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신수련의 영성적 특질과 유학적 수양론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116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의 영성적 특질과 유학적 수양론

 

 

I. 들어가는 말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은 아주 고유한 영성 체험의 전개과정으로서, 그 안에 수록된 성찰, 묵상, 혹은 관상 등의 다양한 영신적 수련들을 통해 피정자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식별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인도한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산책이나 길걷기나, 뛰기 따위의 모든 것을 체육 또는 신체의 단련이라 하는 것과 같이, 영신면에 있어서도 모든 사욕편정을 깨끗이 없애고 구령을 위하여 자기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 있어서 날카로운 양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기 위하여 영혼을 준비하고, 이에 대비하는 모든 방법을 영신적 수련이라 한다.” 이에 따른 이냐시오의 영성교육법은, <영신수련>의 전개과정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반드시 드러내실 것이고, 피정의 다양한 영성적 체험들을 주도하시며 성령께서 활동하시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의 체험은 하느님을 향한 내적 회심을 유도하여 필연적으로 피정자의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儒學的 관점에서 수신(修身)은 우선적으로 인간 본성의 내면과 외적인 행동양식의 조화로운 정돈을 그 목표로 한다 : “무릇 학문의 길은 그 마음을 바로 잡고 본성을 기르는 것 뿐이다.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고 참[誠]되면 이것이 곧 거룩한 것[聖]이다. 군자의 학문은 반드시 먼저 그것을 마음에서 밝히고, 기르는 바를 안 다음에 힘써 행함으로써 도달함을 구하니, 이것을 일러 스스로 밝게 하여 참[誠]되다고 한다. 그러므로 배움은 그 마음을 다 쓰는 것이고, 그 마음을 다 쓰면 그 본성을 알고 그 본성을 알게 되면 돌이켜 그것을 참[誠]되게 하니 이가 바로 성인이다.” 이는 외적 행동양식의 개선이 마음의 내적 태도를 바로 잡는 공부로부터 시작됨을 의미하고, 또한 본래 인간의 심성에 뿌려진 순수하고 성실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임을 의미한다. 

 

<영신수련>도 역시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개선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마음과 태도를 새롭게 정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내적 동기와 감성적 차원의 마음가짐을 개선하도록 초대하면서 <영신수련>은 피정자로 하여금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움트는 하느님을 향한 근본적인 열망을 인식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열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당신의 뜻 - 보편적이며 동시에 개별적인 - 에 따라 새롭게 조명되고 다듬어져야 한다. 이렇게 개선된 지향, 혹은 성실한 마음의 태도는 하느님의 은혜로 피정자가 점차적으로 이 세상의 피조물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게 해주는 영적 혜안(慧眼)을 지니도록 이끌어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신수련>에 담긴 이냐시오의 영적 교육론을 유학의 수양론과 비교해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영성과 유학의 수덕적 교육론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II.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不偏心과 유학의 中庸觀

 

유교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성장한 동양 그리스도인들의 호기심을 끄는 이냐시오 영성의 한 중요한 측면은 바로 “불편심”(indiferencia)이라는 용어이다. 이 “불편심”은 여러 면에서 유학의 중용 사상과 비슷하다. 사실 많은 경우에 <영신수련>의 “불편심”은 “중용”으로 번역되었으며, 이냐시오의 인물 됨됨이 역시 "중용의 사람"으로 묘사되면서 균형잡힌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많은 이냐시오 영성의 전문가들 역시 이냐시오를 “중도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이냐시오적 특징이 유학적 언어로 표현되면서, 아주 고유한 의미를 새로이 얻게되는데, 이 새로운 의미는 결코 이냐시오적 원래 의미에 완전히 모순되거나 전혀 근거가 없는 엉뚱한 해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中庸>은 天命의 개념을 규명하면서, 중용의 길은 바로 하늘의 길[天道]을 파악하고 따르는 데 있음을 설파한다. 중용의 길은 단지 간단한 의미의 “가운데 길”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하늘의 뜻[天命]을 받는 인간 마음의 근본적인 태도와 질을 의미한다. <중용>은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요, 성실케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第20章] 한다. 유학적 誠의 개념은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통합하는 개념이면서, 심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종교성을 지닌다. 誠은 단지 마음의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人]과 하늘[天]을 하나로 묶어주는 변화의 힘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유학의 이 誠개념은 중용의 내적 본질을 이루며, 자연의 실천 원리의 역활을 한다. <중용>의 다음 귀절을 보자 : 

 

군자는 자신의 처지대로 행동하고, 분수 밖의 일은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부귀(富貴)한 위치에 있어서는 부귀한 사람에게 해당한 일을 행하고 빈천한 자리에 있어서는 빈천한 사람에게 해당한 일을 행한다. 이적(夷狄)의 몸이 되어서는 이적에게 해당한 일을 행하고, 걱정이나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걱정이나 어려운 일을 당한 사림에게 해당한 일을 행해야 한다. 이와 같이 군자는 어디를 가나 자신의 본분에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법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며, 낮은 자리에 있어서 웃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말 것이다. 자신을 바로잡고 남에게 바라지 않으면 아무런 탓할 것이 없다. 위로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아래로 사람을 허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평이(平易)함에 머물면서 명(命)을 기다리고 소인(小人)은 위험한 행동을 하면서 요행을 바란다. [第14章] 

