관한 제2차 바타칸공의회의 가르침에 대한 유기적 요약을 제공합니다. 둘째, 공의회이후에 발생하는 새로운 운동과 문제점에 대한 접근법에 있어서 공의회 이후의 평신도 참여의 경험, 경향, 형태에 관하여 예리한 분별력을 제시합니다. 셋째, 교회의 친교와 사명에서 ... 함께 나누는 은사와 책임에 대해 신자들 사이의 보다 깊은 인식을 고취하고 증진하기 위한 새로운 지표를 제시합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2항)."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포도나무, 포도밭, 일꾼들에 대한 비유(예, 마태오 20, 1-2, 요한 15, 1-11)를 계속 하는 것은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본질과 존엄성을 나타내는 매우 유용한 비유입니다. 활발함, 총체성, 그리고 생산성의 긍정적인 측면을 가진 포도밭의 비유는 생명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의 아름다움, 깊이, 매력, 그리고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명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최근의 신학과 그에 따른 평신도들의 실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일부 저자들은 “평신도들의 공의회”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공의회에서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평신도들이 참관자(observer)로 참석했으며, 또한 처음으로 평신도들이 공의회 문서의 구체적 주제와 성찰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공의회 자료들이 신학적 발전의 지침이 되고, 여전히 신학의 참고 자료이며 오늘날 가톨릭 평신도들의 삶의 실천적인 예로서 남아 있는 공의회 자료들을 기억해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비약적인 수확에 이어 1987년 세계주교대의원회는 지나간 20년 동안 전체 교회의 개별적 그리고 친교적 경험을 평가함으로써 이에 상응하는 교회의 실천을 도모하고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또 다른 주요 조치를 취합니다. 이것이 바로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고 선교적 노력을 새롭게 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우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 하여야 합니다. (마르코 16:15)

 

 

II. 친교의 교회론

 

<평신도 그리스도인> 8항은 성찰을 위한 “공통의 끈(common thread)”을 보여줍니다. “오직 안으로부터 나오는 교회의 친교의 신비는 평신도들의 ”본질(identity)"을 알게 하고 그들의 근본적인 존엄성을 드러나게 합니다. 이 존엄성의 상황 안에서만 교회와 세상에서의 평신도들의 소명과 사명이 정의될 수 있습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을 제시하는 기자회견에서 당시 교황청 평신도평의회 회장인 에두아르도 피로니오 추기경님은 세계주교대의원회 후속권고의 “새로움(novelty)”에 관해 질문을 제기 함으로써 강론을 마칩니다. “문서에서 새로운 어떤 것이나 구체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되고 더욱 심오한 새로움은 이것입니다. 이 문서는 참된 친교의 교회론 내에서 평신도에 대한 쟁점들을 찾습니다. 신자들은 고립되고 분리된 채 ‘독자적으로’ 고려될 수 없고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 (교의 헌장 1항)를 이루며 동시에 ‘보편적 구원의 성사’ (교의 헌장 48항)인 교회라는 전반적인 상황 안에서 고려됩니다.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1985년 세계주교대의원회 특별총회의 최종 보고서로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친교의 교회론은 모든 공의회 문서의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아이디어라고 언급됩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포도나무의 비유에 의해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신자들을 묘사합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요한 15: 1, 4). 이 단순한 말씀은 주님과 제자들, 그리스도와 세례 받은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끈의 역할을 하는 친교의 신비를 나타냅니다. 살아 있고 생명을 주는 친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친교로부터 그들 서로가 경험하는 친교가 흘러나옵니다.” 이 “코이노니아-친교”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친교입니다. 그와 같은 친교의 기회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 안에 나타납니다. 세례는 교회에서 친교로 이르는 문이며 토대입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자 정점입니다. (cf. 교의 헌장 11항)

 

회칙 교의 헌장 (인류의 빛)의 첫 번째 가르침에 따라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친교인 교회의 실재는 참으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 곧 신비의 핵심 내용이며 통합적인 측면입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특히 성인들의 친교로서의 교회-친교의 개념을 발전시킵니다. “교회는 성인들의 친교입니다. ‘친교’는 생명을 주는 이중의 참여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결합,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신자들의 전 공동체에서 삶을 나누는 소통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루는 일치입니다.

