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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에서 배운다: 지리상의 발견과 선교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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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9-17 ㅣ No.546

[교회사에서 배운다] 지리상의 발견과 선교활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선교 교령 2항에 따르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은 바로 선교이다. 라틴어 동사 mittere에서 유래한 missio는 우선 파견(보냄)이라는 의미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는 성부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성자와 성령을 ‘파견(missio)’하심을 뜻하므로 삼위일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울러 성자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 세례를 주고 …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는 명령을 내리셨기에 교회는 선교(missio)를 자신의 본질로 이해해 왔다.

한편 역사적인 과정을 보면 선교의 과정이 반드시 일관되게 복음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교도의 개종’, ‘무지한 자들에 대한 종교교육’, ‘교회의 부식 (扶植)’ 등, 현대적 의미로 본다면 다소 부정적 의미의 용어들이 선교의 또 다른 말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교회의 상황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다. 이후 서로마는 황제가 거주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북쪽에서 이방민족들이 물밀듯이 내려와도 보호해 줄 군사력이 거의 부재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마침내 476년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되지만, 이방민족 가운데 하나인 프랑크족은 다양한 이방민족 중에서도 유일하게 로마 가톨릭교를 접하고 스스로 로마 교황의 군사적 후견인 노릇을 하게 된다.

한편 6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하여,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슬람교도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유럽은 십자군운동까지 벌이며 성지(聖地)를 회복하고 그들을 가톨릭교회로 개종시키고자 하지만, 결국 십자군운동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1300년대에 중세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Christendom)의 구심점이었던 교회의 힘은 약화되기 시작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스도교화와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

그러나 당시까지 이슬람 세력 아래 있던 이베리아 반도의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 718-1492년)은 침체되어 있던 가톨릭교회와 교황권에 새로운 활로를 제공하게 된다.

이베리아 반도를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서 구해낸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른바 신생국가로 당시 기득권 국가간 무역의 중심지였던 지중해로 바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이에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은 대서양쪽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는 향후 ‘대항해시대’라고 일컫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보호권(宣敎保護權, Patronage)

15세기에 접어들어 교회의 영향력은 더욱 축소되고,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라 할 수 있는 선교 역시 이슬람 세력에 막혀 더 이상 수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십자군운동 이후 차츰 각국은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고,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기는 하지만 왕이 다스리는 영토의 모든 교회는 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국가교회주의’가 교황청의 골칫거리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대륙 발견은 교회로서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교황청은 이들의 항해에 선교사들을 함께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에게 보급물자를 수송
하고 그들의 신변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다.

다행히도 탐험시대를 주도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왕들은 탐험을 통해 가톨릭의 전파에도 힘쓰고자 하는 열의가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선교보호권’을 주어 신대륙에서의 무역 독점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식민지에서의 선교활동의 의무를 부여하였다.

이렇게 선교의 한 방편으로써 유럽을 넘어 신대륙과 다른 곳에도 가톨릭을 전파하게 되었다. 국가가 교회의 선교를 지원한다는 뜻에서 ‘국가의 교회선교 후원’이라고도 하는 선교보호권은, 이러한 의미에서 교황청이 왕에게 위임하는 일종의 교회법적인 특전이었다.


선교보호권의 실행 과정

1455년 니콜라오 5세 교황은 아프리카 선교를 지원하고자 회칙 「로마 교황(Romanus Pontifex)」을 통해서 아프리카 서해안 지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우선적인 탐험권과 평화적인 점유권을 승인하여 일종의 보호권을 부여하였다.

이후 갈리스토 3세 교황은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복음화를 시작하면서 책임자인 왕이나 왕족에게 식민지에 성당을 건설하는 동시에, 선교사들의 신변안전과 생계유지를 보장할 의무와 교회 감독권을 부여하였다.

1492년 후발주자인 스페인에서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하고 돌아오자, 스페인 왕실은 알렉산데르 6세 교황에게 포르투갈과 같은 보호권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신대륙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몇 차례 충돌을 하게 되고, 1494년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 두 나라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유럽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에게, 브라질을 제외한 서쪽은 스페인에게 특권을 재조정하였다(스페인의 보호권 -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등 ; 포르투갈의 보호권 - 브라질, 콩고, 인도, 중국, 인도차이나 등).


선교보호권의 문제점

산업혁명 이전의 중상주의적(상업) 자본주의와 결합된 이러한 교회의 선교는,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국가의 군사적 정복을 정당화시켜 주는 동기를 제공하였으며,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선교보호권을 통해 의무보다 권리를 내세워 점령지역을 유럽 문화에 동화시키거나, 자국의 영토로 합병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선교지 교회에 대한 교황의 요구는 국가의 이해에 따라 묵살되기 일쑤였다.

또한 준비되지 못했던 선교사들의 모습은 때때로 강압적이었고, 선교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토착민들을 ‘Tabula rasa(백지 상태)’로 인지하며 그들의 문화와 관습들을 미개하다고 판단하여 파괴하곤 하였다.


포교성성의 설립

이러한 상황에서 17세기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해상을 장악하여 식민지를 빼앗게 되자, 선교지 교회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동시에 수도원끼리의 갈등도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는 향후 중국에서 일어난 의례논쟁으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그리스도교와 기존 문화의 조화와 적응을 위해 노력하는) 적응주의 선교를 하고 있던 예수회와 (제사, 공자 숭배를 미신으로 여겼던) 엄격주의를 주장하던 후발주자 도미니코회 사이의 갈등과 알력도 선교지에서의 큰 문젯거리였다. 이 때문에 교황의 직할체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선교 정책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622년 1월 6일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은 헌장 In Scrutabili를 통하여 교황청의 상설기구로 포교성성(布敎聖省, 현 인류복음화성)을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 교황청은 선교보호권이 야기한 폐해를 극복하고, 선교 문제로 국가와 결탁한 수도회 간의 갈등을 해소하며, 또한 교황을 중심으로 전(全)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현지인 교구 사제들을 양성하여 선교활동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선교보호권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보호권에서 독립된 명의주교나 교황 대리 감목을 파견하여 선교사업을 직접 관할하는 감목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선교의 일관성을 추구하였다.

십자군운동이 한창이던 시대, 거의 모든 서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 세력을 성지를 약탈한 원수이자 싸워서 몰아내야 할 적으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

무력으로라도 성지를 되찾으려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십자군을 따라 그 역시 1219년 이집트에 갔지만, 성인은 이슬람교도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한 명의 사람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감화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 하였다. 그 결과 8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성지는 이슬람교와 큰 마찰 없이 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관리하고 사목해 오고 있다.

‘테러’(Jihad, 聖戰)라는 용어가 난무하는 현대에 이러한 성인의 모습은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우선 진정성과 순수함도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선교의 한 요소일 것이다. 아울러 종교라는 차원에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면도 이야기해 볼 수 있음직하다.

모든 종교가 하나로 일치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면, 종교가 서로 만나 대화하고 일치를 도모하는 자리는 바로 인간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모상”(顯現, 창세 1,26)에 대한 존중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마음자세여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협력해 나가야 할 형제요 자매로서 말이다.

* 최용감 안젤로 - 광주대교구 신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9월호, 최용감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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