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레지오 용사는 시기심과 친하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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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 영성] 레지오 용사는 시기심과 친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내려다보면 다 흠투성이/ 누군가를 올려다보면 다 배울 거리
김광화 씨의 ‘눈높이’라는 시입니다. 짧은 글에 엄청난 진실이 담겨 있네요. 글을 준비하면서 “기생충 같은 무리는 뱃속에 시기심으로 가득 차서 등 뒤에서 헐뜯는다.”라는 문장을 삽입하려던 못난 마음이 문득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느 쪽인지, 시기심으로 가득 차 지내지는 않는지 여쭙고 싶은 마음은 가시지를 않는데요. 혹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에 맞갖은 대우를 하며 지낸다거나, 진리를 지붕 위에서 선포해야하는 사명의 사람이기에 시기심 따위와는 상관없이 살아간다고 답해주신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등 뒤에서 헐뜯고 모함하는 일이 없어야할 테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교부들께서 악습 중에 가장 질기고 고질적인 것이 시기심이라고 누누이 알려주는 걸 보면, 그리스도인에게도 시기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삶의 굴레인 게 분명합니다. 쉼 없이 끊어내고 치워내는 수고가 필요한 감정이라는 얘기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안에 있는 심술 혹은 시기심은 매우 묘한 감정입니다. 상대를 꼭 어떻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무엇인가를 꼭 어떻게 하겠다며 각오를 하는 것도 아닌데, 사로잡히면 그 악착같은 아귀를 벗어나기 힘듭니다. 마음이 험해지고 맙니다. 믿음인은 나약한 인간의 감성을 지닌 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느님의 것으로 채우고 살아가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시기하지 마십시오! 시기하는 순간 창조와 생산이 중단됩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기야말로 자신의 삶을 마이너스로 이끄는 지름길일 뿐임을 잘 일깨워주지요. 그럼에도 내게 있는 것에 감사드리는 것만으로 시기심을 치울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웃이 가진 것까지도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다면 시기심은 자리할 틈이 없습니다.
시기심은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어
우리는 무엇보다 시기심이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는데요. 사랑받지 못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 같아서 겁을 먹는 일, 뒤처지면 비참하게 전락할 것이라는 생각 또한 시기심의 발로인 까닭입니다. 이렇듯 시기심이 스스로 자신을 비하한 결과라는 점에 비추어 생각하면 얼마나 못되고 못난 악습인지 여실히 느끼게 되는데요. 물론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교만한 마음 또한 시기심의 뾰족한 재료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두려워할 때 불행해지는 만큼, 강한 하느님의 힘을 계산하지 않는 어리석음이야말로 시기심의 본질인 것입니다. 또 시기심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상대의 좋은 것이 곧 자신의 비운처럼 느끼는 일인데요. “누구는 좋은 일만 생기는데, 나는 뭐냐?” 싶거나 남이 잘되는 걸 보면 심술이 차오른다면 시기심이 휘두르는 끄나풀에 걸려든 겁니다. 얼른, 마음에 돋은 시기의 뾰루지를 잘라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고 계속 샘을 내고 시기하노라면 결국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난관에 봉착할 뿐임을 명심해야합니다.
비참해진 마음은 모든 걸 언짢게 느낍니다. 보이는 것들이 다 비위에 맞지 않아 합니다. 보이고 들리는 것, 모두를 나를 비웃는 것처럼 여길 뿐 아니라 내 행복을 누군가에게 도둑질당한 것으로 여깁니다. 누군가가 행복한 만큼 내 행복이 줄어든 것처럼 착각하는 겁니다. 바야흐로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꼴은 도무지 눈뜨고 보지 못하겠다는 옹졸한 마음에 사로잡혀서 스스로의 자긍심을 잃는 추한 결과를 낳습니다. 시기심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사람이 넘어야 할 큰 고비이며 난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느껴지십니까?
시선을 외부로 돌리지 말고, 내부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나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살피고 내 사람됨을 살피고 내가 제일 잘하는 것에 집중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간을 꾸준히 갖다보면 분명히 자신만의 매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침내 작은 것에 감사하게 되고 자신이 받은 복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남의 복에 마음을 쓰기보다 내게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소중한 마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동물이 불행하다고 자신을 비하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세상의 어느 새가 우울하다고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보셨습니까? 세상의 동물들과 새가 불행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동물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지도 않고 또한 잘났다고 샘을 내지도 않으며 속으로 시기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를 남과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자신을 자랑할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시기의 대상일 수 없다는 걸 알려주는 게 아닐까요?
깊숙이 뿌리내린 시기심은 믿음의 빛으로만 말끔히 사라져
우리는 믿음이 좋고 사랑이 많고 덕스러운 분들의 얼굴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을 뵈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심으로 주님께서 주신 표정을 잘 가꾸는 일이 세상을 일깨우는 믿음의 징표가 된다는 걸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의 삶은 상대에게 좋은 일이 생기고 기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이유 없이, 조건 없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번영을 기뻐할 뿐 아니라 축복을 더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삶은 언제나 상대의 처지를 살피고 헤아리고 함께 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함께할 뿐 아니라 나를 버림으로써 이웃을 살리는 일까지 감행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진리의 삶입니다. 이처럼 복음적인 삶을 철저히 살아가려는 각오를 가질 때에만 끈질기게 달라붙는 시기심을 떨쳐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안에 깊숙이 뿌리내린 시기심은 믿음의 빛으로만 말끔히 사라집니다. 이것은 성경이 자랑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동료와 이웃의 시기심을 잘 극복했다는 사실이 증명하는데요. 믿음으로 우리는 마음에 자리한 시기심을 근절시킬 수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비방까지도 잘 견디고 수용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변화무쌍한 세상 안에 주님의 뜻은 더딘 듯하지만 꼭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레지오 단원입니다. 도무지 밴댕이 속알 딱지처럼 좁아터지고 말라비틀어진 우리 마음이 마침내 성숙하게 변화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의탁하는 사람이 레지오 단원입니다.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주님의 큰 사랑을 발견하며 희망의 걸음을 내딛도록 합시다. 레지오 단원은 주님의 말씀에 기대어 먼저 자신의 변화를 청하고 또한 믿는 사람이니까요.
“주님! 당신의 용사인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편견과 선입견이 욕심이라는 걸, 비방이 시기심이며 착각이라는 걸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 하여 매사 배려와 사랑을 실천하는 당신의 든든한 용사로 우뚝 서게 해 주소서.”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6월호,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부산교구 사목국장, 부산 R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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