 

교회-친교는 소명과 신분, 직무, 은사, 책임의 다양성과 보완성으로 특징되는 “유기적(organic)“ 친교입니다. ”이러한 다양성과 보완성으로 모든 평신도는 각자 몸 전체에 대한 관계 안에서 자기를 인식하고 몸 전체를 위하여 전적으로 독특한 공헌을 합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교회에서 항상 일치를 이루심을 지적합니다.

 

공의회 직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구조를 반성하는 자리에서 신학자 라칭거는 신학적 쇄신과 전례의 실재에 대한 보다 폭넓은 상황에서 쇄신된 평신도 신학을 그 출발점으로 삼으셨습니다. “평신도와 사제, 수도자와 비수도자 사이의 구별 외에도 다른 차이점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상이한 기능과 상이한 길을 걷게 됩니다. 이는 서로를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동일한 차원에 두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는 교회의 의지에 따라 교회 그 자체의 새로운 시작의 하나로 이 분야의 시작을 가져왔습니다. ... 그리스도교의 전례는 ... 부활하신 주님과 식탁에 함께 앉을 때 모든 세례 받은 이들을 대신하여 하느님에 대한 친교적 숭배를 의미합니다. 저는 평신도에 대한 신학적 쇄신은 신학 그 자체의 쇄신과 전례 현실의 쇄신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성직자만의 특권도 아니고 소중한 과거를 지닌 유리 상자 안에 보관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그 본질에 의해 보편적 경배인 전례입니다.

 

교황 권고는 라칭거 추기경님의 가장 큰 관심 중의 하나에 대한 응답입니다. 평신도의 활동을 교회의 구조 내에서 과제를 수행하는 것으로 축소됩니다. 교회법을 인용하면, “그러나 그와 같은 과제를 수행한다고 해서 평신도가 수도자가 될 수는 없다. 실제로 과제를 수행한다고 해서 성직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품 성사를 통해서 만이 성직자가 될 수 있다. ... 보충적으로 행사되는 임무는 사목자들의 공식적인 위임이 있어야 즉시 형식적 합법성을 지니게 되며 그 임무의 구체적인 수행은 교회 당국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cf. AA 24항)”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계주교대의원회 후속 문서의 시사점은 매우 분명합니다. “평신도들이 전례와 신앙의 전파, 교회의 사목적 구조 안에서 합법적으로 수행 가능한 다양한 직무, 직책, 역할은 신성한 사제직과는 다른 구체적인 평신도 소명에 부합되어 수행되어야 합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또한 사도직과 복음화, 정결화, 일시적 사건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활기뿐만 아니라 아시아 일부 지역의 긴급한 상황에 지속적으로 기꺼이 참여하려는 의지에 있어서 남녀 평신도들의 공헌을 보다 깊이 있게 평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수많은 평신도 교리 교사들의 노력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신학자 라칭거 추기경님은 세계주교대의원회가 바오로가 코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12장에 부합되게 교회를 이끌어 가도록 조언하셨고 이와 같은 바램은 <평신도 그리스도인> 20항에 실현되어 있습니다. 또한 평신도의 “사목화”에 대한 위험에 관하여 23항에서 신학적 명료함과 용어에 대한 설명으로 추기경님의 완전한 동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III. 평신도의 소명


1. 평신도의 본질과 존엄성

 

