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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성서적 회심 체험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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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118

성서적 회심 체험의 이해

 

 

성서적 하느님 체험은 회심 체험이며 동시에 소명 체험

 

참되고 영원한 것을 바라는 마음 속 깊은 열망, 이 열망이 우리를 부추겨 움직일 때 우리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 변화를 ‘회심’이라 부르고, 이 회심이 인생의 ‘궁극적 관심’과 연관될 때 이것을 종교적 회심이라 부른다. 성서에서는 이 회심이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는 이미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화해, 즉 하느님과의 재결합을 향하는 방향전환의 의미로 제시된다.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은 그 당사자의 삶에 변화를 일으켜 자신이 이제껏 살아온 삶의 방식을 수정하고 새로운 양식의 삶을 향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이 체험의 주도권은 늘 하느님께서 지니고 계시다고 성서는 말한다. 회심 체험이 이끄는 방향이 새로운 삶을 향한 단호한 투신이라면 분명 모든 하느님 체험은 회심 체험이며 동시에 소명 체험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성서와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만나는 하느님은 우리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시는 것일까?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은 분명 회심의 은총이고, 이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이다. 회심 체험이 가져오는 몇 가지 변화의 영역을 살펴보면서 그 안에 담긴 실천적 요소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구원의 객관적 진리를 향한 회심

 

하느님을 바라고 향하는 우리 마음의 깊은 열망에 관한 상징적 언어가 ‘기도’이고, 이러한 의미에서의 기도가 바로 성서적 회심의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기에, 기도와 성서에 관하여 한 가지 전제 조건을 이야기하겠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늘 성서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서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니는 모든 영적 체험의 원천이며 동시에 그 체험들의 진실성을 식별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체험은 성서에서 출발해야 하고, 성서를 떠나서는 그리스도인다운 기도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에 담긴 구원의 객관적 계시진리를 통해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경을 읽다가 깊이 깨달아 삶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하느님 체험일 수는 없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와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의 객관적 진리란 무엇인가? 성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알아듣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분명 성서를 읽긴 읽었지만 성서의 진리를 제멋대로 알아듣는 것이다. 성서의 객관적 계시진리를 자신의 구미에 맞게 멋대로 해석해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계시진리를 향해, 설사 그것이 쓰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그것을 향해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개방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비로소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 누구를 아는 것과 누구에 대하여 아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에 대하여 알고 싶으면, 책방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책을 한 권 사 달달 외우면 그분에 대하여 아주 많이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구를 알기 위해서는 그이를 만나야 하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바로 성서를 천천히 읽으며 기도하는 것이다. 성서와 더불어 기도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방법은 성서를 천천히 읽는 것이다. 성서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매일 신실한 마음으로 조금씩 읽어 가는 가운데 하느님을 알게 되고,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친하게 되고, 우리의 삶은 변화되고, 우리가 그분께 구하는 것을 그분께서는 베풀어주신다.

 

 

성서적 회심의 여정

 

성서와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만나는 하느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뵙도록 촉구하면서, 바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초대한다. 이러한 모습을 ‘해바라기’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설명할 수 있다. 해바라기는 늘 해를 바라보기에 해처럼 변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늘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우리가 마음속에서 진정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란다면 우리 또한 그분을 만나고 그분처럼 변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올바르고 선한 열망을 통해 그 열망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어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여정이기에 ‘순례의 길’이라고도 한다. 성서를 읽으며 기도하는 행위는 우리의 내면에서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순례의 행위이기도 하다. 이 순례의 여정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가장 핵심적인 체험이 바로 ‘회심의 체험’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은 결코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는다. 이 체험은 우리에게 도전적으로 다가와 삶을 늘 새롭게 변화시킨다. 마음 뿐 아니라 삶의 태도, 그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하느님을 향하도록 이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회심을 정의하여 ‘지평의 변화’라고 했다. 경험의 지평, 인식의 지평, 도덕적 지평, 종교적 지평을 변화시키면서 더 넓은 안목에서 주위 세상을 바라보도록 변화시킨다는 의미이다. 회심 체험이란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오게 되면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기존의 사고방식, 가치관, 세계관이 변화하는 체험이란 것이다. 기도를 통해 얻게되는 하느님 체험은 우리가 지닌 세계관을 바꾸어 사고와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 그래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만큼 더 마음이 넓어지고 너그러워져, 그 만큼 더 포용력이 커진다. 성서와 더불어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회심 체험은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회심은 우리 존재의 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라 감성적 영역, 지성적 영역, 도덕적 영역, 종교적 실천의 영역에서 폭넓게 일어나는 변화를 가져온다.

