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 배움터: 기도의 징검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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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6 ㅣ No.650

[기도 배움터] 기도의 징검다리 (1)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묵시록의 이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우리 안에 살고 계시며 우리와 함께 행동하시는 현재형 하느님을 뵙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이야기를 들으시려고 ‘지금 여기’ 계신다. 우리는 친구에게 말하듯 매순간 하느님과 자연스럽게 담화(기도)할 수 있다. 기도 안에서 이런 담화가 일어나려면 기도 준비가 매우 중요하다. 기도 준비란 성경읽기를 말한다. 성경은 적어도 열 번을 읽어야 한다. 마음에서 어느 정도 기도할 준비가 됐다고 판단되면,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선택하고 준비한 성경 구절을 천천히 읽는다. 만약 피정 중이라면 영적 지도자에게 받은 성경 구절을 읽을 것이고 일상생활 중이라면 매일미사의 독서를 읽는 것도 좋다. 또 네 개 복음서 가운데 한 복음서를 택하여 기도 중에 한 단락씩 읽어나가는 것도 좋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 기도를 하게 되면 하느님을 떠나 자기 감정의 폭풍우 속에 들어가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기도에는 중심이 필요한데, 성경을 중심으로 하게 되면 하느님 안에서 기도할 수 있다.

기도에서 성경 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한 학생과 담화를 주고받은 예를 나누고 싶다. 최근 ‘성서와 문화’라는 수업에서 ‘야곱과 에사우’의 일화를 다루었는데, 이 학생은 혼자 성경을 읽다가 ‘에사우’에게 격분하였다. 형이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방치한 장자권을 동생이 가로챈 것은 정당하다며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성조시대 때 야곱이 둘째로서 장자권을 얻기란 불가능했던 일이 자신의 역사와 동일시되면서, 오직 태어난 순서가 다르다 하여 형제 사이에 다른 대우를 받을 수 있는가 하며 가정생활에서 축적된 둘째로서의 설움과 억울함이 한꺼번에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학생에게 “성경을 읽다가 그런 체험을 했군요. 그럼 이제 그 말씀과 학생의 심정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가십시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고 조언했다. 학생의 예화에서처럼 성경을 충분히 읽다보면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절실하게 찾는 욕구나 갈망 또는 숨겨져 있던 과제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 순간, 하느님 앞에 쏟아내는 것은 가히 폭발적인 힘이 있다. 이렇게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이 폭발하면 본당신부님이나 수녀님, 또는 영적 지도자에게 가서 이를 함께 다룰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가 기도 안에서 혼자 폭발적 감정을 다루다 보면 기도보다 심리적 상황에 매몰될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도는 아니다.

이상 묵시록 21장의 말씀을 인용하며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도록 여러분을 초대하였다. 또한 현실 상황을 배제하지 않는 기도를 말하기 위하여 한 학생의 예를 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성경 읽기 안에서 우리 감정과 욕구와 숨겨진 과제들을 하느님께 충분히 말씀드릴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해야 할 행동이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만약 하느님께 자신의 처지를 다 말씀드렸고 “하느님,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하고 질문을 드렸다면 이후부터는 침묵 가운데 온전히 하느님의 활동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 묵상이다. 이 강에서 저 강으로 징검다리를 건너가듯 기도에는 단계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기도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기도 준비 - 성경 말씀 읽기(경청) - 묵상 - 기도(감사, 찬양, 청원 등) - 관상기도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첫째, 둘째 단계만을 이야기하기로 한다.

첫째, 기도 준비의 단계. 이는 묵상기도에 깊이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단계이다. 기도는 성체가 모셔진 성당에서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렇지 못한 여건도 많으니, 하느님께서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믿음 아래 혼자 조용히 머물 수 있는 장소에 간다. 등을 곧게 펴고 바르게 앉는다. 눈은 감거나 뜬다. 천천히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며 심호흡을 하면서 육체적, 정신적 긴장을 풀고 고요히 기도에만 집중하도록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침잠’이라 한다). 숨을 들어 쉴 때마다 하느님의 힘과 현존을 마신다고 의식하며 마음속으로 점점 더 깊이 내려간다고 생각한다(‘하느님 현존의식’이라 한다). 그런 다음 묵상할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하는 기도를 한다. 예를 들면 “주님, 오소서. 제 마음을 깨워 당신과 함께 기도하기를 소망하오니, 귀여겨 들어주소서” 하고 기도한다.