라칭거 추기경님은 1987년 2차 강론에서 기본적인 전제를 언급하시며 “이 토론이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평신도’ 라는 개념에 깊이 있고 명료한 정의를 내릴 필요성”을 지적하셨습니다. 젊은 신학자로서 그 분은 보다 정확한 용어 사용에 주목하시고 사제도 아니고 수도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란 부정적인 의미의 lay person이 아니라 풍부하고 긍정적인 표현인 평신도, 즉 lay faithful을 선정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럼 누가 평신도입니까? 세계주교대의원회 후속 권고에 의하면 그들의 본질과 존엄성, 소명과 사명은 무엇입니까? <평신도 그리스도인> (9항)은 교의 헌장 (인류의 빛) 31항에서 이 질문들에 응답을 합니다. “‘평신도’라는 용어는 교회에 의해 성별되어 수도자의 상태에 속하거나 성스러운 명령을 받은 사람을 제외한 신자 모두를 의미합니다. 세례를 통해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하느님의 백성에 속하게 됩니다. 평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사도직, 예언직 왕직에 참여하게 됩니다. 교회와 세상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 전체의 사명에서 자신들이 맡은 부분을 수행합니다.

 

몇 가지 요소를 유형별로 기술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긍정적인 면에서 1)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활동적인 구성원이며, 2) 교회 전체의 사명에 참여하고, 3) 교회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집니다. 부정적인 면으로 평신도는 4) 서품받지 않은 비수도자이며. 5) 교회와 세상의 특별한 소명으로 정의되는 특성인 세상의 일에 종사합니다. 삶의 증거를 통하여 그들의 주요 과제는 6) 세상에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해야 하고, 7)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그분의 의지대로 세상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평신도의 본질과 존엄성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은 그리스도교의 성사, 특히 세가지 측면으로 평신도의 “특성”을 묘사하는 세례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하느님 아드님의 생명 안에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에 우리를 결합시켜주며, 우리를 영적인 성전으로 삼으시는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줍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명확한 용어로 기술합니다. “평신도인들의 전 실존은 신앙의 성사인 세례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근본적인 새로움에 대한 인식에 이르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으로써 이 인식이 하느님께 받은 저 소명에 따르는 책임을 완수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셰례를 통하여 평신도들은 사제, 예언자,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세가지 사명에 참여합니다. 서품 받은 사제와 수도자들과 함께, 세례로 받은 공통의 존엄성으로 교회의 사명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집니다. 평신도들은 그들이 세속적인 특징인 특별하고 구별되는 표시를 지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들에게 세속적 성격이 고유하고 독특하다”고 적시하였습니다. 우리는 평신도들의 본질과 행동을 인류학적이거나 사회학적 관점이 아닌 신학과 교회론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세상은 평신도의 소명을 실현하기에 특별환 환경이며 수단입니다. 시노드 교부들은 이 “세속적”인 측면은 세상을 남녀 인간에게 맡기시어 그분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게 하신 창조주시요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행위에 비추어 이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인류를 보내시어 그분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도록 하셨습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 15항은 “그러므로 교회에서 평신도의 위치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 생활의 새로움에 따라 규명되며 그 세속적 성격으로 구별된다”고 요약을 합니다.

 

그러므로, 평신도의 자기 인식과 투신에 대한 쇄신은 그리스도적인 실존의 원천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세례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 삶의 근본적인 “새로움”과 이 “구체적인 차이”를 쉽게 망각해 버리거나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대 레오 교황님의 유명한 권고를 되새깁니다. “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의 존엄성을 깨달으십시오!”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하려면 세례를 받는 것이 단순히 어떤 “클럽”이나 국제 기구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종교의 “멤버십”과도 비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종류의 멤버십은 “공통의 관심사”나 특정 지역 또는 특정 종교에 속하는 부모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입문 성사에 대한 가르침과 재발견은 “오래된” 혹은 “새로운” 개별 교회 모두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평신도의 본질과 존엄성에 대해 풍부하고 심오하게 기술한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신학자이며 추기경이신 요제프 라칭거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켰다고 믿습니다.

