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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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의왕비 김 마리아 영세사진을 통해 본 박해자 후손 입교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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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14 ㅣ No.550

의왕비 김 마리아 영세사진을 통해 본 박해자 후손 입교사연

"박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천주교 귀의"


- 병인박해를 일으킨 흥선대원군의 손자며느리이자 의왕의 비(妃)인 김덕수 마리아의 영세 기념사진. 의왕과 의왕비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에 있다. 작은 사진은 서울 가회동본당 의왕비 세례대장.
 

나이 일흔을 수월찮이 넘겼을 듯한 할머니가 카메라 앞에서 살포시 미소 짓는다. 단아하면서도 꼿꼿한 자태와 뭔가 흡족한 표정을 짓는 얼굴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실장갑 낀 손으로 술 달린 지팡이를 쥔 모습이 여염(閭閻)집 노인네 같지는 않다.

부산 오륜대순교자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황가(皇家)의 기품-천주교와 황가의 만남' 특별전에 공개된 사진이다. 사진에는 '의친왕비 김 마리아(金德修 마마) 영세기념-서울 가회동성당'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박해자의 후손 줄줄이 입교

김덕수 마리아는 조선조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왕(본명 李堈)의 부인으로, 1955년 8월 14일 가회동성당에서 세례(세례대장에는 金淑으로 표기)를 받았다. 남편 의왕은 이보다 닷새 앞선 8월 9일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한 것으로 세례대장에 기록돼 있다.

이 왕족의 영세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다. 천주교의 싹을 말려버리겠다고 작정하고 병인박해(1866년)를 일으켜 수많은 천주교인을 죽인 장본인이 의왕의 조부, 즉 흥선대원군(李昰應, 1822~1898)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직계상 흥선대원군→고종→의왕으로 내려간다.

의왕은 영세 직전에 윤형중 신부에게 "할아버지가 천주교인들을 많이 잡아다 죽였으니 내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천주교에 귀의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더 흥미로운 것은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여흥부대부인)도 훨씬 앞선 1896년 남편 몰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몰락해가는 왕족에서, 그것도 천주교를 가장 혹독하게 탄압한 흥선대원군의 부인과 손자ㆍ손자며느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면서 하느님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내막은 이렇다.

어린 고종을 앞세운 흥선대원군은 유학의 한 줄기인 성리학을 기초로 삼아야 왕권을 강화하고 혼란한 정세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 문제가 많은 서원을 철폐하려면 먼저 양반사회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서학(西學)을 정리해야 했다. 그는 3년 남짓한 박해 기간에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해 많은 천주교인을 희생시켰다. 하지만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그의 세도는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박해가 끝난 이후 흥선대원군 부인 민씨는 천주교인 궁녀들을 통해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와 여러 차례 접촉했다. 아들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1868년 순교) 영향으로 박해 이전부터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민씨는 천주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더니 이윽고 뮈텔 주교에게 세례받기를 청했다.
 
뮈텔 주교는 자신의 일기장에 민씨 세례를 이렇게 기록했다.

"1896년 10월 11일 왕의 어머니가 세례를 청해왔다. 합의한 대로 나는 저녁 7시에 조 회장과 함께 출발, 대원군 궁궐 하녀인 이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15분이 지나자 왕의 어머니가 가마를 빌려 타고 비밀리에 그곳에 당도했다.(…) 부인은 나에게밖에 희망을 둘 곳이 없다고 하며(…) 나는 그녀에게 우리의 첫째요 유일한 의탁처는 오직 천주님뿐이라고 말했다. 또 고령(79살)이고 궁궐에서 나오기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견진성사까지 받도록 권고했다.(…)"

민씨 세례명은 마리아이고, 영세 대모는 박해 기간에 순교한 박 마르타의 딸 원 수산나였다. 민씨 영세 사실은 극소수만 알고 있었다. 아들 고종과 남편 대원군조차 민 마리아가 선종한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박해와 화해의 중심에 선 조선 황실
 
의왕과 의왕비는 방유룡 신부와 윤형중 신부, 장면 박사 등을 통해 입교했다. 방 신부는 가회동본당 2대 주임이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설립자이고, 윤 신부는 당시 사회 지도층 입교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들이 의왕비가 거처하던 안국동 별궁과 지척인 가회동성당에서 상궁 이 우술라를 비롯한 궁녀들과 자주 만났기에 의왕 내외는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우술라는 윤병현 수녀와 홍은순 수녀가 박해시대 유물을 수집할 때, 의왕비가 왕실 유물을 기증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 오륜대순교자박물관이 교회역사 박물관임에도 국내에 유일한 원유관(遠遊冠)을 비롯해 왕실 유물을 많이 소장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원유관은 대한제국 선포 후인 1900년 의왕이 왕으로 책봉될 때 머리에 썼던 관모다.
 
박물관 관장 배선영(노엘라) 수녀는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돼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수많은 박해와 고난이 있었고, 또 그 박해와 화해의 중심에 조선 황실이 있어 이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에 왕실 유물 70여 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31일까지. 전시 문의: 051-583-2923
 
[평화신문, 2012년 10월 14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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