기도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 고요함으로 향해 가면 때론 어떤 기억이나 감정이 떠오를 수 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 앞에서 짧은 문장으로 반복을 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앞에 언급한 학생처럼 고요함을 향해 가며 충분히 다뤘지만, 다시 ‘야곱과 에사우’의 일화가 떠오른다면 “아, 내가 둘째라서 서러웠구나” 또는 “내가 둘째라서 그렇게 화가 났구나” 하는 식의 문장을 되뇌이며 떠나보낸다. 또 다시 무엇이 떠오르면 그렇게 하여 보낸다. 이를 반복하여 보내고 또 보낸다. 이렇듯 감정에만 치닫지 말고 이를 하느님께 다 말씀드리고 다시 잠심을 반복하며 기도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기도 준비의 단계는 대략 10분 정도이다. 물론 기도 초기에 이런 일이 모두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런 역동이 일어나면 당황하지 말고 하느님께 내어맡기자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둘째, 성경 말씀 읽기(경청) 단계. 교회 전통에서는 이를 ‘렉시오 디비나’ 곧 ‘거룩한 독서’라 부른다. 이는 자신의 의견이나 사고 활동을 제쳐두고, 오직 거룩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단계이다. 그런데 또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선택한 성경 본문을 외울 정도로 열 번 이상 읽는 것이 좋다. 거룩한 독서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만드신다. 이러한 일이 바로 묵시록 21,5에서 말하는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는 하느님 약속의 강력한 실재이다.

남아 있는 기도 단계와, 기도에서 매우 중요한 ‘영적 쓰기’에 관해서는 다음 호에서 다루기로 한다.

* 이명기 수녀는 1986년 성심수녀회 입회, 첫서원 후 성심여고에서 교육사도직 수행, 종신서원 후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취득, 2006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기초교양필수과목인 ‘인간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외침, 2015년 2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이명기 수녀(성심회, 가톨릭대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교수)]

 

 

[기도 배움터] 기도의 징검다리 (2)



신앙인에게 기도란 삶의 질곡을 안고 하느님의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다. 곧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우리가 피정할 때 지도자에게 자주 듣는 권고는 밥 먹는 중에, 청소하는 동안에, 마당을 걸으면서, 심지어 잠을 자면서까지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훈련이 되면 생활을 기도로 가져가는 일이 차츰 친숙해질 것이다. 삶을 기도로 만들 때 흔히 경험하는 것은, 사람이 단순해지고 사물이나 사건을 좀 더 명확하게 보게 된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민감해지며 조금이라도 헌신적인 마음과 태도를 지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효과이다. 기도의 효과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느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곧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도록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지난번에 이어 기도의 셋째, 넷째 단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셋째, 묵상의 단계. 기도의 준비단계와 성경말씀 읽기 단계를 통해 잠심 상태에 이르렀다면,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며 묵상을 잘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하고 묵상에 들어간다. 묵상이란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께 몰두하고, 하느님과 관계된 일만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묵상할 때는 신체를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있지만, 우리 내면에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총동원하여 활동한다. 이러한 내면의 활동 가운데 지성을 주로 사용하는 것을 ‘묵상’이라 한다면, 묵상의 재료인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어떤 의지가 움직이고 정감이 일어나 주님과 감동어린 대화를 나누는 것을 ‘정감의 기도’라 부른다.

