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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현대교회의 가르침: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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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05 ㅣ No.616

[현대교회의 가르침] (44)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상)


“하느님 사랑에 감화되면 이웃 사랑 멈출 수 없어”

 

 

해설을 시작하며 

 

제목이 다소 평이했나보다. 처음에는 필자의 눈길이 본 회칙에 선뜻 가지 않았다. 솔직히 ‘허’를 찔린 듯한 느낌마저도 있었는데, 뮌헨-프라이징 대교구장 시절의 사목표어 “Cooperatores Veritatis”(진리의 협조자)가 말해주듯 그리고 24년간을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봉직해 오신 요제프 알로이스 라칭거(Joseph Alois Ratzinger) 추기경님의 ‘과거’ 때문에 회칙의 제목이 다소 식상한 감도 주었다. 게다가 ‘유럽의 재복음화’를 위해 베네딕토로 명명하신 터라 발표하실 첫 회칙은 긴박한 생명윤리나 무분별한 상대주의 혹은 세속화에 대한 저항 등을 담은 문헌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다. 국내언론에서도 보도된 것처럼, 실제로 교황님께서는 2005년 4월 19일 취임하신 그해 이탈리아 정부가 6월 12일부터 13일까지 인간 배아에 대한 치료 복제와 실험의 타당성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자 “인간 배아는 하느님이 주신 생명이며 생명은 투표대상이 아니기에” 반생명적 국민투표를 보이콧해 기권하도록 호소하셨고 그 결과 투표율 미달로 부결시키신 적도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문헌을 접해보면, 복잡하고 긴급한 현대사회의 문제를 가장 단순한 진리 즉 ‘사랑이신 하느님’으로 명쾌하게 풀어주셨음을 즉시 깨닫게 된다. 지면이 매우 제한적인지라, 이 회칙의 내용을 여덟 가지의 가르침으로 요약해보고자 한다. 더 자세한 것은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의 제15회 학술심포지엄(2007. 11. 10.)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을 참조할 수 있겠다.

 

 

가르침 1. 회칙의 취지: 종교 · 종파 간 갈등의 유일한 극복 방법은 사랑 체험 

 

교황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인간의 새 힘을 불러일으키고자》(1항 §3) 이 회칙을 발표하신다고 밝히는데, 왜 하필 취임 첫 해, “새 힘”의 필요성을 느끼셨을까? 바로 “복수나 심지어 증오와 폭력의 명분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결부시키는 오늘날”의 시대적 위기상황 때문이다.(참조: 1항 §3) 

 

사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혹은 ‘알라의 이름으로’ 혹은 ‘여호아의 이름으로’ 서로 대립해 가해자와 피해자 역할을 수시로 바꿔가면서 증오, 폭력, 복수를 행하고 있다. 늘 불안한 팔레스타인 정황이 그렇고, 2001년 미국의 9·11 항공기자살테러, 게다가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처형된 한국개신교도 김선일 사건이 그렇다. 

 

이렇게 단언하신다: 

 

《사랑을 체험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의 빛이 세상에 들어올 수 있게 하십시오. 이것이 제가 이 회칙을 통하여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권고입니다.》(39항) 

 

그리고 당시 기자회견의 형식으로 회칙을 반포(2005.12.25)하신 것도 이례적이었지만, 배석한 ‘Cor Unum’(한마음) 교황청 평의회 의장 폴 요제프 코르데스(Paul Josef Cordes) 대주교의 인터뷰에서도 이런 취지는 확인되었다: 

 

《…구체적인 예: 최근 쓰나미 참극에서, 가톨릭 신자들 편에서 발휘된 합법적인 행위와 함께 우리는 폭넓게 대응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카리타스 연맹”(Confederazione Caritas)은 단독으로 미화 4억 달러 상당을 모을 수준이었으며, 이미 짜임새 있게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인도적 필요에 직면해 애덕의 힘을 인상적인 방법으로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침묵 속에 행한 것이 얼마인지는 기억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2. 신사숙녀 여러분, 이것들은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의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오늘 소개하기 위한 명백한 전제조건들이었습니다. 바로 당신 전임자들처럼, 지금 교황 성하께서도 이런 교도권의 첫 문헌과 함께 막 시작하신 당신의 교황직무의 기본 노선들을 설계하고자 하십니다. 동시에 명백히 이해되어야 할 것은 오늘의 회칙 본문이 아예 애덕 활동에 대한 첫 번째 회칙이라는 점입니다.…》 Intervento di S.E. Mons. Paul Josef Cordes, Presidente del Pontificio Consiglio “Cor Unum”, in: Conferenza Stampa di Presentazione della Prima Enciclica del Santo Padre Benedetto XVI “Deus Caritas Est”(2006. 1. 25.), nn. 1-2, 출처: http://212.77.1.245/news_services/bulletin/news/17877.php?index=17877&po_date=25.01.2006&lang=it.