 

여기에서 군자의 평이함[易]의 상태는 하늘의 명을 얻고 식별하기 위해 먼저 가져야하는 마음의 태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大學>에 제시된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8조목의 공부과정, 특히 正心의 공부를 통해 얻어지고 구현된다. <大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른바 몸을 닦는다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은, 마음에 노여워함을 두면 그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고, 마음에 두려워함을 두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고, 기뻐함을 두면 그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고, 마음에 걱정함을 두면 그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일러서, 몸 수양하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고 한 것이다. [傳 第7章] 

 

그러므로, 중용의 개념은 하늘의 명에 민감하도록 닦은 바른 마음, 즉 성실한 마음의 태도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大學>은 이러한 마음의 태도를 “넓은 마음”[廣心]으로 묘사한다. 어느 누구도 좁은 마음으로 道를 얻을 수는 없다. 宋나라의 張橫渠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름지기 마음을 활달(豁達)하게 하여 넓게 하고, 너그럽고, 즐겁고, 공평(公平)하게 하여 [도]를 구해야만 道를 볼 수 있다. 하물며 덕성(德性)이 넓고 큰 것임에랴? <주역>에 이르되 “신(神)을 궁구(窮究)하고 조화(造化)를 하는 것이 덕의 성함이다”라고 했다. 어찌 옅은 마음으로 덕을 얻을 수 있겠는가? [<近思錄> 第2章97條] 

 

이 “넓은 마음”의 특징을 이냐시오의 언어로 표현하면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grande animo y liberalidad)이다. 이냐시오의 불편심 역시 단지 중도의 방법을 취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하느님의 창조물의 궁극 목적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보다 더 적합하게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도움을 주는 방법들을 선택하도록 이끌어 주는 마음상태의 질을 의미한다. 이 불편심은 “원리와 기초”[23]의 핵심 주제이면서 “영혼이 자기의 창조주의 사랑으로 불타기 시작하고, 따라서 영혼이, 지상의 어느 물건도, 그 물건 자체를 위해서는 사랑할 수 없고, 오직 그 모든 것들의 창조주 안에서만 사랑하는 것”[316]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불편심이란 엄위하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를 의미하면서, 근본적으로는 참다운 내적 자유를 가리킨다. 불편심은 그 자체로서는 목적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선택하도록 이끌어 주는 내적 자유를 가리킨다. 내적 자유란 올바른 선택을 위한 필수 요건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편심이 먼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결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 이 내적 자유의 질적 요소가 바로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인 것이다. 이러한 자유로운 내적 마음의 상태는 유학의 관점에서 “넓은 마음,” 즉 성실한 마음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특히 <영신수련>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개방된 마음 안에서 더욱 성숙된다. 그러므로 관대한 마음이란 하느님을 향한 온전한 개방성을 의미하며, 우리의 존재 안에 새로운 희망을 창조하시는 우리보다 훨씬 크신 창조주 하느님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존재 깊숙이 심어진 자유를 향한 진정한 열망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한편 이냐시오는 불편심을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균형잡힌 모습으로 설명한다. 이것을 유학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면 자유로움으로 이루어지는 내적 조화가 하느님의 뜻을 찾고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반드시 요구된다. <영신수련>에 의하면, 자유란 “자기의 모든 욕망과 자유를 하느님께 바쳐서, 지존하신 하느님께서 자기와 자기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당신의 거룩하신 뜻대로 안배하시도록 맡기는 것”[5]이다. 그러므로, 이냐시오적 “불편심”과 모든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을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내적 자유의 마음으로 설명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이에 따르는 책임있는 행위는 바로 이 지상에서 세상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도록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불편심”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이냐시오적 불편심은, 바로 최상의 사랑으로 기려야하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심을 알게하는 놀라움에 가득찬 경건심에서 생긴다. 이냐시오는 이러한 마음의 내적 태도, 즉 놀라움에 가득찬 경건한 마음의 태도(acatamiento y reverencia)에 의해 중용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 경이로운 마음은 바로 가장 작은 것 안에서도 가장 위대한 모습을 감지하도록 이끌어 준다. 지극히 친밀하시면서도 엄위하신 하느님, 가까우시면서도 멀리 계신 하느님이시기에 이분께 대한 경건한 자세는 스스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체험케 한다. 그러므로 불편심은 “보다 더 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준비이다. 여기에서 “보다 더”(magis)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힘이다. 이는 결코 무엇이나 더 많이 원하는 욕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보다 더 특별하고 완전하게 일치되기를 원하는 마음인 것이다. <영신수련>의 전 과정 안에서 형성되는 창조주 하느님을 향한 경애의 자세는 誠敬의 마음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내적 자유는 하늘의 길[天之道]에 뿌리를 둔 성실한 마음[誠]을 의미하고, 조성된 경애, 즉 “자기의 창조주에 대하여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5]은 바로 공경하는 마음[敬]을 의미한다. <周易>의 坤卦 文言의 “군자는 공경으로 안을 곧게하고, 옳은 것으로 밖을 바르게 한다”는 말을 풀어 宋나라의 程顥 선생은 誠敬은 내면과 외면을 합하는 길이라 했고, 또한 "誠者天之道, 敬者人事之本. 敬則誠"라 하면서 <中庸>의 성실함[誠]의 의미를 공손한 태도[敬]로 해석했다. 즉 유학의 수양론은 바로 誠敬의 원리에 기반을 두었다. 