그런데 정감의 기도라 해서 모두 긍정적 감정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 감정의 토로나 원망, 불평, 탄식 등도 정감의 기도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성경에서 자주 본다. 시편 가운데 탄원시편에는 하느님께 직접, 대담하게 호소하는 화자(話者) 들의 열기로 가득하다. 하느님이 고통의 원인 제공자라며 하느님을 원망한다든가, 자신의 무죄한 고통으로 하느님의 위엄과 영예가 사람들에게 의심을 사게 되었음을 기억하라고 하느님께 요구하기도 한다(시편 44편 참조). 성경 인물들의 예로 우선 창세기에 나오는 ‘하가르’를 들 수 있다. 하가르는 주인에게 아들(이스마엘)을 낳아 안겨주었으나, 사라이에게서 이사악이 태어나자 아들과 함께 광야로 내쫓긴다. 비록 주인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넉넉히 싸서 내보냈다 하더라도 여인이 광야를 떠돈다는 것은 거의 죽으라는 것과 같다. 당장 마실 물이 떨어지자 “아기가 죽어가는 꼴을 어찌 보랴!”(창세 21,16) 하며, 주저앉아 목 놓아 울 뿐 시편 시인들 마냥 하느님께 직접 원망하거나 따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느님께서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21,17). 하가르는 주님과 담화(기도)한 것은 아니지만 하늘 아래 살아 있는 존재로서 통곡하고 애통해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나인’의 과부는 또 어떠한가? 이 여인은 죽은 외아들의 상여 옆을 그저 망연자실 걷고 있을 뿐 예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과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죽은 이를 되살려 주신다(루카 7,12-13). 여인의 그 큰 슬픔을 주님이 알아보신 것이다. 우리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다만 십자가 아래에 앉아 있는 것이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대국 니네베에 구원을 선포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 영 내키지 않아 투덜거리는데, 이러한 ‘투덜이의 기도’ 역시 정감기도에 해당한다. 물론 하느님을 절대 우위에 둘 것이지만, 그분을 향해 자신의 기쁨도 슬픔도 모두 말씀드리는 것이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수도회 피정을 지도해준 예수회 신부님이 미사 강론에서 지난 날 해외사목 때 경험한 아름다운 사례를 말씀해주었던 것을 나누고 싶다. 장애를 지닌 자식 때문에 마음고생을 해온 한 아버지는 부인과 자식이 매주 성당에 갈 때 자동차로 데려다주고 자신은 성당 밖 자동차 안에서 기다리다 다시 그들을 태워 집에 가곤 했는데, 그것이 어느덧 30년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 마침내 세례를 받게 되었고, 예수회 신부님은 그에게 어떻게 하여 세례를 받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는 자식 때문에 자신이 속을 썩었다고 생각했지만 지나놓고 보니 도리어 자식이 자신을 참 인간으로 성숙시켰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분의 경우에는 30년이라는 엄청난 긴 세월이지만, 하느님은 어떤 곳이든 가리지 않고 또 모두를 굽어보신다는 관점에서, 어찌 보면 성당 근처에만 있어도 그것이 기도가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기도는 우리 모두를 얼마나 숙연하게 하는지!

넷째, 관상의 단계. 묵상기도를 하다보면 묵상에서 정감기도로 넘어 가게 되고 정감기도에서 또 다시 관상기도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관상기도는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사랑 안에 머무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 편에서 자력으로 사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무력한 채 순전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자신 안에 하느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정이 일어난 경우라면 단순하게 한 가지 정감 안에 오래 동안 머무르게 된다. 우리가 묵상기도를 할 때 누구나 다 묵상기도, 정감기도, 관상기도를 한꺼번에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 수준에 따라 단계를 거치지 않고 관상기도로 바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묵상기도에 들어갈 때 기도를 준비한 것처럼 기도의 끝맺음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기도에 들어가며 하느님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청원한 것처럼, 기도 안에서 함께 해주셨음에도 감사를 드리고 끝맺는 것이다. 기도의 끝맺음이 있은 뒤 기도에서 나오면 기도하는 동안 있었던 일을 잘 살피며 이를 공책에 적는 것도 기도의 연장일 수 있다. 이를 우리는 ‘영적 쓰기’라 하는데, 지면 관계상 다음 호에서 영적 쓰기에 관해 다루기로 한다.

* 이명기 수녀는 1986년 성심수녀회 입회, 첫서원 후 성심여고에서 교육사도직 수행, 종신서원 후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취득, 2006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기초교양필수과목인 ‘인간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외침, 2015년 3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이명기 수녀(성심회, 가톨릭대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교수)]

 

 

[기도 배움터] 기도의 징검다리 (3)



기도 안에서 우리는 성경구절이나 성경일화를 읽을 때 어떤 대목이 마음을 건드려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기도 하고 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답변을 해주실지 고대하며 기다릴 때가 있다. 종종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가 일어나는데, 이를 무심코 지나치면 기도 때 일어난 숭고한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놓치게 된다. 반면, 기도대화에 관하여 지나치게 환상적인 것을 기대한다면 겉보기에 평범한 대화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놀라운 초대를 흘려보내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기도 안에서 있었던 일을 소홀히 하지 않고 마치 고운 모래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주워 모으듯 기억하여 이를 공책에 써본다면, 기도 중에 자신이 말하고 듣고 느낀 것을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확보하게 된다. 이렇듯 우리가 별다를 것 없는 일 정도로 간주하거나 그냥 잊어버리고 말았을 기도의 체험을 기록하는 것을 ‘영적 쓰기’(spiritual writing)라고 한다.

