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4일 (금)
(녹)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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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4 ㅣ No.298

기도의 어려움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피정을 지도하면서,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이 자신의 기도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고백소에서, 영적지도에서, 오가는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은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다는 말을 아주 쉽게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기도생활을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그들의 실망을 감지 할 수가 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기도의 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기도하는 데에 실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서둘러 말하기를, 기도한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기도할 시간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좀 더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 내에 많은 것이 쇄신되었지만 기도에 관해서는 별로 도움을 새롭게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함께 영적인 여행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내가 느끼는 것은 기도하기 위하여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도할 시간을 못 가진다고 말할 때는 그 이면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글에서 그 다른 이유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다.

 

어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실제로 기도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무딘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그래도 이러한 감정은 사실이다. 기도는 그들에게 짐이 된다. 기도는 항상 짐이 되었다. 그들은 때로는 하느님이 기도생활을 좀 더 하라고 그들을 항상 꾸짖으시는 그런 하느님의 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와 같은 하느님의 상을 늘 두려워했고 그래서 아무리 그들이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결코 충분하지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마침내 죄의식으로 꽉 차서,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회피하는 기교를 부리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떠한 기도를 하더라도 단지 죄의식과 고통을 느낄 뿐이다. 그들은 이렇게 요구가 많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기도할 때 기쁘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하면서 기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도하러 갈 때 그들이 듣는 것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말 뿐이었다. 그들도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 그들이 무거운 짐에 허덕일 때 그분께 가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예수께로부터 듣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러한 친밀한 관계는 교묘하게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최근에 경험한 불행 때문에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경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다면, 그의 기도생활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분노와 거부가 표출될 때에 기도하고 싶은 욕망이 얼마간 없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친구가 그를 마음 상하에 하기 전에 친구를 거절하거나 관계를 끊으려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하느님께서 최근에 이런 불행을 나에게 주신 걸 보면 하느님께서는 나와 우정을 계속할 마음이 전혀 없으신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기도 안하기로 마음을 먹겠다. 그래서 먼저 그분을 내가 거절하여 적어도 내가 상처를 덜 받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주여 나로 하여금 기도하기를 원하게 도와주십시오”라는 간단한 기도를 하라고 제안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렇게 기도하게 되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하느님께 “제가 기도하기를 원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그 말 자체가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대단한 기도 같지는 않지만, 하느님께 어떤 공간을 제공해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그 사람의 삶 안에서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하느님께 “제가 기도하기를 원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저는 두렵습니다. 그러하오니 당신께서 내 삶 안에서 힘 있게 활동하셔야만 합니다. 저를 도와주시어 저의 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자신의 상황에서 회피하지 않고 이렇게 기도 할 수 있다면 마침내, 두려움은 하느님께 전달될 수 있고 새로운 하느님의 상이 드러나기 시작할 수 있다. “내가 기도하기를 원하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이 근본적인 유혹, 즉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희망을 완전히 버리겠다는 유혹을 자기 스스로 대면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면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아직도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이것은 하느님께 시험 삼아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선택한 이 응답을 가지고 우리가 결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하실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순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계속 선포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기도를 반복할 때 그 사람은 이러한 기도가 의식의 저 밑바닥까지 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기도야말로 그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기도이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장에서 성령은 우리가 약하고 기도할 수 없을 때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고 말한다. 바오로 사도가 약속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의 성령은 그 사람의 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 사람이 기도하기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고 있는 동안에 더 깊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유혹과 계속 싸우는 데 필요한 충분한 힘을 그 사람에게 전해 주는 공급선이 되어 준다. 그 사람은 고아로 남지 않는다. 날이면 날마다 기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계속 불타고 있는 그 불꽃은 점점 자라서 항상 기도하고 싶은 욕망이 되고 실망하지 않게 된다.

 

때로는 어떤 사람이 “나는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나는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나는 기도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람은 느낌으로 사는 사람이며 그가 기도할 때 얼마나 느끼느냐에 따라 기도의 질을 가늠하는 사람이다. 만일 누가 기도하며 메마른 시기를 경험했다면, 그는 그때 기도하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며 “기도하고 싶은”기분이 들 때까지 미루고 싶은 유혹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기도를 미루는 것은 결코 기도생활에 정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도의 초보자로서 기도할 때 최근에 감정적인 위로를 크게 받은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하느님은 초보자에게 감정적인 위로를 주시는 것이 상례이다. 그리고 후에 위로를 거두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좋은 시간에나 나쁜 시간에나, 기도하고 싶을 때나 싫을 때나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감정적인 위로가 없을 때 사람들은 주로 느낌을 가지려고 기도한 것은 아닌지 성찰하게 된다. 만일 누가 이러한 느낌으로만 기도한다며, 그는 자신이 부끄럽게 여기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즉시 회피하려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 문제야말로 기도해서 치유와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기도생활의 몫을 특별한 감정의 농도로써 측정할 수는 없다. 단순한 기도의 느낌으로는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길을 가늠할 수 없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좋은 느낌을 느끼도록 기도하라고 하시지는 않는다. 도리어 충실하게 남아 있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다.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삶 안에서 특정한 장소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에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가 느낌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는 느낌만이 항상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단지 인지하여야만 한다. 느낌은 우리의 삶 안에서 아주 많은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느낌이 우리의 기도생활이 얼마나 좋은지를 결정하는 측정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많은 성인들의 생애에서도 긴 메마름의 시기가 있었다. 성인들은 그들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관계없이 계속 기도하였다.