 

어떤 의미에서, 敬이란 이기심이 없는 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程朱學에서는 敬을 <周易>의 <文言傳>의 “간사함을 막고 그 성실함을 보존하는 것”[閑邪存其誠]과 관련해서 해석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敬의 마음 상태를 <中庸>과 연관해서 설명한다. 중용의 도에 맞게 균형잡힌 마음의 상태는 바로 욕심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無慾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無慾의 상태는 단지 욕심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고, 오히려 자연의 원리, 즉 도에 걸맞게 준비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면서 하늘의 명을 받을 준비된 마음의 자세를 의미한다. 사실, 이냐시오의 불편심은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되는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 즉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에 개방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불편심은 우리의 마음 깊숙이 자리한 이기적인 욕심을 제거하는 노력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편심이란 창조된 외적 사물들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과 이기적 욕심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진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만물에 대해서, 만일 그것이 우리 자유에 맡겨졌고 금지되지 않았으면, 중용을 지녀야 할 것이니”[23]한 <영신수련>의 초대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서의 불편심, 즉 유학의 언어로 표현하면 “마음을 바르게 함”[正其心]을 지니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불편심은 관대한 마음을 지닌 영혼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창조되었음을 인식하고,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는 것 역시 하느님의 은혜이다. 불편심은 단지 <영신수련>을 시작하기 위해 먼저 가져야하는 마음의 태도는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영신수련>의 전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영적인 열매로서, 점차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태도인 것이다.

 

 

III. <영신수련>의 영성 교육론

 

<영신수련>의 목적은 사람이 아무런 사욕 편정에도 좌우됨이 없이 자기를 이기고 자기의 생활을 정리해서 날카로운 양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기 위해 영혼을 준비하는 것이다. 유학적 수양의 목적은 하늘의 명을 바르게 알고, 원하고, 또 이에 따라 행동하기 위함이다. 이 배움의 길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修身이다. <영신수련>에서 배움의 과정은 “훈련” 또는 “수련”(ejercicios)으로 묘사되고, <大學>에서는 “나날이 새롭게 함”[日新]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매일 매일 자신을 새롭게 혁신하는 과정은 인간의 본성에 부여된 본래의 성실함으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완전한 성실함[至誠]을 얻기 위해 <中庸>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요, 성실케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니, 성실한 사람은 힘쓰지 않아도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터득하며, 자연히 정도에 맞는 것이니, 이것은 성인이다. 성실케 하는 것은 선(善)한 것을 선택하여 굳게 지키는 것이다. 널리 배우며, 자세하고 물으며, 신중하게 생각하며, 명확하게 판단하며, 확실하게 행할 것이다. [第20章] 

 

물론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선(善)이란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드러난 하느님의 절대적 구원의 사랑을 의미한다. 성실해지는 길이란 바로 중용의 길이며 최고 선을 향하는 길이다. 유학적 수양과정의 중심은 바로 지성(至誠)의 상태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誠의 개념 안에는 자아완성의 길이 제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大學>의 8조목에 묘사된 자아완성의 길은 사물의 근본 원리에 대한 객관적 관찰[格物?致知]로부터 내면의 마음의 태도를 성실하게 준비하는 주관적 결심[誠意?正心]으로 향하는 과정, 그리고 다시 이 원리인 진리를 객관적 지평인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실현하는 과정[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기도 하다. <中庸>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자아완성의 길은 하늘의 뜻[天命]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 하늘의 뜻[天命]은 하늘의 길[天道]과 인간의 길[人道]을 포함하는 양면적 표현양식을 지닌다. 이러한 측면에서 유학의 전통에서는 인간 완성의 길을 “誠”의 개념을 빌어서 수양론을 전개하고, 하늘의 길과 인간의 길의 통일성을 誠의 역동적 의미로 서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신수련>의 역동적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영신수련>의 그리스도 중심의 구조는 어떤 하나의 영적 체험이 또 다른 영적 체험을 유발하는 원천이 되게한다. 이렇게 <영신수련>의 고유한 변증법은 <영신수련>이 전개되는 동안에 다양한 모습의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도록 이끌면서 그분과의 친밀감을 더해 나간다. <영신수련>을 통한 직관적이고 전인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체험은 이미 <영신수련>의 고유한 영성적 교육론에 담겨있다. 이 영성적 교육론은 이냐시오 영성의 삼위일체적 특성과 강생적 특성을 반영한다. <영신수련>의 모든 기도는 바로 성령을 통해서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 하느님께 바쳐진다. 모든 창조물의 궁극 목적은 강생의 신비 속에 담겨있고, 바로 이 강생의 신비를 통해 하느님의 조건없는 자기 헌신적 사랑이 구체적인 창조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학의 수양론에서 보이는 진리의 객관성과 주관성의 비슷한 관계가 <영신수련>의 영성 교육론에서도 나타나 있다. <영신수련>의 영성 교육론에 따라 전개되는 그리스도의 율동적 현존양식, 즉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객관적 상황을 피정자의 주관적 체험의 지평에서 파악하게 되고, 다시 이 주관적 체험이 피정자의 구체적 응답으로 객관적 지평에 드러나는 전개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영신수련>의 교육론은 언제나 객관적이고 폭넓은 구원의 진리를 제시하면서 피정자로 하여금 우선 묵상할 자료의 요점을 파악하게 하면서 구원의 객관적 지평 안에서 영적 체험을 가지도록 이끌어 간다. 이냐시오는 이러한 방법이 바로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역동적인 전개과정의 핵심적 관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내적 지식이다. 이냐시오의 영성 교육론의 가장 특이한 요소는 모든 움직임이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전개되며, 또 그리스도에서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신수련>의 전 과정의 초점이다. 한편 <영신수련>은 구원의 신비가 점차적으로 내면화되는 과정이기도하다. 이 내면화의 과정을 통해서 <영신수련>은 피정자로 하여금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자신의 삶을 내어주도록 촉구한다.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경로는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모든 창조물 안에 임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영신수련>에는 이 과정이 네 주간이라는 고유한 전개방식으로 펼쳐진다. 이 과정을 통해서 피정자는 균형잡힌 정체성을 얻게되고, 또 하느님께 개방된 마음의 자세를 지니게 된다. 즉,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신수련>은 초월성과 내재성의 긴장 속에서 역동적 균형을 유지한다. 