필자가 ‘일기’라는 말보다 ‘쓰기’라는 말을 선호하는 까닭은 일반적으로 일기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사건을 기록하는 정도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 쓰기’ 역시 기도 안에서 또는 일상생활 안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점에서 ‘일기’와 동일하지만, 자신이 기도와 일상 안에서 일어난 그 일의 영향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내면을 살펴보기 때문에, ‘영적 쓰기’는 일기와 판도가 다르다. ‘영적 쓰기’는 공식기도를 마친 후에라도 여전히 하느님 현존에 머무는 자로서 삶의 태도를 지니고 기도를 기억하는 일종의 ‘쓰는 묵상’(meditative writing)인 것이다(제임스 마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 350-351쪽 참조). ‘영적 쓰기’는 기도를 기억하며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의 행동을 통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앞으로도 하느님과 기도대화를 수련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영적 쓰기’는 기도와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찾아볼 목적으로 영성수련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영적 쓰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잠깐 동안 집중을 한다. 가령 심호흡, 긴장 풀기, 간략한 기도 등을 한다. ‘영적 쓰기’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해도 좋다. 편안한 마음으로 앞서 기도한 성경내용을 읽어본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본다.

- 오늘의 묵상기도 흐름 속에서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셨는가?
- 유독 어떤 성경말씀이 자신에게 다가와 자극하거나 혼란하게 만드는가?
- 또는 평화와 위로를 주는가?
- 그 말씀을 읽으면서 자신에 관해 어떤 면을 발견하는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영적 쓰기’가 수월하다. 단, ‘영적 쓰기’는 자신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을 자유롭게 하는 수련이기에 내용의 양이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음을 기억하자. 또한 기도 때의 정확한 대화를 인용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기도 때의 전반적 분위기와 감정을 기억하는 것이다. 적어도 하느님을 어렴풋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그 날 발생한 특별한 사건에 대해 ‘영적 쓰기’를 할 때가 있으며, 꼭 성경만 아니라 신앙서적들이나 간밤에 꾼 인상적인 꿈에 초점을 두고 ‘영적 쓰기’를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일상에서 일어난 일을 순서대로 열거할 필요는 없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본 뒤 ‘영적 쓰기’를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는 것도 좋다. 아래의 여러 질문 가운데 한 가지를 골라서 묵상해보길 권한다.

- 나의 삶과, 세상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바라보거나 느낀 곳은 어디인가?
- 그때 나는 하느님을 의식했는가?
-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태도나 행동이 하느님께 응답하기를 방해했는가?
- 나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내 삶의 여러 부분에서 나타내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가?
- 나는 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과 긍휼을 삶에서 표현하는 데 실패했는가?
- 나 자신에 대해 나는 어떻게 느끼는가?
-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
- 오늘 일어난 사건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인 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사건이 있는가?

또 하나의 방법은 예수님께서 자신 앞에 계시다고 상상하며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고 그에 관해 답변하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답변하고, 이런 식으로 번갈아 대화하는 것을 기록한다. 그런 다음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진정한 열망을 기도문으로 써본다. 잠시 침묵을 한다. 그리고 다시, 지금 하느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부르시고 있다고 느끼는가에 대해 응답해본다. 잠시 침묵을 한다. 하느님이나 예수님께 묻고 싶은 질문들을 기록하고 침묵 가운데 깊이 침잠해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떠오른 이미지나 직관적인 생각 등을 기록한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감사하며 주님의 기도로 마무리 한다.

‘영적 쓰기’의 놀라움은 쓰기를 통하여 날마다 조금씩 의식성찰이 일어나 일상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날마다 기록하는 수련이 중요하다. ‘영적 쓰기’를 하는 동안 내면에서 강력한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렇듯 ‘영적 쓰기’는 하느님과의 대화를 기록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한다. 또 자신과의 대화는 어떠한가? ‘영적 쓰기’를 마치면서 잠시, 자신이 처한 인간관계나 자신의 바람을 나타내는 적절한 기도를 해보라. 당신이 느끼는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당신의 말을 들으시고 이해하실 것이라고 확신하라.

 

* 이명기 수녀는 1986년 성심수녀회 입회, 첫서원 후 성심여고에서 교육사도직 수행, 종신서원 후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취득, 2006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기초교양필수과목인 ‘인간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외침, 2015년 4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이명기 수녀(성심회, 가톨릭대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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