 

 

2. 성화 소명

 

평신도의 성화 소명에 대한 첫째가는 근본 “사랑의 완덕”으로 부르시는 소명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부르시는“ 이 성스러운 소명은 평신도의 진정한 존엄성을 드러냅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세례 받은 자들의 존엄성과는 불가결한 성덕의 동일한 소명을 받고 이를 함께 나눕니다. 주로 그리스도교적 삶의 충만함에 대한 소명이며 개별적인 삶의 상태에서 사랑의 완덕으로 부르시는 소명입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사도직 활동(Apostolicam Actuositatem)의 4항에 명시되었듯이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3:17)을 참조하여 이 소명의 “분명한” 중요성을 지적합니다. “영성 생활을 이유로 가정을 돌보지 않거나 다른 세속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천명합니다. 시노드 교부들은 이에 덧붙여 말했습니다. “평신도들의 생활의 일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평신도들은 참으로 일상의 직업과 사회생활 안에서 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소명에 응답할 수 있도록 평신도들은 하느님께 일치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친교로 인도하는 기회로서 일상생활을 인식해야 합니다.”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평신도들의 증언 임무가 그리스도의 예언직과 궁극적으로 관련되었다고 봅니다. “특별히 평신도인들의 책임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떻게 모든 인간과 사회에 삶이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과 희망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든 사람이 의식적으로 인정하고 바라는 ? 해답을 줄 수 있는지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교도권은 평신도들이 신앙과 삶의 일상적인 임무 사이의 적절히 잘 조화시켜 일관되게 삶을 증언할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거듭 촉구합니다.

 

이제 라칭거 추기경님께서 1987년 시노드 직후에 평신도의 “정의”에 관해 언급하신 것을 되새길 순간이 왔습니다. “평신도는 세례 받은 자로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명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처한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과 직업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평신도의 살아있는 성덕은 “성인들의 친교(communion sanctorum)” 인 교회 자체의 건설에 대한 첫째가는 근본 공헌으로서 교회의 거룩함에 대한 평신도들의 참여에서 우러나온다고 간주합니다. 성덕은 교회의 구원 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근본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조건입니다.

 

소비주의에 만연되고 대중 매체에 의해 지배되는 우리 사회에 ?동양이던 서양이던 ? 말과 영산의 홍수 속에서 개인의 존엄성은 신앙을 전파하는데 결정적입니다. 일관된 삶의 필요성은 극단적인 경우에 순교의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증인으로 이끕니다. 19세기 한국의 순교자들이 그러합니다.

 

 

IV. 평신도의 사명


1. 복음 선포와 삶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다시 가서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이 결실을 거두고 예수님과의 친교를 고려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친교를 낳는 예수님과의 친교는 절대 필수조건입니다.

 

친교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선교적 친교를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친교는 친교를 낳습니다. 본질적으로 친교를 대신한 선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 친교와 선교는 서로 심오하게 연관되어 있고 친교가 선교의 원천과 결실인 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친교는 선교를 낳고 선교는 친교를 지향합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파견하시어 지구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1:8) 은사로서 교회에 의해 받은 친교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란 사실을 교회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께서 주신 은사인 개인과 인류에 속한다고 느낍니다. 성령께서는 신자들의 마음 안에 내적 일치와 외적 성장을 위한 신비적 힘으로서 예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선교 사명으로서의 교회의 특징은 평신도들의 첫 번째 근본적인 임무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1967년 공의회 교령 사도직 활동 2항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그 본질상 사도직으로의 부르심입니다.)의 유명한 인용처럼 신학자 라칭거는 뛰어난 예지력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명은 그리스도의 실존을 역동성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더 이상 정적인 그리스도교에 피상적으로 부과된 외적 활동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선교적 각인이며 그 결과 매 시간마다 진정한 신자로서 외적 활동으로 표현해야 하고 가장 심오한 본질을 충족시키기 위해 활동해야 합니다.