 

교육적 기교의 한 방법으로 이냐시오는 피정자가 지성, 감성, 의지 혹은 기억력, 상상력, 성찰력 등의 여러 내?외적 기능들을 과감하게 묵상기도와 관상기도에 적용하도록 요구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피정자가 자신의 상상력을 영원함으로부터 시간의 제약 속으로, 총체적 관점에서 특수 요점으로, 일반적 시각에서 특정한 시공의 사건으로 옮겨가며 적용하도록 초대한다. 물론 우리가 어떤 특정 구조의 기도 방법이 반드시 어떤 특수한 영적 체험을 유발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어느 특정한 형태의 영적 체험이 형성되는 데 필요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또 어떤 종류의 내적 힘이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표출되도록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의지를 강생의 신비를 통해 드러내신다면, 이 시각에서 파악되는 창조주 하느님의 역사하심은 언제나 구체적 실존을 통해서 드러나며, 동시에 그 실존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인도되는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역동적 구조 안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의 균형을 이루게 된다. 

 

유학적 수양론의 해석학적 관점은 아마 “思誠”의 경지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書經>의 <洪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용모는 공손해야 하고, 말은 조리가 맞아야 하고, 보는 것은 밝아야 하고, 듣는 것은 분명해야 하고,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와야 하는 것입니다. 공손함은 엄숙하도록 만들고, 이치를 따름은 조리가 있도록 만들고, 밝음은 지혜를 만들고, 분명하게 듣는 것은 꾀를 만들고, 지혜는 성인을 만듭니다.” 여기에서 思의 높은 경지가 모든 것을 환하게 통달하는 聖의 경지[思曰睿, … 睿作聖]로 설명된다. 이러한 경지를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표현해 보면 특정한 구체적 사건들 안에서 보편적인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를 파악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바로 이 “지혜로운 생각”[思]일 것이다. 이는 마음 속에서 그리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피정자의 상상력은 <영신수련>의 전체 과정을 통해서 점차로 현실의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 뿌리를 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영적 혜안을 지니게 해 준다. 이러한 영적인 통찰력은 내일을 향한 희망의 원천이 되며, 특정하고 구체적인 역사의 사건이 어떻게 우주 전체를 포함하는 구원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를 인식하게 해준다. 이것이 <영신수련>에 펼쳐진 이냐시오의 영성 교육론이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밝혀졌다. 그리스도는 희망의 상징이시며, 우리의 삶 속에 새로움을 창조하시고, 내일을 위한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신다. <영신수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여정의 내적 전개과정, 즉 “그리스도의 율동”에 따라 피정자의 상상력이 형성되도록 교육시킨다. 다른 말로하면, <영신수련>에 의해 형성되는 상상력의 경지는 유학의 思誠의 경지와 비슷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우리의 상상력이 이렇게 형성된다면 이러한 양식의 상상의 세계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무감각함을 부수고 우리 존재의 내부로 들어오셔서 내일을 향한 희망을 일깨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중심의 상상력을 기도와 묵상에 활용한다면 모든 것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느님 현존의 신비가 우리의 내부를 개방시킬 것이다. 

