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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박해시대 신앙 선조들, 부활시기 어떻게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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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5-13 ㅣ No.515

박해시대 신앙 선조들, 부활시기 어떻게 보냈을까

부활시기에 포졸 습격, 체포 집중... 개 잡고 술 빚어 '잔치' 벌이기도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은 '회개와 기도의 때' 사순시기 40일을 보내고 어떻게 부활시기 50일을 보냈을까. 그 풍경을 보려면, 「황사영 백서」나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등 각종 사료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이들 사료를 통해 50일간을 단 하루 축일처럼 기뻐 용약하며 지낸 박해시대 신자들의 '부활살이'를 들여다본다.

- 이중배 순교자가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아 원경도 요한 등과 함께 교우 정종호의 집에 모여 음식을 나누며 부활삼종기도를 바치고 예수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알렐루야를 부르며 전례적으로 기쁨을 드러내는' 50일 축제이건만, 박해시대엔 그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서한은 그 실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1839년 기해년 박해 당시 부활시기는 포졸들의 습격과 체포, 박해로 점철된다.
 
그해 2월 17일 사순 제1주일을 시작으로 주님 만찬 성목요일까지 신자 550여 명에게 '줄기차게' 판공을 준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이 많이 모여드는 것을 피하고자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정작 며칠간 휴식을 취한다. 짬짬이 편지를 써 중국에 보낸 뒤 부활 제2주일인 4월 7일 사백주일(세례 받을 때 입었던 흰옷을 벗는 날)에 교우들이 남명혁(다미아노)의 집에 모이게 했다. 다만 미사 참여 인원은 20명으로 제한했다. 너무 많은 교우들이 모여들면 박해를 불러올 우려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백주일 미사에도 역시 100명이 넘게 몰려들었고, 오가는 이들의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박해는 돌이킬 수 없었다. 훗날 시성되는 남명혁(다미아노)ㆍ이광헌(아우구스티노) 가족 20여 명이 체포된 것도 이 미사 직후였다. 두 가족 식구들이 체포되면서 앵베르 주교의 제의와 주교관, 경본 1권 등이 포졸들 수중에 들어갔다. 신문은 혹독했다. 포장이 배교를 요구했으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배교를 거부한다. 심지어 남명혁의 12살 된 아들과 이광헌의 12살 된 아들, 17살 된 딸조차도 고문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체포와 고문 소식에 교우들은 벌벌 떨면서도 체포된 교우들이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준비시켜 달라고 천주께 열심히 기도를 바쳤다. 일부 교우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릴 욕심에 불타기까지 했다. 남명혁ㆍ이광헌 등은 그해 5월 24일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1839년의 부활시기 50일은 이처럼 박해로 시작돼 박해로 막을 내렸다.

드러내놓고 떳떳하게 신앙살이를 할 수 없는 박해시대였기에 당시 신자들이 부활시기를 어떻게 살았는지 그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기록이 하나 남아 있다. 바로 「황사영 백서」다. 백서 8행에 보면, 경기도 여주 출신 이중배(마르티노) 순교자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는데, 그 중에 당시 신자들의 부활살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황사영 백서」 해제본에 나와 있다.
 
"1800년 경신년 부활 축일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 마을 교우들과 길가(두메산골의 작은 길)에 모여 앉아 큰 소리로 희락경(喜樂經, 부활삼종기도의 옛말)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나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날이 저물도록 계속하였습니다…."

소론 사대부 집안 첩의 자식, 곧 서얼이었던 이중배 순교자에 대한 부활시기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순전히 그의 성품에서 기인한다.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고 의지와 기개가 넘쳤던 그는 "열심이 불같이 뜨거웠고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대담하게 행동해 남들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백서가 전할 정도다. 그래선지 박해 우려에도 이중배 순교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노래하며' 예수 부활의 기쁨을 만끽했다. '기쁨의 때'를 그야말로 기쁘게 살아갔던 셈이다.
 
부활의 기쁨은 훗날 천주가사로 만들어져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 구전돼 오다가 19세기 말 무렵 기록되기 시작하는 '사향가(思鄕歌)' '삼덕가(三德歌)' '공심판가(公審判歌)' '충효가(忠孝歌)' '피악수선가(避惡修善歌)' 등 천주가사엔 부활 교리가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 겨레 노래이자 구약 시편에 버금가는 민족 시편 천주가사는 이처럼 부활의 기쁨도 노래로 승화시켰고, 신앙이 겨레 속으로 들불처럼 번져가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여진천 신부는 "현실적으로 박해시대였기에 드러내놓고 예수 부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겉으로 부활시기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박해시대 신자들은 이미 부활의 기쁨을 살고 있었기에 순교까지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평화신문, 2012년 4월 8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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