 

우리가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일지라도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믿음의 행위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보다 하느님과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를 인정하는 것이며 내 자신을 하느님의 많은 역사하심에 민감하게 내 맡기는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위대한 여성, 남성들처럼 “나는 당신이 나를 이끄는 곳은 어디에나 따라가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신다면 나는 일념으로 당신만을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나를 정화하기 위하여 사막에 두시기를 원하신다며 나는 그곳에 나의 장막을 치고 희망을 가지고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그는 말하게 된다. 그 사람의 기도생활이 이와 같이 적응력이 있게 되면, 그 때는 이미 이런저런 느낌이 문제가 아니고 도리어 인생이 사계절을 경험한 사람의 마음으로 기도를 자유롭게 하게 된다.

 

사람들이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할 때는 그들이 자기 기도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결과가 없어 보이자 그들의 기도의 가치에 의문을 품는다. 그들은 이 세상은 많은 고통으로 꽉차 있고 문제들은 항상 그대로 있는데 무엇 때문에 성가시게 기도를 중단하면 그들의 삶 안에서 희망도 서서히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희망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염려하거나 난폭하게 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문제에 짓눌리지 않으며 보다 더 큰 세상과 연대의식을 갖게 된다. 사람이 기도할 때 마음의 회심이 가능하다. 불의를 없앤다는 것은 항상 개인의 회심에서 비롯되며 마음의 회심으로 완성된다. 사람들이 기도로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기도의 가장 중대한 효과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인간의 마음은 변화하여 하느님이 원하는 마음이 된다. 기도는 사람들이 싸움을 평화로, 미움을 사랑으로, 보복을 용서로 변하게 한다. 다른 사람을 변하게 하여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회심하도록 은총을 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문제의 핵심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 오랫동안 인간 안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다른 인간의 마음이 변화해야 된다는 것을 그 분에게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 핵심이 되는 문제는 내가 내 마음 안에서 하느님이 활동하시도록 나를 내어 맡길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기도함으로써 나는 하느님께서 이미 역사하시고 계신 그 마음을 영적인 마음으로 바꾸어 끝마무리를 하시도록 하느님이 더 계셔 주실 것을 청하게 된다. 나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바꾸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세계 인류가 즉시 회개하기를 원하고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으면 하느님께 실망을 한다. 그들은 왜 계속 기도해야 하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인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사람들을 개개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하는 옛날 사고이다. 각 개인은 이기심, 탐욕, 질투, 교만, 욕정으로부터 치유받을 필요가 있다. 각자가 새로운 마음을 받을 때에 비로소 이 세상은 정의의 평화가 넘치게 된다. 이러한 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개별적인 관심을 갖고 개인을 대하신다는 기본원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을 못 마땅해 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 문제가 많은 것도 이와 같은 하느님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비난하게 될 때 그들은 기도하기를 곧 포기한다. 그들은 세상이 결코 변할 수 없으므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한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그들의 기도생활은 심장마비 위험을 받는다. 이러한 종류의 좌절은 단지 기도를 많이 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상황의 직효약은 그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바로 그 점에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덫에 걸린 느낌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느님이 자기들을 놀린다고 느낀다. 한편으로는 하느님이 그들에게 기도를 중단하지 말하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에는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기도에 대하여 계속 생각을 한다. 이제 그들은 기도를 하면서 그들 자신이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계속 기도할 것인가에 대하여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이러한 갈등을 실컷 따진 후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희망을 가져오는 기도를 시작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세상사의 문제로 고민할지라도 하느님은 상심하지 않으신다. 실제로, 하느님은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하여 우리가 받은 모든 재능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어쨌든 기도하게 될 때 하느님은 우리가 스스로 신뢰로써 기도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문제들과 씨름할 때에 그들이 이 문제들을 하느님께 넘겨드리고 하느님의 사랑에 휴식을 취해야 할 때가 온다. 고요한 신뢰로써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 없앤다는 것은 자신을 파멸하게 하는 모험이다. 파멸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파멸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도를 외면하고 엄청난 문제들을 대면하게 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인 부정에 도전하고 예언직을 수행하고자 할 때, 반대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도전해 온다. 아무도 이러한 악의 힘에 대하여 끊임없는 기도 없이는 감히 대면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교훈을 이미 아시고 마치 그의 전 생애가 기도에만 달려 있는 것같이 기도하셨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을 때, 그는 이러한 절규를 기도로 바치셨다. 예수께서는 갈바리아로 향하시면서 심각한 위기가 올 때마다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그의 전교 사업을 시작하시기 전 사막에서 악의 힘을 대면하셨을 때에도 모든 것이 기도였다. 겟쎄마니 동산에서 악의 힘이 극치에 도달하였을 때에도 기도의 맥락 안에서 이 모든 것을 대면하셨다.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를 끊임없이 기도하는 분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기도의 정신에서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손을 뻗치시고 당신의 정의와 평화의 설교를 하신다. 만일 누가 예수의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를 살고 싶다면,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옳은가를 결정할 때 기도야말로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기도는 우리 인간에게 항상 어려운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NONSENSE를 가지고 SENSE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하는 한 기도는 어렵다. 그래서 기도를 중지하고 싶은 유혹이 항상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유혹에 항복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메말라 버릴 것이고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주 작은 세계에 갇히게 될 것이다. 기도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아주 쉽게 냉소적이 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그리고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면”그 때에는 새로운 힘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여 이 세상의 얼굴을 새롭게 할 것이다.

 

[코이노니아, 제17집, 글 Scott Seethaler, O.F.M.cap1), 홍성임 돌로레스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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