 

<영신수련>의 근본 목적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삶의 태도를 개선하는 데 있으므로 우리의 상상력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화되는 작업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의 상상력이 개혁되지 않으면, 신앙의 삶 역시 개혁되지 않는다. 마음의 정화는 “원리와 기초”[23]에 펼쳐진 하느님 구원의 객관적 진리를 묵상하면서 시작되고, <영신수련>의 다양한 묵상들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더 깊어진다. 유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윤리적 인식은 배움으로부터 그 질이 변화되기 시작하고, 이 배움은 聖人 君子가 되겠다는 굳은 결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格物과 致知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朱子는 그의 <格物補傳>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른바 “아는 것을 투철하게 하는 것이 사물을 구명함에 있다”고 하는 것은, 나의 아는 것을 투철하게 하려면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개 영명(靈明)한 사람의 마음이 알지 못할 것이 없고, 천하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이치가 없는 것이 없다. 다만 그 이치를 깊이 구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 미진한 데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대학>에서 맨 먼저 가르치기를 꼭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의 사물에 대하여 그 이미 알고 있는 이치에 근거를 두고 더욱 구명해 나가서 그 극치에 도달하지 않게 함이 없게 했다. 이러한 노력이 오래도록 계속되면 하루 아침에 활짝 트이게 되어서 여러 사물의 겉과 속, 정밀함과 거침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게 되고 내 마음의 온전한 체(體)와 커다란 용(用)이 밝아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는 것”이며, 이것이 이른바 “아는 것이 극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大學> 傳 第5章] 

 

물론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배움의 길은 하느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유학적 관점에서 성현(聖賢)들의 가르침은 고전(古典)을 통해 후대에 전수된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는 하느님의 구원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드러났고, 또한 성서(聖書)를 통해 전수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유학의 관점에서나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모두 그것이 계시된 진리이거나 전수된 진리이거나 결국 인간의 규명[格]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이렇게 볼 때 유학의 格物의 경지는 그리스도교의 묵상 혹은 관상의 경지에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성서에 전수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드러난 하느님 현존의 구원적 신비를 세세히 묵상하고 관상하는 格物의 경지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신수련>이 진행되는 동안에 피정자가 지성으로 애써 궁리하며 묵상 자료들간의 관계를 세세히 성찰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지적 명확성은 서서히 증가할 것이다. 지적 명확성은 아주 자연스럽게 피정자로 하여금 <영신수련>이 끝난 후에도 감성적 차원의 삶에 신뢰할 만한 기초를 제공해 준다. <영신수련>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을 향한 심도 깊은 회심은 피정자가 하느님의 은혜로 자신의 의지가 이끌리는 방향으로 삶의 구체적 행동양식을 선택하도록 촉구한다.

 

 

IV. <영신수련>의 이냐시오식 기도의 교육적 구조

 

이냐시오식 기도 방법은 고유한 영성 교육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 목적은 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피정자의 영혼 속에 희망에 찬 믿음을 심어 주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 고찰(consideracion), 묵상(meditacion), 관상(contemplacion)들이라 불리는 다양한 훈련들을 제시하면서, 피정자의 상상의 세계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형성되며 내면의 깊은 신앙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도록 인도한다. 특별히 둘째 주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신비”에 초점을 맞추면서, 피정자는 자신의 모든 관심과 열정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로 집중시킨다. 이러한 기도방법을 <영신수련>에서는 “관상”이라고 부른다. 관상이란 단지 영화 관람을 하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무엇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예수의 생애 신비를 세세하게 관찰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세세한 관찰을 통해 피정자는 구원의 객관적 진리에 자신을 노출시킨다. 물론 이 구원의 객관적 진리에 대한 피정자의 응답은 주관적이다. 이냐시오식 관상의 내적 힘은 바로 주님이신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느님이심을 믿는 데 있다. 이 믿음에 의해 우리는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관상의 근본 정신은 세상을 해방시키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거역할 수 없는 하느님의 구원적 진리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냐시오식 기도는 결코 감정을 억압하는 기도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이 기도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하는 하느님의 사랑,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얻는 내적인 힘을 꾸준하게 축적해 나가는 방법이다. 쉽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더 깊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 안으로 통합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통합의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내적 지식의 경지가 “활짝 트이는 경지”[豁然貫通]로 발전해 가는 점진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밑도 끝도 없는 급작스러운 깨달음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계시된 道를 참으로 깊이 이해하려면 반드시 근면하고 성실한 자세로 꾸준히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하며, 오랜 기간이 경과한 연후에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 구원의 신비의 참다운 진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의 한 가지 측면은 관상하는 자료에 대한 지적 고찰로부터 “되풀이”와 “오관의 활용”에 이르는 내면화의 과정이다. 이냐시오식 관상은 지성, 감성, 의지 등의 다양한 영적 기능들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면서, 한편으로 순수하고도 진진한 수동성을 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신비를 고찰할 때 피정자는 자신의 마음을 그 신비에 집중해야 하므로 이러한 영적 기능들의 다양한 활동 없이는 관상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고찰하고 있는 그 신비 속으로 몰입되고, 또 그 신비에 의해서 내적 변화가 이루어지며, 이 몰입과 변화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영혼의 수동성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피정자가 심혈을 기울여 묵상작업을 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에 더욱 자신을 내어맡길 수 있게 되고, 바로 이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다운 내적 지식을 얻게 된다. 이러한 영성 교육적 구조 안에서 영감과 이성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며, 또한 감성과 지성의 일치를 이룬다. 요약하면 이냐시오식 관상 기도의 교육적 구조에 필수적인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성서의 객관적 진리가 제시되고, (2) 이러한 객관적 진리에 대한 고찰과 묵상은 결과적으로 구원의 신비에 대한 주관적 체험을 유발하고, 그리고 (3)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내적 이해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의지적 응답을 통해 육화의 방향으로 표현되도록 이끈다. 이렇게 볼 때 이 교육적 구조는 유학의 수양론의 中[집중]과 和[확산]의 원리, 즉 中庸의 道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영신수련>의 각 묵상 혹은 관상은 하나의 준비기도, 세개의 길잡이들, 요점들, 그리고 담화로 구성된다. 준비기도는 피정자의 신앙이 성숙되는 방향을 규정한다 : “준비기도는 나의 모든 의향과 행동과 노력이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께 봉사하는 것을 위해서만 마련되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는 것이다.” 기도의 구체적 초점이 정해지지 않으면, 기도는 단순히 상상적 활동에 그쳐 신앙의 내적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여기서 교육적인 관심은 피정자로 하여금 하느님의 활동의 우위성을 감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다. 사랑은 단지 낭만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자기 희생을 동반하며, 남을 위해 구체적으로 투신하는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준비기도는 <영신수련>의 근본 정신을 요약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길잡이는 “내가 관상하고자 하는 사건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102]이다. 즉 관상하고자 하는 신비의 요점과 그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함”은 이냐시오식 관상의 핵심적 요소이다. 이것은 바로 유학의 “思”의 경지와 같을 것이다. 복음의 객관적 진리의 이야기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를 고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상은 복음의 객관적인 계시 진리에 그 바탕을 두어야함을 의미한다. 관상이 객관적 계시 진리에 따라 충실하게 진행될 때 비로소 그 사적의 역사적 차원을 넘어설 수 있다. 이 점은 곧바로 <영신수련>의 그리스도론적 관점으로 연결된다. <영신수련>의 그리스도론의 원천적 요소는 이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이다. 물론 피정자의 상상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온전히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이냐시오식 관상의 영성 교육적 구조의 또 다른 핵심적 요소는 기억력, 이해력, 의욕력으로 삼분화된 영혼의 기능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영혼의 세 가지 능력”이라 불리는 이 기능들은 약간씩 그 양상은 다르지만 <영신수련>의 모든 수련들에서 활용된다. 기도의 감성적 요소로 인정되는 마음의 각성이 지성적인 인식보다 더 고차원적인 인식으로 파악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냐시오식 기도에서 “감지하다”(sentir)라는 동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상적 의미의 느낌이나 인상 등의 감정의 움직임을 의미하는 단어는 아니다. 어떤 지적 인식이 불러 일으키는 내면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영적 감각”이라고 표현되는 내적 움직임들로서, 단지 사변적인 지성의 활동에 의해서 얻어지는 인식의 차원을 넘어선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냐시오식 관상에서 영혼의 세가지 능력의 활용은 유학의 수양론의 格物, 致知, 誠意, 正心의 경지와 병행될 수 있다. 

