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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구심기도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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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4 ㅣ No.296

구심기도에 대한 소고

 

 

이번 한국 베네딕도회원들의 모임을 위한 주제 강의로 “구심기도”라는 제목을 정해 놓았지만,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 동안 씨름하며 읽어 본 몇 권의 책에서 겨우 짜깁기를 해보았습니다. 서투르고 어색한 곳도 많겠지만 성령께서 활동하시어 모든 부족한 점을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편,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렉시오 디비나를 이미 수십 년씩 실천하시며 맛들이신 선배님들이니까 다 걸러서 들으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5개월간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구심기도를 위한 연수와 피정을 하면서, 구심 기도를 배우고자 열망하고 실천하며 삶의 활기와 기쁨을 느끼는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 특히 평신도들을 보고는 놀라움이 컸습니다. 또 구심기도를 설명할 때 크리스챤 최초의 영성의 발상지로서의 렉시오 디비나와 연관을 짓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뻤고, 은근히 이런 기도의 전통을 지닌 베네딕도회 수도자임에 자부심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우리의 영성인 렉시오 디비나를 제대로 충실히 살고 있지 못했던 것도 절감하여 부끄럽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렉시오를 한다고 했어도 무언가 석연치 않고, 채워지지 않는 구석이 늘 있었음을 돌이켜 보며 구심기도를 통해서 렉시오 디비나의 본연의 의미를 찾고, 그 충만함을 누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오래 전에 3개월가량 베네딕도회 관상수녀원에서 살 때에 만난 수녀님 한 분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당시 70세에 가까웠는데 영적 독서는 무엇이고 어떻게 하시느냐고 물었더니, 더 이상 아무 책도 읽지 않고 다만 요한복음 13-17장을 마음에 지니고 산다고 대답하셨다. 도서실에 들어서면 늘 “신간”에 맨 먼저 눈길이 쏠리곤 하는 나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언제나 한결 같고, 맑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분의 모습, 깊은 기도에 잠긴 모습은 내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새겨 주었다.

 

관상기도, 이는 참으로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지금까지 추구해 왔고, 이리저리 쫓아다니게 한 내심의 목마름이었다. 구심기도를 접하면서 이론적인 정리를 하니까 조금은 명료한 길이 보이는 것 같아서 기쁘다. 문제는 다만 이를 충실히, 사랑으로 목숨을 걸고 실행하는 것이다. 관상의 대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오로지 사랑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일”이라고 했으며 토마스 머튼은 “타인을 위한 연민을 길러 내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관상은 논할 가치가 없다”고 했다. 관상기도를 배우고,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열망이 삶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아무리 높은 관상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1고린 13장)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나누는 뜻에서 오늘 다음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우선 구심기도의 기원을 간단히 보고, 그 다음 관상에 대해서 잠깐 살펴본 다음 렉시오 디비나와 구심기도의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심기도의 실천 방법에 대해서 살펴 보도륵 하겠다.

 


1. 구심기도의 기원

 

구심기도라는 말은 현대의 영성 신학자, 토마스 머튼의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에서 따온 것이지만, 그렇다고 구심기도가 현대에 생긴 것은 아니다. 이는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던 시편기도, 렉시오 디비나, 예수기도, 14세기의 <무지의 구름>이나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전통 안에서 계속 전해 내려 왔던 것이다.

 

구심기도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관상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교리서에서 찾아보면 “관상이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침묵 속의 사랑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기도에 진정으로 일치하여 우리도 그분의 신비를 나누어 갖게 하는 기도의 단순한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관상기도란 생각이나 느낌, 의식이나 상상을 초월하여 영혼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 하느님을 기다리는 행위로부터 기도의 원천으로서 성령의 선물들이 점점 더 우세해지는 것이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관상은 성서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서 얻어지는 열매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선물로서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라고 그 전통을 요약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종교개혁 이후부터 계몽주의, 이성주의 등이 대두하면서 신비적인 기도를 배척하고 경계하게까지 되어, 교회 내에 관상의 전통은 거의 상실되다시피 했고, 따라서 관상 기도는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이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소수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생겼다.