 

 

가르침 2.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리스도인 됨”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너무나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내어주신 하느님의 외아들(요한 3,16)과의 만남”이라고 단언하신다.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제 “계명”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도록 재촉하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참조: 1항, §2)

 

 

가르침 3. 에로스와 아가페 그리고 가장 철저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전통적으로 극히 꺼리던 단어 “에로스”는 “절제되고 정화되어야 할 상승의 힘”인데도 “남녀 간의 성적인 사랑”으로 축소되어 사용되었고 반면 그리스인들조차도 잘 사용하지 않던 단어 “아가페”를 구약 성서가 선택한 본뜻은 “자아도취가 아니라 다른 이를 참되게 발견하는 사랑”이고 “이타적이며 신적인 하강의 힘”이었다. 그러기에 두 단어는 “서로 다른 차원을 가진 하나의 실재”라는 것이다.(참조: 1-8항)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은 “에로스이면서 동시에 아가페”인데(참조: 9-11항), 그 하느님의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나자렛 예수님이시다. 그분이 세운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제 참으로 하나”가 될 수 있기에 ‘계명’으로서의 사랑도 가능해지며 그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 ‘지금 여기서’ 《교회는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가까운 것과 먼 것의 관계를 언제나 새롭게 해석해줄 의무가 발생》(15항)하기도 한다고 지적하신다.

 

 

가르침 4.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불가분 관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쟁이”(1요한 4,20)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랑은 그 속성상,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도록 의지적으로 일치함으로써 ‘우리’가 되려고 한다고 가르치신다. 계속되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화되어 이웃 사랑을 멈출 수 없기에, 사랑의 이중 계명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고 강조하신다.(참조: 16-18항)

 

* 이동호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8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로마 라테란대학교 알퐁소대학원에서 윤리신학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 오류동본당 주임신부를 맡고 있으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윤리신학 교수,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교육 소위원장으로 활동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1월 4일, 이동호 신부]

 


[현대교회의 가르침] (45)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


“애덕 실천, 교회 존재 드러내는 필수적 표현”

 

 

가르침 5. 삼위일체적 사랑의 표현인 교회의 조직화 

 

교황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도 사랑으로 ‘함께’ 일하시듯(참조: 19항) 개인이 아닌 교회공동체에도 본분인 애덕 실천을 위해 “공동으로” “조직화”가 필요했다고 강조하신다. 사도들의 직분인 ‘기도’(leitourgia)와 ‘말씀’(lerygma)의 봉사로부터 분리시켜 만든 ‘식탁’의 봉사(diakonia)인 부제 직분은 원래 사회적 봉사만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영적 봉사였다”고도 상기시키신다. 그래서 애덕 실천이야말로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 일종의 복지활동이 아니라 교회 본질의 일부”이며 “존재를 드러내는 필수적 표현”이라는 것이다.(참조: 20-25항)

 

 

가르침 6. 국가와 교회의 상호 연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는 부자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면서 가난한 현실의 현상 유지에 악용된다는 마르크스주의식 주장으로 인해 한때 교회의 아가페-카리타스의 활동이 단순한 ‘자선’(eleemosynae)으로 오인된 적도 있다고 지적하신다. 이제는 국가와 교회 간에는 국가가 개인을 전체적으로 직접 통제하면서 관료적으로 체계화하기 보다는 중간 집단인 교회의 활동을 보조하는 ‘보조성의 원리’(principle of subsidiarity)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본문에 언급은 없지만 잠깐 설명하자면, 이 원리는 가톨릭 사회교리(social teaching)의 주요 원리 중 하나로서 1931년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40주년」 35항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개념인데, 그 안에서는 세 가지가 강조되었다. 첫째로 사회는 개인의 인격을 존중할 것, 둘째로 큰 단체는 작은 단체를 보호할 것, 셋째로 국가는 개인이든 단체이든 국민을 보조할 것 등이다. 