 

 

감성적 영역에서의 회심

 

경험하는 대상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느낌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길을 가다가 거지를 만나면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고, 또 어떤 이는 이를 피해 도망가기도 한다. 말하자면 두 사람이 똑같은 상황을 보고 접할지라도 경험하는 양상이 서로 달라 그 대상을 향한 느낌에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주변의 여러 상황을 경험하고 느끼는 양상이 서로 다르다. 우리가 성서에서 만나는 하느님은 늘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들에게 측은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시다. 복음서에서 엿보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버림받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늘 측은한 마음으로 사랑을 베푸시는 그런 분이시다. 성서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다운 회심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위에 헐벗고 고생하는 가난한 이들을 향해 측은한 마음을 지니도록 변화시킨다. 가난하고 쓸쓸하고 소외당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향해 측은해 하는 마음은 우리 속에서 그들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조금이나마 나누도록 촉구하기에 그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어떤 힘이 되어주고 있는지, 주위의 외롭고 쓸쓸히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힘이 되어주고 있는지를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가난하게 사셨기에 그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고생하는 이들의 아픈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계셨다.

 

 

지성적 영역에서의 회심

 

회심은 우리가 지닌 기존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며 지성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진리에 대한 견해를 지니고 있다. 진리에 대한 태도 역시 서로 다르다. 어떤 이들은 진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신의 이기적인 야심을 채우고 세속적 명예를 얻기 위한 도구로 여긴다. 때로는 그것도 모자라, 진리라는 명분으로 자신이 지닌 권력을 휘두르며 남을 착취하고 탄압하는데 사용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자기가 배우고 얻은 조그마한 진리라도 지극히 소중히 여겨 거기에 일생을 바치면서 남을 위해 아낌없이 삶을 내어주기도 한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바로 그 일을 위해 났으며 또한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요한 18,37) 하시는 예수님과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 하고 되묻는 빌라도의 태도 속에는 엄청나게 서로 다른 진리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진리를 날카롭고 도도한 것으로 받아들여 진리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단죄하고 판단하며 상처를 입힌다. 반면 또 어떤 이들은 진리는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여기기에 늘 남을 향해 양보하고 너그럽고 포용적으로 다가간다. 우리는 분명 성서 안에서 예수께서 살으시며 보여주시는 진리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향해 회심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셨다. 성서의 도전적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읽으면 분명 생명의 말씀이겠지만, 남에게 적용해 비판하기 위해 읽으면 분명 지옥의 말일 것이다.

 

 

도덕적 영역에서의 회심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회심 체험은 도덕적 영역에서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마땅히 신자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 가치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편리하고 필요한 가치만을 끌어다 선택적으로 적용한다면, 그것은 분명 명색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엄청난 모순 속에 지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가치관을 지녀야 할까? 하고 끊임없이 질문해야만 한다. 성서에 뿌리를 두고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공적인 윤리 도덕적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의 표준으로 삼도록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자신의 어줍지 않은 인생철학에 기반해서 형성된 가치관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멋대로 뜯어고치려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오만불손한 태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다운 하느님 체험은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객관적 지평에서 제시되는 윤리 도덕을 향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도록 이끌어 준다.

 

 

종교적 실천 영역에서의 회심

 

성서적 회심 체험은 종교적 삶의 실천 영역에서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여 모든 것을 그분의 이끄심에 내어 맡긴 사람들이다. 그분의 가르침이나 삶의 모범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와 빛을 제시해 준다고 믿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만나는 회심 체험은 실천적인 삶의 영역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세세히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약점이나 죄스러움을 뉘우칠 수가 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기 위해 늘 애쓰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양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행동양식은 애덕을 실천하는 삶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 이루시는 회심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늘 애덕 실천에 있어 진보하도록 촉구한다. 하느님과의 일치의 척도는 애덕을 실천하는 힘에 있다. 애덕 실천이야말로 모든 하느님 체험의 궁극적 표준이다. 예를 들어, 묵주의 기도를 하루 2천단을 바쳤다한들 애덕의 삶에 성장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궁극적으로 애덕의 실천에서의 성장이라면 그것은 분명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이고, 기도하는 행위는 바로 자기를 담는 행위이다. 하느님께 나를 내어드리는 행위이기에 내 마음속에 있는 선한 동기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는 행위가 바로 기도이다.

 

 

회심이 이끄는 애덕 실천

 

성서를 천천히 읽으며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 당신을 향해 이끌려 간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성서를 읽으면서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7)라고 말한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 사랑은 결심이기에 자기를 내어주는 행위이다. 자기를 내어주는 행위이기에 애덕의 실천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늘 회심을 가져오고, 이 회심은 애덕 실천을 통해 열매를 맺는다. 애덕 실천을 통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불완전하거나 가짜의 회심 체험일 것이다. 사도 바울로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의 언어와 심지어 천사의 언어를 말한다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소리나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1고린 13,1). 하루에 몇 시간씩 시간을 내어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애덕 실천에 있어서 성장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기도가 지향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애덕 실천에 있어서의 성장이다. 애덕의 실천은 먼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조그마한 실천이다. 하느님을 만나 깊이 회심했다고 울부짖고 떠들면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애덕을 실천하는데 게으르다면, 그것은 분명 하느님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망상에 사로잡혀 헛것을 체험한 것일 뿐이겠다. 기도가 지향하는 오직 하나의 목표, 그것은 바로 애덕의 실천이다.

 

[성서와 함께, 1998년 9월호, 심종혁(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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