 

사도직 활동 10항을 인용하여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평신도들에게 맡기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체계적인 교리 교육을 지적합니다.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평신도들은 교회의 주요 임무에 참여하게 되며 그리하여 신앙의 친교를 세우고 형성해 나갑니다. “성사들 안에서 신앙을 경축하며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실존인 애덕 안에서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며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라칭거 추기경님은 인터뷰에서 그 특유의 예지력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회에서 직업을 가지고 있는 평신도들의 구체적인 임무입니다. 신앙심에 의해 고취된 윤리적 성품을 직장에서 발전시켜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주변 세상에 보내는 메시지가 있으며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생활 양식이 있습니다. 두 가지 양상 모두 전적으로 “이 세상”의 원리와 생활 기준을 변화시키는 가능성과 힘을 지닙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들의 메시지가 인류의 참된 본질과 실존의 의미를 깨우치기를 강조합니다. “세속적인 본질” 때문에 평신도들은 인류 가족에게 대한 이 봉사에 피할 수 없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인류와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행동의 장으로서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개인의 존엄성 고취, 삶에 대한 침해될 수 없는 권리 보호, 사회적 참여를 위한 기본 환경으로서 종교적 자유 및 가정 인정, 연대를 위한 격려 및 지원으로서의 애덕, 정치에 참여하기 위한 모든 임무, 사회 및 경제에서 인류의 중심성, 일반적 및 개인적 차원의 복음화 문화 등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라칭거 교수는 -1907년도에 이미- 평신도들의 책임과 자유에 대한 모델인 어린 소녀들을 위한 기구(여성보호연맹)의 토대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분은 이러한 평신도들의 주도에 대해 “… 신앙에 내재되어 있고 자유 속에 이를 실현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이는 자유로운 시도에 의해 자유롭게 행해 질 때만 발생하며 교회가 해야 할 것들을 함으로써 자신의 자유와 신앙의 필요를 보여줍니다.

 

1987년 인터뷰에서 추기경님은 평신도들이 시노드에서 취해야 할 동기들을 강조하셨습니다. “… 단지 오늘날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 위한 새로운 격려입니다… 또한 신앙 안에 기쁨을 누리기 위한 부르심입니다. 시노드는 긴 문헌들로 이 세상을 위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적 인식을 형성하려는 것입니다. 우선 주교님들의 교류를 통하여, 다음으로는 교구에서 역동적으로 지속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일치된 특성과 하나의 대 가족으로 하나로 뭉칠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임무를 지닙니다. 이 임무는 시노드에 의해 개인에게 부과될 수 없습니다. 시노드는 단지 이를 인정하려고 격려할 뿐입니다.“

 

 

2. 세상에서의 사명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공의회 이후에 발생한 오해에 초점을 맞추고 신학자 라칭거 추기경님은 의미를 크게 수정하셨습니다. 오해란 평신도들의 “사도화”에 대한 것으로 교회의 내적 기능과 임무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세속적” 투신에는 해가 된다고 이해됩니다.

 

독일 교회를 예로 들면, 신학적 토론과 그에 따른 실천은 이러한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발간된 수많은 출판물들은 교회의 삶과 사명에의 참여가 교구 위원회와 협회 같은 고위 결정에의 참여권, 교회의 물적 행정과 같이 “내적” 봉사에의 참여로 이해됩니다. 의사 결정에 대한 참여 요구와 교회 당국의 결정 승인 요구는 이러한 정신을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신학자 라칭거 교수는 1970년에 이미 언급하셨습니다. “평신도 신학을 이야기 하는 것은 용어상 모순입니다. 평신도란 평범한 신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평신도 신학이란 ? 교회 운영의 일부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으로 이해되어 일종의 희극으로 들립니다. 이와 같은 오해가 공의회의 측면에서 교회 운영상의 아이디어에 묻혀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평신도에게 부여된 다양한 교회의 직무와 기능의 “평범한 본질”로부터 이어지는 사목적 사명인 교회의 한 가지 사명 내에서 구별할 것을 주장하며 세례가 이들 임무의 근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 봉사직의 종일 근무직 조차도 평신도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용 용어로 명백히 남아 있어야 합니다.

 

라칭거 추기경님은 다른 방향으로 토론을 이끄십니다. “우리는 더 완벽하게 회복해야 합니다. 아니면 더 깊이 그리스도인들을 돕는데 앞장서서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교회에서 맡고 있는 직책의 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고용인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규칙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동성에 의해서 각자가 인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감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제도적 장치 안에 개입된 정도에 따라 하나의 측정치로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측정치는 그 안에 내재된 신앙의 힘이어야 합니다.”