 

이냐시오는 이성과 감성의 상호작용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성의 능력과 감성의 활동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냐시오의 영성 교육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誠과 明의 관계에서 본다면, 이성의 활동[格物]과 감성의 활동[誠意]사이에 일어나는 관계는 상호작용이다. 성실해지기 위해서는 사물의 객관적 원리를 심각하게 추구해야하며, 마찬가지로, 성실해지기 위한 마음의 동기가 없이는 결코 사물의 근본 원리를 파악하는 공부에 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의 응답은 주관적인 응답이지만, 계시 진리의 객관적 고찰에 의해서 형성되고 규정되는 것이기도하다. 이냐시오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느님의 은혜는 구원의 객관적 진리를 영적으로 이해하는 형식을 취하며, 이러한 영적 깨달음은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 투신하고자하는 관대한 응답을 이끌어 낸다. 신앙의 객관적 진리에 대한 고찰은 주관적 응답을 이끌어 내며, 객관성과 주관성을 지성 안에서 조화시킨다. 이 지적 조화가 봉사로 표현되는 참된 사랑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이 관계는 하느님 은혜의 강생적 성격을 드러낸다. 유학의 思誠의 경지에서 본다면, 우주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개별적 깨달음의 원천이지만, 이 폭넓은 객관적 진리는 이를 받아들이는 개인의 주관의 지평 안에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집중과 확산, 즉 중(中)과 화(和)의 (혹은 中과 庸) 움직임으로 표현 될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실존의 인식론적 내지는 존재론적 구조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묵상을 위해 제공된 자료의 측면에서는 객관적 평면에서 주관적 지평으로 전개되는 움직임(집중의 과정)을 보이고, 피정자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반응의 측면에서 보면, 제시된 자료에 대한 주관적 성찰로부터 응답이 펼쳐지는 객관적 영역으로의 움직임(확산의 과정)을 보인다. 이냐시오식 묵상에 필수적인 것은 바로 구원 역사의 객관적 진리의 발견과 이에 대한 주관적 체험인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의 측면에서 보면, 조명의 은혜는 피정자의 가슴 안에 내적 움직임들을 불러 일으킨다. 인간의 자유의 입장에서 보면, 이 내적 움직임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충동들에 대하여 개개인의 순수하고 관대한 수용의 자세로 받아들여져야한다. <中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포용성에 필수적 요소는 바로 조화이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행동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한다. 이러한 행동이 행동으로 나타나서 법칙에 모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이 중(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며, 화(和)라는 것은 천하의 통달한 원리이다. [第1章] 

 

여기서 이냐시오의 불편심을 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중(中)과 화(和)의 상태로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조명된 영적 깨달음은 피정자의 의지를 움직여 하느님을 향하게 하고 신적 사물을 깊이 깨닫고 맛보게한다. 하느님을 만나뵈면서 얻는 그분께 대한 참다운 체험적 지식은 모든 지적 인식을 능가하고, 바로 이 만남 안에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담겨진 그리스도교적인 구원의 체험이 이루어진다. 

