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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일제 강점기 도시 중심의 선교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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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28 ㅣ No.535

[교회 역사 여행] 일제 강점기 도시 중심의 선교 전략


일제에 의한 산림법과 연초전매제도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1920년대부터 도시로의 인구이동이 본격화되었다고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천주교 역시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지역의 중심지이자 인구가 집중된 도시야말로 최적의 선교 대상지로 부각되었다. 그 렇지만 산골짜기의 교우촌들에 남아 있던 신자들의 비율이 도시보다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일종의 양면작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즉 교회의 몸통은 산지의 교우촌에 두고서 그 머리는 도시를 향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이러한 선교전략이 수립되면서 도시에 성당과 공소들이 많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1927년도 보고서에서 당시 경주읍에 새로 신부를 파견하였을 때 사람들이 놀라워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000명이 넘는 교우들로 힘에 겨운 본당들이 여러 곳이나 있는데, 무슨 생각에서 고작 300명 정도의 교우가 모이게 될 지역에 본당을 설립한단 말입니까? 비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면 하는 희망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며, 또한 제가 성사를 베푼 그 조그마한 방안 성당(공소를 말함)이 정말 너무나도 비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성당을 건축하는 중입니다. 본인은 그곳에 간 젊은 신부에게도 회장(전교회장)을 한 사람 보내 주었습니다.”(“釜山敎區年報”, 1987, 151-152 인용)

위의 내용에 따르면, 선교사들과 산골짜기 교우촌 신자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개척지나 다름없는 도시보다 신자수가 훨씬 많았던 산골짜기의 신자들로서는 그렇지 않아도 신부가 부족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초임 신부를 도시로 파견한 주교의 처사에 대해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장차 도시가 선교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여러 상황들을 파악하고 있었던 주교는 이러한 신자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면서 선교거점을 도시에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가 선교전략의 중심지임을 분명하게 밝혀 놓은 것은 1927년과 1932년에 작성한 드망즈 주교의 보고서 기록에 잘 나타나며, 특히 한국인 성직자들이 적극적으로 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이가 많은 한국인 사제가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너무 수가 적습니다. 그들은 저희들보다 그들이 있음으로써 사업이 더 잘 되어 갈 수 있는 커다란 중심지에 있어야 합니다. 저희들은 더욱 수가 많아질 것입니다. 또한 저희 나라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책임을 떠맡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저희들입니다’라고 나에게 말해서 “한국인 신부들이 생각보다 선교회의 사명의식을 잘 따라주고 있다.”(“釜山敎區年報”, 1987, 152-153 인용)

“도시는 이제 관리의 영지가 아니며, 도시민의 정신 상태는 새로운 관심사에 대해서 매우 개방적입니다. 도시들은 이제 우리를 부르고 있으며, 우리가 가면 그 노력에 대해서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훌륭한 보답을 가져다줍니다. 불과 15년 전에 본인이 교우 2,000명 이상 되는 시골 본당의 분할과 골격만 갖춘 도시 본당의 창설, 둘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다면 주저없이 새 사제를 도시에 부임시키는 쪽을 택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본인은 주저하지 않고 새로 창설되는 골격뿐인 본당을 택할 것입니다”(“釜山敎區年報”, 1987, 207 인용)

그런데 도시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는 점은 큰 부담이었다. 당 시에 선교사들은 도시선교의 효율성이 높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도시의 토지 구입비가 비싸기 때문에 쉽게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1939년에 드망즈 주교를 뒤이은 무세제 르마노(Germain Mousset, 한국명 문제만 文濟萬, 1876~1957) 주교의 보고서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경험에 비추어 보아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 하는 선교의 효과가 매우 크므로, 몇몇 신부들은 보다 많은 비신자들과 접할 수 있도록 인구 밀집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충분한 근거가 있는 요청은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즉각 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도시에는 땅값이고 집값이고 몹시 비싸기 때문입니다”(“釜山敎區年報”, 1987, 276 인용)

전주교구의 경우, 이와 같은 도시중심의 선교전략에 따라 설립된 성당들로는 전동성당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산골짜기에 세워진 한옥성당들이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큰 도로 가까운 곳이나 읍내에 세워진 공소 및 성당들도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되 재성당에서 1929년 분리된 가사벌(금산군 진산면) 본당이 1935년에 금산읍으로 옮겨졌다거나, 역시 되재에서 1942년에 분리된 수청 본당이 1954년에 고산성당에 소속된 것 등이 대표적이다.

[2011년 6월 5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6-7면, 최진성(미카엘 솔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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