 

 

3. 평신도 투신의 양상

 

이와 같은 성찰은 교회의 삶에서의 평신도들의 참여 방법에 관한 문제로 이어집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개인적인 참여의 방법을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평신도의 첫 번째 불가결한 의무는 가정과 사회 및 직장 생활에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참여가 가능한 영역 중에서 첫 번째는 본당입니다. 주어진 장소에서 교회적 친교가 즉각적으로 표현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본당은 원리에 의하면 구조, 영역, 건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족,’ ‘일치된 영으로 피어나는 친교 정신,’ 친밀하고 환영하는 가정,’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본당은 삼위일체의 공동체(Eucharistic community)이기 때문에 신학적 현실을 근거로 세워집니다. 때문에 평신도의 첫 번째 근본적 투신은 삼위일체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본당 생활에 개인적인 참여를 적극 권합니다. 예를 들면 전례 봉사, 교리 공부, 또는 사랑의 사회 봉사 등입니다. 평신도들은 공의회와 대교구의 사목적 시노드 혹은 개별 본당과 같은 대표적 조직에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개인의 소명이 “유일하고 되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체 교회 공동체에 이롭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행사하는 사도직에서 복음 전파는 개인적이고 지속적이며 신속한 특성을 지닙니다.

 

이제 평신도 참여의 모임의 형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합당한” 협력의 형태입니다. 운동과 새로운 교회 공동체(모임의 새로운 시기)의 성장과 발전 때문에 평신도 참여의 양상에 대해 공의회의 가르침은 특별한 주의를 끕니다. 사도직에 관한 교령 19항은 평신도의 권리와 평신도 모임의 지침을 선언하고 있어서 공의회의 새로운 전환점을 의미합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교회의 실체가 교육 방법, 활동 영역, 그리고 외양에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동시에 공통의 목적에서 볼 때 포괄적이고 심오한 응집력으로 모두를 어떻게 함께 모이게 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사명에 모두 참여해야 하는 책임은 인류와 사회 쇄신에 대한 희망의 원천입니다.“

 

이 교황 권고는 또한 이들 모임이 인간의 사회적 특성에 어떻게 부합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의 투신은 문화에 대한 보다 광범위하고 효과적인 영향력을 허용하는 “사회적 실체”를 획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날로 세속화되는 사회에 직면하여 공동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과 선교적 투신에 유리하도록 도움을 제공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기독교가 소수인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세계적인 단체들이 가톨릭 신앙의 보편성을 나타내고 베드로 좌와의 연결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찰에 앞서 평신도 모임을 정당화하는 근본적인 교회론적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직에 관한 교령 18항처럼 평신도 모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친교와 일치를 의미”합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 30항에 명시되어 있듯이 평신도 단체들에 대한 교회성의 근본적인 기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V. 아시아 평신도들의 두 가지 긴급 과제

 

주님 안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평신도에 관한 시노드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는 아시아 대륙의 사목적 상황에 대하여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원리를 보다 구체화시켜 줍니다. 특히 두 가지 요소, 주로 평신도 양성의 필요성과 선교적 투신에 대한 각성을 강조합니다.

 

 

1. 적절한 교육의 필요성

 

그리스도교적 본질을 완전하게 충족시키기 위하여 평신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교회가 소수인 곳에서 적용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미사에 참석하고 성사를 받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평신도 교육에 관해 한 장을 할애하여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다시 언급합니다. “성장과 지속적인 성숙으로의 부르심, 언제나 더 많은 열매를 맺으라는 부르심”을 보여 줍니다.

