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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최양업 신부 서한에 담긴 신앙과 영성: 세 번째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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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1 ㅣ No.675

[오늘날 교우들 보아라 - 최양업 신부 서한에 담긴 신앙과 영성] 세 번째 서한


“희망으로 더욱 굳세어져 방황하지 않겠습니다 …”

 

 

르그네즈와 신부에게 보낸 세번째 서한의 실제 모습.

 

 

세 번째 서한에 대하여

 

두 번째 서한을 작성했던 1844년 외몽고의 팔가자에 이어, 최양업의 세 번째 서한은 1846년 요동의 심양(옛 이름 봉천)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팔가자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김대건과 최양업은 그 해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는다. 둘 다 나이가 차지 않았기 때문에 사제서품까지는 받지 못했다.(법정 연령 만 24세)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김대건과 페레올 주교는 조선 입국에 성공했지만, 최양업과 매스트르 신부는 조선 국경 근처에서 만주 군인들에게 붙잡혀 문초를 당한다. 다시 팔가자로 돌아온 그는 다른 귀국로를 탐색하기 위해 우선 조선에서 가까운 요동으로 갔다.

 

이 세 번째 서한은 조선 국경을 향해 떠나기 하루 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받은 뜻밖의 편지에 대한 최양업의 진심어린 답장이다.

 

 

심양에서 1846년 12월 22일

 

세 번째 서한은 최양업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그동안 간절히 청했던 십자가 나무 한 조각과 성인의 유해인 ‘성해(聖骸)’를 받았음을 알려준다.

 

“드디어 12월 21일 신부님의 서한과 거룩한 유해를 받고 더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이 편지에서 최양업은 아직도 자신이 입국하지 못하고 있는 슬프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다. 입국하게 되면 더욱 자유로운 마음으로, 더욱 긴 편지를 써 보낼 것도 약속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저는 우리 포교지 밖에서 떠돌고 있으니 저도 매우 답답하고, 신부님의 마음도 괴로우실 것입니다.(중략) 우리가 무사히 조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을 신부님께 전한다면 이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실 신부님의 기쁨에 못지않게 저에게도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때는 기뻐 용약하는 마음으로 더 자유롭고 자세하게 신부님께 서한을 올리겠습니다.”

 

최양업은 편지에서 ‘입국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죄악과 허약함 때문’이라고 겸허히 말하며 자신을 낮춘다.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깨닫고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겠으며 희망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조선에 부는 박해의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사제’를 향해 꿋꿋이 나아가는 최양업의 더욱 굳어진 믿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저의 빈곤과 허약을 의식하고 있는 저는 매우 두렵고 겁이 납니다만, 하느님께 바라는 희망으로 굳세어져서 방황하지 않으렵니다.(중략)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저의 이 서원을 신부님의 기도로 굳혀 주시고 완성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6월 28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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