 

둘째 길잡이는 “장소를 가상해서 봄”[103] 이니, 마음의 눈으로 그 장소를 그려보는 것이다. 피정자는 관상하는 신비에 벌어지는 사건을 세세하게 상상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맞고, 혀로 맛을 보고, 손으로 만져본다. 이렇게 상상으로 관상하는 신비의 세세한 부분까지 들어가는 것은 피정자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도록 이끌어 준다.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신비의 세세한 부분에 들어가는 작업은 성리학의 敬의 작업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바로 내적 삶을 관상하는 신비에 따라 재 구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세한 점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을 넘어서 신비의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영상을 넘어가는 과정은 바로 결심하는 행위 안에서 앎과 원함이 통합을 이루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을 넘어가면서 피정자는 진리의 참된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둘째 길잡이는 관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신비에 자신의 전 존재를 구성하는 의미의 “장소가상”인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어떤 장소를 가상해 보는 것이 아니라, 신비에 맞추어 자신의 내적 태도를 구성하는 것이다. 피정자는 관상하는 신비의 특수성에 가능한 한 깊이 자신을 조화시켜야한다. 바로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을 고찰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를 맞고, 만져보면서 자신을 그 신비의 상황에 맞게 구성한다. 이것은 바로 관상하고자 하는 신비를 마치 돋보기로 그 핵심적 요소들을 들여다 보는 것과 같기에 공간과 시간적 요소도 지니고 있다. 피정자가 관상하는 신비를 진지하게 그 세세함까지 관찰한다면, 바로 그 신비의 세세함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구성이 주님과 만나게 되는 터가 된다. <영신수련>이 진행되면서 피정자의 내적 세계, 즉 예수의 생애 신비에 따른 자신의 내적 구성은 점차적으로 성장해서 피정자로 하여금, 현재의 삶의 구체적 현장을 세세하게 관찰하도록 이끌며, 바로 그 구체적이고 세세한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뵙게 하며, 그 안에 숨겨진 희망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냐시오식 기도의 영성 교육적 측면의 또 다른 요소는 세째 길잡이에서 보이는데, 이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을 간청함”[104] 이다. 이 구할 은혜는 전체 <영신수련>에서 모든 묵상과 관상을 주도하면서, 이들을 시작하고, 끝맺어주며, 그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 <영신수련>은 그때마다 마땅히 구해야할 은혜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준다. 구해야할 은혜가 좀 더 구체적일수록 그많큼 그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더 크다. 모든 인간은 그 마음 깊숙이 바람이 있다. 어떤 면에서 한 인간의 내적 생활은 바로 무엇을 희망하느냐에 따라 형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준비기도에서 제시된 구할 은혜는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은혜이지만, 이 세째 길잡이에 제시된 구할 은혜는 관상하는 구체적 주제에 따라 제시되는 특정한 은혜이다. <영신수련>의 교육론의 한 측면은 바로 피정자에게 무엇을 구해야하고 무엇을 희망해야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인식 과정과 내적 열망은 단지 심리적으로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영적 갈망은 영혼 안에 객관적 진리를 찾고자 하는 기도의 태도를 형성해 주고, 하느님의 은혜는 영혼 안으로 들어와 당신 구원 계획의 객관적 진리의 빛에 따라 인간의 내적 욕구를 정화시킨다. 영적 갈망은 내적 욕구의 절대적 대상, 즉 하느님을 향하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객관적 진리의 주관적 성찰은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유학의 관점에서 객관적 진리의 탐구는 의욕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원의보다 우선적이다. 그리고 성실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욕구가 없다면, 객관적 진리의 탐구는 결코 진행될 수 없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근원적인 욕구, 혹은 영적 열망은 하느님 은혜의 빛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결코 인간 스스로 지닐 수는 없다. 참다운 영적 갈망 그 자체가 하느님의 은혜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은혜를 바람이 참다운 영적 갈망이다. 유학의 입장에서도 인간의 지성 활동은 마음의 내부의 바람에 지배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지성의 정화는 감각과 의지의 정화를 연결해 주는 길이기도 하다. 순수한 지향은 조명된 마음 속에서 온전하고 순수한 정감이 날카롭게 비추는 빛에 의해서 정화된 동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에서 “마음의 눈이 맑고 밝아야한다”[169]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의 성실성, 즉 誠意의 경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大學>에서 이르기를 “마음이 넓어지면 몸도 편안하다. 따라서 군자는 반드시 그 뜻을 성실하게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하늘의 뜻[天命]를 받기 위한 우선적 조건으로서 誠意를 제시하고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영신수련>의 과정을 통해서 피정자의 상상력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형성된다. 묵상을 되풀이하는 것, 혹은 같은 양상으로 계속되는 묵상 방법등은 이 형성 과정에 큰 역할을 한다. <영신수련>의 전형적인 하루는 한시간 길이의 묵상이 다섯 번 행해지고, 이 중 세째와 네째 기도는 첫째와 둘째의 되풀이이고, 마지막 기도는 앞의 묵상에 오관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기도가 단순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이성적 활동으로부터 마음에서의 반응을 일으키기를 그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다. <大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머무를 곳을 안 뒤에야 정(定)함이 있고, 정한 뒤에야 조용하고, 조용한 뒤에야 편안할 수 있고, 편안한 뒤에야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 [經] 