 

제2차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복음과 창립자의 정신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수도생활을 재점검하고 쇄신하라는 교회의 요청으로 과거의 영성 대가들 -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 - 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이로써 교회 내에 그 동안 맥이 끊어졌던 관상의 풍요로운 전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동양적 명상의 방법을 찾아 동양 종교에 매력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 중 반 이상이 가톨릭이었다. 그들은 더 깊은 차원의 기도 생활 - 하느님과의 일치, 관상기도 - 을 목말라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1970년대에 미국의 마사츄세츠주 스펜서(Spencer)에 있는 성 요셉 수도원의 아빠스인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이미 교회 내에 있는 관상적인 전통을 현대인들이 접근하기 쉬운 방법으로 제시해 주어야 할 책임감-소명감-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윌리엄 메닝거(William Menninger) 신부는 ?무지의 구름?을 이용하여 ‘구름의 기도’라는 기도법을 고안해서 사제들을 가르쳤는데 상당히 좋은 호응을 받았다. 그 후 베이실 페닝톤(Basil Pennington)이 남녀 수도자 장상들에게 피정을 주었으며, 이 피정 중에 토마스 머튼의 글에서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용어를 접하게 된 그들은 스스로 이 기도 방법을 <구심기도>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시작된 구심기도는 그 동안 많은 호응을 받아 특별히 평신도들 사이에 활발히 움직였으며 드디어 1984년에는 뉴저지에 관상기도 지원단이 창립되었고 1987년에는 콜로라도주 덴버(Denver) 교구청 내에 키팅 신부를 중심으로 관상생활 센터가 발족하게 되어 각종 피정과 세미나를 주최하면서 이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구심기도는 관상기도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현대인이 접할 수 있는 방법과 언어로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의 열매라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 미국 전역 뿐 아니라 오스트랄리아, 카나다, 영국, 독일, 아일랜드, 남아프리카, 필리핀 등에 지원소가 있으며 현재 36,000명이 구심기도의 정규적 우편물(소식지, 피정 안내서 등)을 받아 보는 것으로 등록되어 있다.

 

 

2. 관상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의 목적은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 있다”고 했으며 현대의 사회 심리학자인 에릭 프롬 역시 “신학의 궁극 목적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 있다”고 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몸소 보여 주셨고, 그 길을 가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즉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우리도 아버지와 하나가 되고, 우리도 서로 하나가 되라고 부르신다(요한 17장).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관상은 우리의 사고, 의식, 상상을 초월하여 우리 영혼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또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탄식으로 하느님께 기도드리시며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신다. 그리고 이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관상은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지만, 우리 편에서도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1) 하느님 현존에 대한 믿음

 

하느님은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능력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

 

2) 열망

 

우리 영혼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만나 뵙고 싶은 열망,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려 그분 홀로 우리를 주관하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3) 침묵

 

“하느님은 순전한 영적 존재이시니, 영적으로 예배드려야 한다”(요한 4,24). “하느님의 첫 번째 언어는 침묵이다. 그 어떤 언어도 다만 잘못된 번역일 뿐”이라고 키팅은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말로는 그분과 합당한 대화를 할 수 없고 오직 침묵을 통해서만 그분과 대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관상의 뿌리는 내적 고요이다.

 

모든 크리스챤의 영적 생활의 목적이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데 있고, 같은 맥락에서 관상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일치라고 볼 때 관상기도는 어느 특정인에게만 가능하거나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하도록 불림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의 일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칼 라너(Karl Rahner)는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신비가가 되는 것이다. 실상 신비가가 아닌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신비가가 되고,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3. 크리스챤 기도의 전통 : 렉시오 디비나와 구심기도의 관계

 

하느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먼저 말씀을 건네시며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려고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느님과 함께 사는 길은 하느님이 건네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되새겨서, 하느님을 알고, 이렇게 체험한 하느님께 사랑의 응답을 드리며 우리 자신을 온전히 봉헌함으로써 그분의 사랑에 잠기는 것, 곧 사랑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이 초대 교회 때부터 있어온 자연스러운 기도의 전통이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렉시오 디비나가 4 단계의 과정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에 이르러서 카르투시오회의 원장이었던 귀고 II세에 의해서이다. 그는 렉시오 디비나를 각각 ‘lectio(읽음), meditatio(되새김), oratio(기도), contemplatio(관상)’의 4 단계로 이름 지음으로써 렉시오 디비나의 정점을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감미로운 관상으로 분명히 제시했다.

