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식탐, 허술히 대하면 고질적인 악습으로 자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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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 영성] 식탐, 허술히 대하면 고질적인 악습으로 자라나
식탐에 대해서 말씀드리려니 정직히, 뜨끔합니다. 그래서 이번 호의 글은 저 자신을 일깨우려는 의지를 담아 적으려 합니다. 만만찮은 몸무게로 식탐이라는 주제를 논하는 것조차 면구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필리 3,19)라는 성경말씀에 찔린 마음이 뒷구절을 읽으며 힘이 난 것도 사실입니다. 비록 제 식욕 탓에 몸이 이토록 무거워졌지만 주님께서는 그날 우리 모두를 ‘날씬하게’ 변화시켜 천국에 입성시켜 주실 것이라는 사실에 힘이 났다고 할까요?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2,20-21)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식탐이란 먹고 마심에 무절제한 욕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도덕적 가치를 실천하는 이성적 지시를 저버리는 무절제한 모든 것이 악습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별명이 살찐 돼지였다니 재밌습니다. 그도 저처럼 몸집이 두둑했던 모양이고 또 지금 저처럼 스스로를 일깨우기 위해서 식탐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며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 짐작하니, 훨씬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성욕과 식욕은 인간의 두 가지 원초적 욕망으로 꼽힙니다. 결혼과 동시에 성욕은 오로지 배우자를 위해서 스스로를 절제하게 되지만 또 하나의 욕망, 식욕은 많은 이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오죽하면 “성욕이 거세당한 중년에게 남은 건 식탐밖에 없다”라는 말까지 있겠습니까? 이렇게 안타까운 인간의 처지를 심히 염려하셨던 것일까요? 그레고리오 1세께서는 식탐의 악습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며 우리를 각성시킵니다.
“어떤 때는 급히 먹고, 어떤 때는 값비싼 고기를 찾으며, 어떤 때는 까다롭게 요리된 음식을 찾고, 어떤 때는 지나치게 과식하여 원기회복의 정도를 넘어서고, 어떤 때는 극단적인 식욕 그 자체로 죄를 짓는다”면서 식탐의 다양한 모습을 지적하며 쉬이 이해하도록 해주는 겁니다. 한마디로 급하게 먹는 것, 사치스러운 음식을 좋아하는 것, 너무 많이 먹는 것, 음식을 까탈스럽게 대하는 것, 그리고 마구 욕심을 내어서 먹는 것들이 모두 죄라는 얘기입니다. 그 중에서 저는 급하게 먹고 너무 많이 먹는 ‘죄’에 딱 걸렸다 싶은데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음식을 탐하는 것에 머물던 탐식이 수많은 다른 악습 생산
식탐이란 이렇게 먹고 마시는 행위에 대한 잘못된 본성을 말합니다. 사실 인간은 먹어야 삽니다. 먹는 것은 생명을 영위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먹고 마시고 휴식을 취하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또한 색욕도 후대를 이을 수 있는 매우 귀한 행위이지요. 이처럼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완전히 끊을 수 없는 필수불가결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공자도 ‘예기’에서 “음식남녀(飮食男女)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다”라고 했겠지요. 사는 것이 결국 ‘음식남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우리는 비교적 식탐을 작은 악습으로 여기는 성향이 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식탐에 대한 위험을 수없이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배를 하느님으로”(필리 3,19) 삼는, 먹는 일을 삶의 최종 목표처럼 삼는 일, 육체적 영성적 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가져올 정도로 자제를 할 수 없는 상태라면 큰 악습으로 자리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탐의 악습은 우리 몸과 영혼에 심각한 폐해를 일으키는 힘이 센 악습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현대사회의 탐식은 꼭이 음식에 국한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음식을 탐하는 마음보다 더 크게 돈에 대한 애착과 새로운 물건에 대한 호기심, 즉 소비주의에 매달려 지내는 폐해야말로 우리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원흉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옛날에는 음식을 탐하는 것에 머물던 탐식이 수많은 다른 악습을 생산하여 우리와 매우 근접한 곳에서 영적 삶에 걸림돌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도 소식(小食)이 필요합니다”라고 읊은 문태준 시인의 글귀가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칠극’의 저자 판토하 신부가 “음식을 탐하는 것은 마치 구렁이처럼 무엇이나 모조리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데, 절제로써만 이를 막을 수 있다”라는 권고에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식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불타는 성욕을 결코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라는 요한 카시아노의 경고를 따끔히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행하는 단식의 중요성을 다시 숙고하여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몸에 쉼이 절실하듯 우리의 위장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 삶이 너무 포만하여 느글느글한 상태에서는 그 좋은 주님의 잔치음식의 진 맛을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해진미도 배가 부르면 맛을 모르고, 아무리 좋은 음식도 먹을 수가 없다면 그림의 떡일 것이란 얘기입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의 음식이 입에 달고 너끈히 소화되어 그분의 양식으로 더 튼튼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에 다이어트가 필수입니다. 가끔은 스스로를 혹독하게 다루며 세상 것들에 대한 단식이 필요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조절하지 않아서 마음도 생각도 빵빵해지면 탈이 나기 마련이니까요.
참된 단식은 자신의 교만을 치워내는 작업
외형적인 단식의 시간을 통해서 내면적 단식을 하는 것이 교회가 권하는 단식의 의미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단식은 자신의 교만을 치워내는 작업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긴 일, 상대가 틀린 것이라고 우긴 일을 반성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뜻과 다른 사람을 서운해 하던 감정을 씻어낸다면 옳고 바른 단식입니다. 미워했던 상대에게 사과하고 자신의 경솔한 행위를 고치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라면 금상첨화의 단식입니다. 물론 평소에 너르지 못한 자신의 성정을 돌아보고 기쁘지 않을 때에도, 언짢은 사람에게도 먼저 무조건 웃어 보이리라 다짐한다면 정말로 아름답고 고귀한 단식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단식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쫒으려는 다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하여 내 것을 굶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단식은 억지로 허기를 견디며 몸무게를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어느 ‘한 때’ 정해진 하루 한 끼를 거르는 행위도 아닙니다. 온 종일 내내, 일평생동안 꾸준히,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쉼 없이 실천해 살아가야하는 그리스도인의 행동강령입니다. 단식은 그리스도인에게 고행이 아니라 기쁨의 작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께 화답을 드리기 위해서 생각과 말과 행위를 변화시키는 모든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단식의 요점입니다.
성모님의 용사인 우리 레지오 단원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여 아무 생각 없이 ‘되는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는지 꼼꼼히 성찰하고 우리 행동이 이웃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선명히 분별하는 통찰력을 지녀야 합니다.
인간이 음식을 섭취하는 일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음식을 일용할 양식 수준 이상으로 탐하는 마음은 식욕을 악습으로 변질시킵니다. 도를 넘어선 식탐은 몸이 비만하게 할 뿐 아니라 삶을 절제하는 감정까지 마비시키기에 악습입니다. 나아가 죄의 원인이 됩니다. 먹고 마시는 욕구가 지나쳐서 분별력마저 마비되는 식탐을 잘 조절하여 악습을 ‘줄이고 피하는’ 지혜를 저와 함께 누리게 되시길 기도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10월호,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부산 R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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