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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나주 윤 율리아와 연관된 일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식별 논문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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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11-28 ㅣ No.277

황양주 신부의 ‘나주 윤 율리아와 연관된 일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식별’ 논문 요약


겸손 · 순명 정신으로 ‘일치 권고’ 받아들여야

 

 

황양주 신부(광주대교구 봉선조봉본당 주임)의 광주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나주 윤 율리아와 연관된 일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식별’은 ‘제1장 성경에서의 식별’, ‘제2장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의 식별 이해’, ‘제3장 나주 현상에 대한 식별’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황 신부는 나주 현상을 식별하기 위한 순서로서 우선 ‘영들의 식별’에 대한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주목했다.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 성경에서의 식별과 식별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보고, 사도들과 초대교회 공동체가 이해하고 실천하면서 체득한 식별 기준들을 소개했다. 이어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와 영성학자들의 식별 이해 및 가르침, 그리고 그들이 제시하는 식별 기준들을 살핀 후 나주현상을 식별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했다.

 

나주 현상에 대해서는 그곳의 중요한 사건과 내용을 연대기 순으로 일별한 후, 중심인물인 윤 율리아와 나주에서 일어난다는 갖가지 현상들을 분석했다. 특별히 나주현상과 관련해 중요하면서도 소홀하기 쉬운 영적 지도자와 추종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황 신부의 논문 내용을 국문초록과 결론 중심으로 발췌 소개한다.

 

 

황양주 신부 약력

 

▲ 1987년 1월 사제서품

▲ 1987년 2월~88년 2월 광주대교구 나주 · 영산포본당 보좌

▲ 1988년 2월~90년 2월 광주대교구 영산포본당 주임

▲ 1990년 4월~94년 8월 군종사목

▲ 1994년 9월~98년 2월 광주대교구 금호동본당 주임

▲ 1998년 2월~2001년 9월 교포사목(호주 멜버른)

▲ 2001년 9월~2002년 9월 해외연수

▲ 2002년 9월~2004년 9월 광주대교구 방림동본당 주임

▲ 2004년 9월~2007년 8월 광주대교구 사목국장

▲ 2007년 8월~2009년 8월 광주대교구 남평본당 주임

▲ 2009년 8월~현재 광주대교구 봉선조봉본당 주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가? 성령의 현존과 활동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마음속 생각은 어디서 비롯되며 내적 움직임은 어디서 오는가? 신비현상(혹은 기적)과 신비체험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본 논문은 이런 물음들에서 출발했다. 특히 전남 나주의 윤 율리아가 기적을 체험하고 사적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한국교회 안팎으로 혼란과 분열을 일으켰다. 이는 식별의 문제로서 본 논문은 식별에 대한 성경과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통해 식별 기준을 정하고, 이를 토대로 나주현상을 식별해 보았다.

 

식별의 본질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시대의 징표를 읽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사목헌장 4항?로마 12,2)

 

구약성경에서 ‘영의 식별’이란 말은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선택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되어 영의 식별이 실천되었다. 이러한 선택의 행위에 영향을 주는 것을 ‘영들’이라고 한다. 영들은 다양한데 크게 선한 영과 악한 영으로 구별하며, 이 둘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식별이다.

 

복음서에서 드러난 식별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식별대상이요 식별기준이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알아보았다. 그래서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알아보는 것도 식별이다. 성령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가르침을 전해주기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깨닫도록 이끌어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올바로 깨닫고 인식하는 식별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성령의 활동에 대한 식별은 필연적으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삶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며, 이 식별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1코린 12,10)이다.

 

그리스도교 초기 400년은 우리가 어떤 영을 따르고 어떤 영을 배척해야 하는지에 대한 ‘영들의 식별’이 발달했다. 신앙의 체계를 이룬 400년 이후부터는 선과 악, 어둠과 빛 사이의 식별이 아니라, 겉보기에는 모두 다 선한 것들 사이에서 더 올바른 일이 무엇이고, 하느님의 뜻에 더 합당한 일이 무엇인가를 묻고 찾는 분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식별의 문제는 외적 행동에 대한 분별로 바뀌었다.

 

중세기에는 ‘영의 식별’이라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겸손과 순종이 선한 영의 기준이며 이러한 미덕들이 없으면 악의 영이라고 했다. 특히 요한 제르송은 처음으로 신비 평가목록과 영적지도자의 역할 그리고 식별기준을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식별기준은 진짜 동전과 가짜 동전을 식별하는 것에 비유하여 겸손(무게), 분별(유연성), 인내(견고성), 진리(도안) 그리고 사랑(황금빛 색깔)이다.