 

<大學>의 이 말씀을 <영신수련>의 단순화 과정, 즉 구원의 신비의 객관적 고찰로부터 영혼의 주관적 응답의 단순화 과정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이냐시오는 “되풀이한다고 한 것은 앞서 묵상한 것을 통일된 정신으로 종합해서 생각하고 날카롭게 궁리하는 것”[64]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머무를 곳을 아는 것은 피정자가 기도중에 더 큰 위안 혹은 불안을 겪었거나, 영적인 깨달음이 더 컸던 점들에 대해 되풀이와 오관을 적용하는 것과 같다. 孔子께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하신 것처럼 배운 것을 되풀이해서 익히는 기쁨을 의미한다. 되풀이는 영적 인식을 마음 속에서 음미하도록 하며 영적 기쁨을 유발시킨다. 

 

오관의 적용을 통해서 묵상하는 신비에 다양한 감각들을 집중시키는 것은 피정자의 직관과 감성을 효과적으로 통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오관의 적용”이라는 기도 방법은 묵상의 역사에서 긴요한 역할을 해온 이냐시오식의 기도 방법으로서 강생적 구조를 지닌다. 모든 기도와 묵상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더 나아가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요한 1:1) 강생하신 하느님 그리스도를 향해 온전하게 헌신하도록 이끈다. <영신수련>에서 오관 적용의 묵상 방법은 세 가지 다른 측면에서 사용된다. 우선은 감각을 사용함에서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를 본받는다는 의미이고[247-248], 둘째는 내적 감각의 능력을 지옥의 신비에 적용해 봄을 의미하고[65-70], 마지막으로, 세째는 피정자가 내적 감각을 적용하면서 영혼이나, 신적 사물 등을 보고, 듣고, 만져보고, 냄새맞고, 맛보는 것을 의미한다[121-4]. 관상하는 신비의 핵심적 주제에 감성적 직관을 적용하는 것은 이 내적 핵심이 피정자의 내면 세계의 한부분으로 융화되도록 한다. 이 움직임은 외부로부터 내부로 향하는 움직임이며, 신비가 피정자의 내적세계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오관의 적용은 피정자의 영적감각을 정화시키고, 변화시키고, 활성화시키고, 강화시키면서 피정자가 전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친밀하게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러므로 오관의 적용은 <영신수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신비를 관상하는 마지막 세 주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과정은 세 단계를 거쳐서 더 깊이 내면화된다 : (1) 피정자의 외적 감각을 단순히 신비에 적용하면서 그 신비 안으로 몰입되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2) 관상하는 신비를 이해하고 맛보게 되어, (3) 피정자가 마치 육신의 감각으로 감지하는 것처럼 영적 감각을 통해 하느님의 친밀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오관 적용의 영성 교육적 특성은 피정자가 자신의 감각을 관상하는 신비에 적용해 보면서 자신의 내면 깊숙이 신비의 핵심적 요소가 피정자의 내면세계에 응고되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오관 적용의 기도방법은 이냐시오식 기도의 강생적 역동성의 특성을 드러내준다.

 

 

V. 나오는 말

 

<영신수련>의 근본적인 관상의 내적 움직임은 모두 강생의 신비의 현실성을 온전히 드러내준다. 영원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강생의 말씀을 통해서 만질수 있는 실재가 된 것이다. 즉 영성생활의 근본원리는 영적인 것은 늘 육화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하심 역시 강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에페소 4:12) 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현실은 육적인 현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역으로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은 구체적인 육화를 통해서 그 순수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도 양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구체적인 모습 안에서 초월적 실재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성립이 안된다. 그러므로 기도의 궁극적인 열매는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분을 향한 관대한 응답에서 드러난다. 개별적 종교 체험은 어느 면에서는 중요한 우위성을 차지하지만, 이 개별적 체험은 “교회”라는 객관적 지평에서 구체적으로 삶을 통해 드러나야한다. 생동하는 신앙이란 이러한 내면화된 관점이 구체적 삶에서 행동을 통해 표현되는 신앙을 의미한다. 강생의 역동성 때문에 <영신수련>의 그리스도 중심성은 눈에 보이는 교회의 지평에서의 봉사를 통해 그 구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이냐시오의 “교회와 함께 생각하는 방법”[352-370]은 바로 <영신수련>의 강생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상의 결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교회는 그 자체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담고 있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의 통합적이고 변화적인 원리는 바로 그리스도도 중심으로 움직여가는 역동성이다. 역동적인 <영신수련>의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은 점차적으로 피정자가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응답하도록 촉구한다. <영신수련>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인간과 우주를 이해하고 있다.

 

[신학전망 102호(1993년 가을), 심종혁(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1,09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