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영성ㅣ기도ㅣ신앙

[신앙] 바른 신심생활을 위하여: 신앙을 건강하게 키우는 신심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5 ㅣ No.272

[경향 돋보기] 바른 신심생활을 위하여


신앙을 건강하게 키우는 신심

 

 

제일 좋은 계절 5월은 성모 성월이었고, 싱그러운 바람이 있는 6월은 예수 성심 성월이다. 성월은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께 특별한 은혜와 전구를 청하고, 그 모범을 따르도록 교회가 지정한 달을 말한다. 각 성월에 신자들은 각자 지향을 갖고 기도하며 공식적인 신심행사도 갖는다. 그런데 성월을 표현하는 ‘신심’이라는 말이 ‘신앙’과 비슷하기에, 신심을 신앙과 혼동하는 경우가 가끔씩 있는 것 같다. 올바른 신심을 위해서 신앙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신심은 신앙인의 영성적 도구

 

신앙(Faith)은 하느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응답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주도권을 가지고 스스로를 완성해 가는 종교가 아니다. 먼저 자신을 인간과 세상에 나타내시는 하느님의 계시가 있었기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응답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은 인간과 하느님의 인격적 관계이며, 하느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기본자세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나아가려는 우리를 가리켜 신앙인이라고 부른다. 특히 신약성서를 보면, 하느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완벽하게 드러나기에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분의 인격을 본받는 것이 가장 완전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신심(Devotion)은 하느님과 더 깊이 일치하는 신앙인의 영성적 도구이다. 신앙이 신앙인들에게 기본적 전제라면, 신심은 사적(私的)이어서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있는 영역이다. 이런 면에서 신심은 우리를 완전한 신앙에 가까이 나아가게 하지만 동시에 현실감을 잃어버려 우리를 그릇된 신앙으로 빠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신심은 언제나 신앙의 내용인 하느님의 계시된 진리와 일치해야 한다.

 

신심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공적 신심’으로 교회의 본질적인 신비와 신앙에 대한 전통적인 신심들이다. 예를 들어 예수성심 · 성체 · 구원의 상징인 십자가 · 마리아와 많은 성인들에 대한 신심이다. 둘째는 ‘특별 신심’으로 신앙의 본질적인 신비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신심들이지만 교회의 장상으로부터 인준을 받은 것이다. 예수의 오상 · 성인 유해 · 성화상 공경 등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는 ‘사적 신심’으로 각 개인의 신앙적인 취향과 요구에 따라 갖는 신심들이다. 기적의 패나 메달을 착용하거나 상본을 지니는 것 등을 이른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영성생활의 성장을 위하여 신앙에 부합하는 신심들을 장려해 왔다. 특히 예수 성심 신심과 성체 신심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어떤 신심들은 그 범위가 매우 협소하거나 개인적인 경우가 있다. 이런 신심들은 개인의 요구와 심적 태도에 의존하고 있어 개인의 태도에 따라 관심이 크거나 덜한 가치를 지닌다. 신심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 개인의 취향에 따라 신심을 길러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이미 각기 다른 상황의 개인과 공동체를 이끌고 계시기 때문이다. 독자적이거나 밀교적인 신심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을 길러주기보다 개인주의를 야기하여 문제를 일으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신심운동도 본질적인 변화를 고민해야 할 때

 

이런 관점에서 우리 교회의 주도적인 흐름이 어떤 것인지를 바라보게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 곧 그분의 삶에 대한 신앙이 중심을 차지하기보다 각종 신심단체의 모임이 더 결속력이 있어 보인다. 교회가 미래의 사목방안으로 제시한 말씀과 나눔 중심의 ‘소공동체’ 사목이 자리를 잡지 못하는 이유도 뿌리 깊게 자리한 신심운동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물론 이제껏 한국 천주교회가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까지 신심운동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신심단체가 본당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으며 사목자들의 든든한 협조자임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더 건강하고 올바른 신앙의 성숙을 위해 개인구원, 신심기도, 활동보고 중심에서 공동체 구원, 성서 말씀, 나눔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이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강조하는 나눔과 사귐과 섬김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해 신심운동도 본질적인 변화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때이다.

 

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성체신심을 예로 살펴보자. 특히 올해는 고(故)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성체성사의 해’이다. 성체신심(성체조배, 성체현시, 성체강복, 성체행렬 등)은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성체께 대한 최고의 신심은 미사이고,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최고의 영광과 흠숭을 드리며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미사를 떠난 성체신심은 의미가 없다. 때문에 교회는 그 시초부터 신자들의 미사 참례에 소홀함이 없도록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왔다.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만찬에서 성체성사의 제정으로 시작된 미사와 성체공경의 신심은 중세기에 이르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그러나 성체신심의 발전은 미사와 성체교의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곧 중세기의 신자들은 자주 영성체하는 것을 피하게 되었고 미사의 대중적인 참여는 제한적인 관점으로 위축된 것이다.

 

이는 ‘질서정연한 세계를 다스리시는 초월자이고 심판자이신 하느님’이라는 신관의 영향으로 ‘거룩한 성체’를 더욱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부족한 인간이 어찌 감히 성체를 모실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자리 잡는다. 결과적으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를 직접 받아 모시지 못함으로써 성체를 바라보기만 하는 예절들이 이때부터 교회 전례 안에 들어오게 된다. 이런 상황은 전례생활에 혼란을 가져와 성체공경이 미사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목적과 수단이 바뀌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신심생활의 목적

 

예수 성심 성월을 보내면서 나름대로 좋은 지향을 둔 신심생활이 오히려 주객이 바뀐 모습으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자.

 

미사에는 참례하지 않으면서 신심활동을 한다거나, 묵주기도는 하면서 성서 말씀을 배우고 읽는 것을 소홀히 한다거나, 개인의 문제해결을 위해 특별지향에만 매달리는 신심에 속해 있지는 않은가. 신심생활의 목적은 진실한 신앙인이 되는 데에 있다. 우리가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이끄는 신심생활의 본 의미를 묵상하며 나의 신심생활을 점검해 보는 예수 성심 성월을 살도록 하자.

 

* 한광석 마리아 요셉 - 대전교구 신부로, 교구 사목기획국 차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05년 6월호, 한광석 마리아 요셉]



1,26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