 

교육의 근본적 목표는 소명과 그에 따른 삶의 의지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이란 <평신도 그리스도인>에 의하면 하느님, 교회, 기도, 영적 지침의 하느님 말씀 듣기, 개인적 은사와 시대적 징표 인정 등입니다. 보다 이론적인 지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세례와 신앙의 풍요성을 더 깊이 인식하고 그 풍요성을 더욱 완전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이 교황 권고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이 지역에서의 주교님들의 임무를 상기시키고, 내적 교육의 여러 측면을 강조합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내적 교육을 주장합니다. 이것만이 신앙과 삶, 신자와 시민으로서의 삶에 있어서의 일관성, 삶의 일치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합적 교육의 영역 중에서 영적, 교리적, 사회적 교육을 강조해야 합니다. 교육 장소와 자료, 사람과 단체에 대해서 시노드 문헌은 하느님께서 첫 번째 스승이시며 그분의 교육 사업은 예수님의 위격 안에서 드러나고 완성되며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로 와서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실체를 드러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보편적 교회와 교황은 평신도 교육에 있어서 불가분의 역할을 지닙니다. 그러나 주교님이 계신 특별 교회와 신부님이 계신 본당은 그들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평신도 교육 과정에서 소규모 공동체, 단체, 협회, 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환기시킵니다. 마지막으로 가정도 중요한 교육 활동을 수행하고 가톨릭 학교와 대학 역시 교육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성찰 측면에는 시노드 교부들이 원하셨듯이 아시아 대륙에 해당되는, 주로 지역 문화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육은 교육 그 자체에 기여하는 지역 문화에 상당한 주안점을 두어 전통 안에 심어졌거나 현대적 사건에 제시되는 가치들을 분별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아시아 교회> (22항)는 평신도들에게 토착화의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부여합니다. “주교님들, 성직자, 수도자들과 협력하여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들이 살고 있는 세속적 세상의 정신 체계, 관습, 법률과 구조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주입시키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평신도입니다. 아시아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보다 폭넓은 복음의 토착화는 지역 교회가 평신도들에게 성공을 거둔 적절한 교육에 크게 좌우될 것입니다.”

 

끝으로, 평신도 교육의 세가지 주요 도구를 언급하겠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 그리고 교회에 관한 사회적 교리 요약입니다. 이 세가지 자료는 성찰과 행동이 요구되는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선교적 각성의 중요성

 

교육의 필요성과 더불어 시간 부족으로 짧게 언급하겠습니다만, 아시아 평신도들의 선교적 부활의 필요성입니다.

 

시노드 후속 권고 <아시아 교회>는 1995년 마닐라에서의 세계청소년의 날 행사 기간 동안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에 주목합니다. “아시아의 교회가 자신의 숙명적인 섭리를 완수하여야 한다고 하면, 복음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과 부활을 기쁨과 인내심을 갖고 점진적으로 선포하는 예언으로서 절대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세계화 과정의 결과 중에 전반적 수준의 종교적 윤리적 확신이 일어나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모든 종교와 윤리에 대한 다양한 제안들이 진리에 대해 동일한 가치와 동일한 정도를 지닙니다. 단지 실질적인 차이는 어떤 면을 강조 내지는 선호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일반적 비교주의”에 대항한다면, 우선 평신도로서의 우리 자신의 본질과 존엄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열등감도 가질 필요가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래된 기독교 전통의 부족이나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에서 그리스도인이 소수인의 상황에 처해있다고 할지라도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엔 그리스도교의 풍요한 메시지와 삶의 일치는 “외적” 환경에서 위대한 “내적” 기쁨과 하느님 안에 신앙의 훌륭한 은사를 주신데 대한 깊은 감사로 이끕니다.

 

라칭거 추기경님은 1987년 시노드 이후 단언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임을 기뻐하고 바로 이 때문에 교회는 그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의해 살아갑니다.“

 

우리가 소수의 환경에서 살았다면 삶의 일치는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적 존엄성이 그들 주변 세상을 연결하는 관계를 형성하여 상호 관계를 증진하고 평화롭게 함께 공존하도록 합니다.” 우리에게는 “신자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신자는 가깝거나 멀던지 항상 신자 공동체 안에서 생활합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개별 교회를 보편 교회와 연결하는 “실질적이고 본질적이며 지속적인 유대”에 관해 언급합니다. 이는 보다 “보편적인” 숨을 쉬도록 인식하게 합니다!