 

규칙서를 보면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은 없으나, 그 실천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하루의 일과 중 두세 시간이, 그것도 가장 좋은 시간이 독서에 할당되고, “매일의 육체노동에 대하여”를 보면 독서에 전념하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48장에의 내용을 보자. “형제들이 독서에 전념하고 있는 시간에 한두 사람의 장로들에게 책임을 맡겨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하여.... 독서에 힘쓰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무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방해가 되는.... 한두 번 책망하고 그래도 고치지 않으면 규정된 벌에 처하여 다른 이들이 두려워하게 할 것이다”(48,17-20). 이로써 베네딕도가 독서에 전념하는 것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처벌의 규정까지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일에도... 모든 이들은 독서에 전념”(48,22)할 것을 당부한다. 그런데 ‘lectio’와 함께 쓰인 동사 ‘vacare’가 18절의 한가함과 잡담에도 쓰였고 23절 공부나 독서를 하려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형제를 위해서는 할 일을 맡겨 놀지 못하게(non vacet) 하라는 곳에서도 같은 단어를 쓰고 있음은 주목할만하다. 그러므로 베네딕도는 독서를 할 때 한가함이나 잡담, 놀이에 빠질 때처럼 우선 여유를 갖고, 다른 어떤 일에도 쫓기지 않는 느긋한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 아닐까? 사실 우리가 무엇엔가 쫓기고 바쁘다 보면 아예 독서를 빼먹거나, 한다 해도 건성으로 하게 되어 도무지 전념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종종 체험한다. 그러나 규칙서의 분명한 가르침은 하루 일과 중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만을 위해서 비워 놓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여 독서에 전념하고, 독서에 열중하라는 것이다. 이 자세가 바로 예수께서 기뻐하신 바 “필요한 것 한 가지”를 택하여 몸과 마음을 바친 마리아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루가 10,38-42).

 

머리말 49절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의 길을 달리는” 수도승의 모습이나, 7장 67절 “겸손의 모든 단계를 다 오른 다음에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된 수도승의 모습에서, 끊임없는 렉시오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 사신 베네딕도 자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렉시오 디비나는 관상으로 나아가게 하고, 관상을 정점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전통적인 기도법으로서 초대 교회 때부터 수세기 동안 행해졌는데 중세기 말엽부터는 수도원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렉시오 디비나의 자발적이고 단순한 기도 방법 대신에 체계화되고 조직적인 “정신 기도”(Mental prayer)가 통용되었고, 16세기 말에는 관상은 ‘보통 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위험한 것으로까지 간주되었으며, 비범한 은총으로서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이는 관상이란 진지하게 영적 생활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았던 15세기까지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위배된다.

 

이어서 17세기에는 정적주의라는 이단이 생겼다. 이는 주님 안에서의 쉼(Resting in the Lord) 이라는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시도였으나, 선업을 제한하고 삶의 도덕적인 차원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주님의 현존 안에 쉬는 것에만 집중하려는 것이었다. 17세기의 또 다른 이단은 얀세니즘이었다.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정화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이었다. 관상은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로서, 완덕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은 그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을 뿐더러, 생각하는 것조차도 죄스런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근세에 와서 성서의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좋은 현상이나 성서를 머리로만 받아들여 지나치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어 말씀을 가슴과 영혼으로 받아들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체험하며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쉬는 렉시오 디비나의 4번째 단계인 관상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희미하게 되었다.

 

오늘날 일반 신자들의 영성생활에서 렉시오 디비나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이를 실천하는 수도자들마저도 대부분이 렉시오 디비나의 최종 목적인 관상, 즉 하느님과의 일치에는 별로 도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구심기도를 렉시오 디비나의 한 부분이라던가 또는 렉시오에서 나왔다고 정확히 확증할 수는 없으나 렉시오 디비나의 기도(Oratio)에서 관상으로 옮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감소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수련으로서 렉시오 디비나와 연관지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묵상에서 내적 침묵(관상)으로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과잉활동: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기도에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함.

2. 사고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곧 기도라고 여김.

3. 자아탐구: 자신의 활동이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집착.