 

근대에 들어 이냐시오가 교회의 식별전통과 자신의 체험을 종합하여 영들의 움직임을 식별하는 규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심리학적 개념인 ‘영적 위안과 실망’을 중심으로 식별을 위한 ‘내적’ 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간의 성향이 영적 결정의 동기가 된다고 함으로써 식별의 문제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내적 평화와 기쁨이 성령 활동의 통상적인 표징이며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하는 표지라는 것이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신비체험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겸손이라고 했다. 신비현상과 체험은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외면적이고 감각적인 현상을 함부로 요청하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거부하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하느님의 능동성과 체험자의 수동성이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인간 편에서는 들리고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험자는 현상과 체험에 대한 진위 판단과 인준 여부와 상관없이 책임자인 교회에 알리는 것으로 그의 임무는 완수된다. 이렇게 식별의 문제는 구약과 신약성경 시대는 물론 교회 역사상 항상 있어 왔다. 그만큼 미묘한 영적 현상들이 많이 일어났다는 방증이다.

 

가톨릭 신앙은 공적인 신앙이다. 따라서 자신의 체험과 신념을 공적으로 주장하려면 먼저 자신의 체험과 신념에 대해 교회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 권한은 체험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도권에 있다. 특히 주장하는 내용이 기적이나 사적계시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교회의 식별전통에서는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마태 7,16~1812,33)는 원리에 따라 외적인 판단기준들을 마련하여 왔다. 그 기준은 크게 세 가지, 첫째,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의 일치 여부, 둘째, 체험자의 인품과 관련하여 진실성과 교도권에 대한 순명(겸손)의 문제, 셋째, 성령의 열매를 맺고 특히 애덕을 실천하는 문제이다.

 

1985년 6월 30일 윤 율리아의 집에 있는 성모상에서 눈물이 흘러내린 것을 시작으로 미사 중에 영한 성체가 그녀의 입안에서 살과 피가 되었다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적현상들이 일어났다. 그때마다 율리아는 성모님이나 예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율리아는 교도권의 판단도 없이 이것을 기적이요 사적계시라고 주장했다. 교도권의 결정이 발표된 후에도 율리아는 주장의 진위여부를 떠나 겸손의 덕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율리아와 그 추종자들은 ‘마리아의 구원방주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별도로 기념일까지 제정하여 정기적으로 의식을 거행하는 등 교도권을 무시하고, 교회와의 일치를 거부하며 이교(異敎)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200여 년의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자동처벌 파문제재(교회법 제1336조, 1364조)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은 기적과 사적계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함에서 비롯되었다.

 

율리아도 처음에 어떤 현상을 체험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의 가르침대로 율리아가 겸손하게 자신의 체험을 교회에 맡기고 인내롭게 기다리며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첫 번째 공지문이 발표되기 전부터 율리아와 추종자들은 별도로 자기들만의 기도모임과 기념일을 정하여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 공지문에서 파문교령까지 총 6번의 교도권 선언이 있었음에도 교구 · 지역별 담당자를 정하는 등 체계적?지속적으로 교회와의 일치를 거부했다.

 

율리아와 그 추종자들이 가톨릭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모든 사심을 버리고 신앙인의 가장 기본자세인 겸손과 순명의 정신으로 교회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는 첫 번째 공지문에서부터 마지막 파문교령까지 교회가 일관되게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공지문과 교령은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일치하라는 사랑의 채찍이기 때문이다.

 

나주 율리아 문제는 100년 간의 박해와 신앙 자유를 얻은 지 100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에 벌어진 일이다. 따라서 나주현상은 198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성경 공부, 영성에 대한 갈증과 깊은 관심 그리고 평신도들의 성장과 교회 안팎의 세속화 현상 등 이런 거시적 안목에서 보아야 한다. 나주 문제를 우리 교회의 수치로 여기거나 도려내야 할 암적 존재로 여기고 뿌리를 뽑아내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부정적인 현상도 우리 교회와 교우들 속에 그 원인과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한국 사회와 문화에 뿌리내리고 ‘우리 것’이 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시도와 진통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거론하는 토착화, 복음화는 다름이 아니라 이런 진통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기나긴 여정이다. 교회는 어머니와 교사로서 정도에서 벗어난 양들을 우리에 불러들이고 때로는 찾아가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타일러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노력을 계속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나주현상이 불러온 파문제재는 200여년의 길지 않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로서 쓰라린 아픔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학습의 기회가 되었다. 편향된 신심이 불러온 혼란과 분열이라는 이 경험을 통하여 이와 유사한 사건들에 대해 성숙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우고, 한걸음 더 나아가 건강한 신앙생활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되돌아보게 한 것이다. 건전한 신앙인은 눈에 드러나는 결과나 치유나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믿음과 사랑을 청해야 한다.

 

끝으로, 나주 문제는 시간이 가면 그냥 저절로 해결이 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고, 덮어두고 잊어버려도 되는 그런 사건도 아니다. 그래서 반면의 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대증적(對症的)인 반응이 아니라 여유와 시간을 갖고 나주 문제를 성서신학, 교의신학, 전례와 성사, 사목신학, 교회법, 영성신학 등 관련분야 전문가들이 다각도에서 연구하고 토론하여 하나의 백서를 만들어 남길 필요가 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29일, 정리 곽승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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