 

특히 교회가 소수인 곳에서 평신도 모임의 다양한 형태를 이용하기 위한 또 다른 기회가 있습니다. 교회 및 또 다른 실존의 이유- 개인의 사회적 차원과 같은 ? 모임의 형태들은 행동의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합니다. 이는 신자들 수가 적은 다원적이고 단편적인 사회에 특히 유효합니다. 이 모임들은 평신도들에게 통합적이고 지속적인 교육을 제공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신학자, 추기경, 교황님으로서 평신도 모임의 형태를 공개적으로 용인하신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실로서 긍정적인 결정이며 그리스도교적 우애의 새로운 형태에서 기인된 희망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1958년에 간행된 조그만 책자에서 프라이징에서 교리 및 근본 신학을 강의한 젊은 교수는 삶을 주고 수정하며, 모든 교회생활뿐만 아니라 본당 생활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교회 공동체 내의 원리로서 그리스도인의 우애를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교 모임을 세우면서 내부의 누룩처럼 새로운 운동을 격려하고 지지하기 위하여 평신도들이 파견되고 복음화 사업으로 투입됩니다. 이것이 바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님과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위대한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주님 안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을 살펴봄으로써 이 기나긴 분석을 마치고자 합니다. 개신교 교수인 크리스토프 마크시스는 베를린의 흠볼트대학에서 초대교회사를 강의합니다. 몇 년 전 발간한 저서의 제목이 “그리스도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비결은? (How did Christianity ever survive antiquity?)”이었습니다. 저자는 일곱 가지 역사적 이유를 들어 그 질문에 응답합니다. 사진이나 “신비한” 행동, 또는 도움은 제외되었습니다.

 

그가 제시한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주제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마크시스의 출발점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비 기독교인들로부터 개종한 사람들이라는 짙은 “인상”입니다. 이는 비기독교 세계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 개개인 모두에게 이례적인 신뢰성을 드러냅니다. 그 저자는 특히 수도자와 주교들뿐만 아니라 순교자와 선교사들을 자극한 “친밀한 개인적 효과”를 주목합니다. 그의 논문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그리스도교 개인이 함께 나눈 증거로 표현되고 인식된 유일하고 공통적인 역동성에 있습니다. 사목자건 평신도이건 그들의 신앙은 만역에, 그리고, 그러나 등 부수적 조건이 없이 완벽한 충만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 점에 관하여 라칭거 추기경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삶의 공동체는 이 삶에 참여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곳은 바로 진실이 드러나는 곳이고 그곳에서부터 삶이 시작됩니다.”

 

교황이 되시기 직전인 2005년에 라칭거 추기경님은 증인이 되고 창조적인 소수가 되라는 분명한 초대의 말씀으로 수비아코의 회의를 끝마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참으로 역사의 순간에 살아있는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주재하심을 목도합니다. 하느님에 관하여 부정적인 증언을 하고 그분에 반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형상을 어둡게 하고 불신의 문을 엽니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을 응시하여 사람들은 참된 인류애를 알게 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빛에 의하여 계몽이 되고 하느님께서 마음을 열어주시어 다른 이들에게 자신들의 지식을 전파하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는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금년 말이면 22번째 생일을 맞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은 신학적 기반이 아주 “젊고” 교회와 세상에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열정과 요점이 풍부한 문헌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대와 희망이 신학자 요제프 라칭거의 마음속에서 성숙되었거나 아니면 공의회 이후의 가르침과 시노드 후속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에 의해 교회의 교도권의 마음도 충분히 만족하였다고 확신합니다. 이제 이 요점들을 우리의 공통된 성찰로 제시하고 이를 우리 지역 교회와 가족, 일터, 자유시간, 본당, 교회 운동과 새로운 공동체에 심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의 몫입니다.

 

감사합니다!

 

조셉 클레멘스 주교

교황청 평신도평의회, 바티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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