 

비록 국가가 정의로운 이성의 판단에 따라 공동선의 증진을 추구하지만 그 안에는 특수이해 관계자와 권력으로부터의 부자유스러움이 항상 있다. 그래서 교회는 정치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정화와 윤리교육 그리고 애덕-카리타스 활동을 통해 국가와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러기에 국민으로서의 교회 평신도들도 조직화하고 제도화하여 다른 일반국민들과 공동선의 증진에 있어서 상호 연대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저 단순히 곁에서 협력하는 수준이 아니라 직접 책임지는 주체로서 연대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참조: 26-30항)

 

 

가르침 7. 교회의 애덕 실천이 지닌 고유성 

 

교황님께서는 애덕 활동을 하는 교회는 “단순히 일반 사회복지기관이 아님”을 명백히 밝히신다. 왜냐하면 교회의 애덕 활동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기 때문인데, 그 첫째 원칙은 긴급 요구와 특수 상황에는 “무조건적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구·국가·국제 카리타스 기구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지원함으로써 일반 사회복지기관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나무 무늬는 같아도 그 뿌리가 다르듯이, 외적으로는 ‘같은 모양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고는 하지만 그 동기의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이런 활동가들에게는 전문적인 훈련뿐 아니라 “마음의 양성”도 제공해야 한다.(참조: 31항 가)) 

 

둘째 원칙은 “당파와 이념 전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고(참조: 31항 나)), 셋째 원칙은 애덕 실천이 “개종 권유”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하느님에 대해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하며 애덕만을 보여주어야 할 때”를 분명히 식별해야 한다는 것이다.(참조: 31항 다))

 

 

가르침 8. 주교의 책임 하에 있는 교회의 애덕 실천과 행동 원칙들 

 

교황님께서는 애덕 활동의 참된 주체가 교회 자체라는 것, 보편 교회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황청 사회복지 평의회가 설치되어 있지만 개별 교회에는 “주교”가 첫째 권위자라고 강조하신다. 교회법이 주교에게 “다양한 사도직 활동들을 조정할 책임”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인데, 현실적으로 애덕 실천에 있어서 “긴박한 요구나 특수한 상황”에 처했더라도 개입해야 할 “순서”를 식별해야 할 책임 또한 주교에게 있다는 것이다.(참조: 32항)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해 애덕 실천에 책임 있는 주교가 태만함으로써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실무 책임자가 지녀야 할 마음의 책무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저 ‘주님의 도구’로서 “부여받은 권한 만큼만” 봉사하면 된다는 그런 의미인 것이다. 교황님께서는 끝도 없는 과도한 현실적 요구 앞에서 결코 “낙담할 필요도 없고” 이럴 때일수록 세속주의와 행동주의로 기울어질 유혹에 대항할 “기도”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진다고 가르치신다.(참조: 35-37항) 

 

교황님께서는 더 나아가, 가톨릭 사회복지기구의 실무 책임자들이 세상을 ‘주도적으로’ 개선하려는 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 지역 주교에게 협력해야 한다는 것, 다른 단체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자신이 내어주는 선물 속에 자기 자신을 담아주어야 한다는 것, 등을 제시하신다. 봉사자들은 봉사의 수혜자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 이유는 봉사자 자신이 봉사하면서 동시에 수혜자도 되기 때문이라고 밝히신다.(참조: 33-35항) 그리고 그저 “사랑의 체험”을 하기를 바랄 뿐이시라는 것이다.(참조: 39항)

 


해설을 마치며 

 

교황님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관점은 다른 교회문헌에서 보다도 독특하게 빛난다. 임신부 엘리사벳에게 하신 석 달 동안의 산후조리 봉사와 그리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보여주신 전구(轉求) 봉사 속에서 성모님을 ‘애덕 실천의 주보자’로 제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도자로서 시인으로서 이렇게 마무리 기도를 바치신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저희에게 예수님을 보여주소서. 저희를 예수님께 인도해 주소서.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어, 저희도 참된 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목마른 세상 한가운데에서, 생명의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되게 하소서.》(42항) 

 

필자는 종종 바보 같은 생각을 해본다. 종교·종파 간의 우열은 어떻게 가릴 수 있을까? 교황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 체험’으로 종교·종파 간의 갈등이 극복될 수 있다면, 어느 종교 어느 종파가 그런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 체험이 가능할지 아니 그런 사랑 체험을 해야 할지도 질문거리가 될 것이다. 죽을 때 가장 진솔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인정한다면, 현존하는 주요 종교 창시자들의 마지막 순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천수를 누린 80대 노인 싯다르타의 식중독사(食中毒死)에서인지, 부를 누린 60대 노인 무하마드의 병사(病死)에서일지, 십자가에서의 30대 청년 예수의 잔혹사(殘酷死)에서일지, 이제 그 신봉자들이 스스로 답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1월 11일, 이동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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