 

그렇다면 구심기도가 어떻게 렉시오 디비나의 본래 목적을 회복하도록 도울 수 있는가? 구심기도는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기도로서 전 존재를 사랑으로 열어드리고 맡겨드리려는 지향으로 하느님 앞에 머무는 기도이다. 마음속에 사고나 잡념이 떠오를 때마다 거룩한 단어(하느님 앞에 있고자 하는 우리의 지향을 드러내는 사랑의 말)를 의식함으로써 거듭 지향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께로 우리의 존재를 향하게 하는 것이다. 지향을 순수하게 가지는 것이 구심기도 실천의 초점이다. 이는 바로 사랑의 문제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가기 위해 이전에 지녔던 사고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과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활동에 대한 의존성으로부터 떠나게 된다. 구심기도에서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거듭 지향을 새롭게 하다 보면 어느덧 거룩한 단어가 의식으로부터 사라지고 일반적인 평화를 느끼거나 또는 하느님께 사로잡혔다고 느끼거나 아니면 그저 편안하고 고요한 지점에 이르게 된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의 활동을 떠맡으시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그러면 우리의 의지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하느님의 의지와 섞이게 되며 우리 안에 일종의 행복감이 생기고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확신을 체험하게 된다. 이처럼 성령의 활동이 우리의 활동을 흡수하여 떠맡게 될 때 엄격한 의미의 관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4. 구심기도의 방법

 

구심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를 키워나가는 수련이다. 그러므로 구심기도에서는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지향과 이 지향에 동의하는 의지의 행위가 중요하다. 구심기도의 방법은 매우 단순한 것으로 다른 모든 사고들을 떠나보냄으로써 우리 존재의 중심에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이는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충실한 종처럼 성실함과 인내로써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구심기도의 지침>

 

1.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하는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선택한다. 예를 든다면, 주님, 예수, 아버지, 아빠, 마리아, 성령, 평화, 샬롬, 아멘, 사랑 등이다.

 

- 거룩한 단어(Sacred word)라고 하는 것은 그 낱말이 지닌 본래의 의미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향하고자 하는 지향을 표현해 주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이 낱말은 기억하기 쉽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짧을수록 좋다.

 

- 일단 거룩한 단어를 선택했으면 기도 중에 바꾸지 않는 것이 좋다.

 

- 사람에 따라서 거룩한 단어보다 어떤 이미지를 사용하여 마치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듯 하느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에 들어갈 수도 있다.

 

2. 눈을 감고 편안한 자세로 앉는다. 기도에 들어갈 준비로 성서나 시편의 짤막한 구절을 암송하거나, 간단히 몸을 푸는 운동이나 심호흡을 할 수 있다.

 

3.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하심에 동의하는 지향을 표현해 주는 거룩한 단어를 의식 속에 가볍게 떠올리면서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한다.

 

- 기도 중에 일단 의식과 상상이 사라지면 거룩한 단어를 계속 반복할 필요가 없다. 거룩한 단어 그 자체가 나를 관상으로 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단어로 표현되는 나의 지향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잡념이나 상상을 벗어나면 그냥 그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

 

- 기도 중에 거룩한 단어는 희미해지고, 의지의 충동만이 남다가 아주 사라지기도 한다.

 

4. 어떤 생각이나 느낌, 감각 - 어떤 종류의 인식이든 간에 - 을 알아차리게 되면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간다.

 

- 구심기도의 진보는 아무런 사고를 갖지 않는 데에 있지 않고, 사고로부터의 이탈, 사고를 어떻게 다루는 가에 있다. 어떤 사고에 대해서도 저항하거나, 머물거나, 감정적인 반응을 하지 말고, 다만 아주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이것이 구심기도에서 우리가 하는 유일한 활동이다.

 

-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감으로써 하느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최초의 지향을 새롭게 하고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 거룩한 단어는 생각을 없애는 신비스런 무기가 아니다. 거룩한 단어를 의식 속에 불러들임으로써 생각이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두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5. 정한 기도 시간이 다 되면 그 상태로 잠시 머무른다.

 

그 다음 주님의 기도나 적합한 시편을 암송하는 것으로 기도를 끝맺는다.

 

 

구심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향’이라고 키팅 신부는 거듭 강조한다. 여기에서 ‘지향’이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를 붙들어 주고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쉬는 것이며,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언제나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그분께 우리의 전 존재를 내어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명확한 정신, 깨어 있는 자세, 예리한 현존 의식을 유지하려 애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단순히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동의로써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동의 즉 우리의 가장 깊은 심연을 하느님께 기꺼이 넘겨 드리는 것은 구심기도에서 진정한 초석이기 때문이다. “오, 주님, 제 뜻대로가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주님, 당신은 저를 속량하셨기에 당신의 손에 저를 맡기나이다.” 이러한 정신들이 이 기도의 신학적인 기반이며, 이것 없이는 이 기도의 실천이 무의미하게 된다. 키팅 신부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연급하면서 이것이 바로 관상기도의 고전적인 이해임을 거듭 강조한다.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전적인 허무를 통해서 사랑을 쏟아 붓는 분은 하느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구심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방법상의 수련>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내맡기는 것>이다. 주의집중(Attention)이 아니라 지향(Intention)이며, 어떤 행동을 하는 것(Doing)이 아니라 단순히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Being)이다.

 

구심기도를 실천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키팅 신부의 권고 말씀을 들어보자: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을 배우십시오. 하느님의 현존을 실천하기를 배우십시오.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쉬기를 배우십시오. 하느님 앞에 단순히 머물기를 배우십시오. 하루에 두 번씩 단 10분이라도 말하기와 분석하기를 멈추고 단순히 “중심으로 오십시오.” 당신의 인간적인 영이, 당신 안에 머무시는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되는 그 곳으로.

 

 

맺음말

 

“지금은 우러러도 숨어 계신 예수님

이렇듯 애타하는 소원을 들어 주시어

언젠가 드러나실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환히 보며 복되게 하옵소서”(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우리 마음속에는 하느님을 향한 진한 그리움이, 그분을 뵈옵고 싶은 끊임없는 갈망이 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말씀대로 님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기에 님의 품에 돌아가기까지 늘상 서성이며 불안해하는 우리들을 주님 친히 가없는 사랑으로 한 걸음씩 인도하시어 당신 모습으로 다듬어 주신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분과 같은 모상으로 모습이 바뀔 것이니, 영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에서 영광으로 모습이 바뀔 것입니다”(2고린 3,18). 얼마나 벅찬 부르심인가! 이것이 우리 삶의 의미요, 목적이다!

 

어느 성당의 사무장이 아침마다 성당 문을 열면 잠시 후 꼭 같은 시간에 한 노부인이 들어와서 같은 자리에 두 시간 가량 앉아 있다가 조용히 나가곤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루는 궁금해서 질문을 했다. “제가 좀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부인은 매일 아침 여기에 오셔서 무엇을 하시는지요?”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은 나를 바라보시지요. 우리는 그저 서로를 바라보곤 하지요.” 얼마나 아름답고 단순하며 또한 감동적인가! 그 노부인은 벌써 이승에서 사랑하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을, “그분을 기다리면서 그분 앞에 고요히 머물 줄 아는”(시편 37,7) 기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구심기도는 신앙으로 실천하는 관상기도이다. 이 기도에 성장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려면 매일 일정한 시간을 따로 떼어 놓아야 하고 거기에 우선권을 두고 충실해야 한다. 이와 같이 기도에 헌신함으로써 하느님을 위해 온 마음을 쏟아 붓는 열정적인 기다림이야말로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로가 기도했듯이 “하느님 친히 성령을 통해 우리의 내적 자아가 성장하여 신앙 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머무시고 우리가 사랑 안에 뿌리를 박고 기초를 두어....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에페 3,16-19). 그리하여 마침내 “하느님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우리가 구하거나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풍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에페 3,20).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고 망설이랴! 다만 시작하는 것이다. “영원토록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당장에 달려 실행”(머리말 44절)하는 것뿐이다.

 

구심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신앙의 고백, 사랑의 고백이 될 “타물의 기도”로써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오, 내 안에 계신 당신

내 존재의 저 밑바닥에서

나로 하여금 파고들게 하소서.

내 존재의 저 맨 밑바닥을.

 

오, 내 안에 계신 당신

내 존재의 저 밑바닥에서

나로 하여금 온갖 주의를 다 기울이게 하소서.

당신 현존하심에.

 

오, 내 안에 계신 당신

내 존재의 저 밑바닥에서

내 침묵에서 받으소서.

내 사랑의 고백을.

 

오,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

당신의 침묵 속에서

나로 하여금 믿게 하소서.

당신의 활동하심을.

 

오, 나의 태양이신 당신

내 존재의 저 밑바닥에서

나로 하여금 머물게 하소서.

이 태양 안에.

 

 

참고 도서

 

1. Shannon, William H., Silence on Fire (New York: Crossroad, 1991).

2. Hall, Thelma, Too Deep for Words (New Jersey: Paulist Press, 1988).

3. Keating, Thomas, Intimacy with God (New York: Crossroad, 1994).

4. Keating, Thomas, 엄 무광 역,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가톨릭 출판사, 1997).

5. 엄 무광, ?향심 기도?(성 바오로 출판, 1998).

 

[코이노니아, 제24집, 조병갑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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