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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6: 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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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8 ㅣ No.667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6) 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④


톨레도 감옥에서 영혼의 ‘어두운 밤’ 체험



납치되어 톨레도 수도원 감옥으로 이송되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72년부터 1577년까지 아빌라의 강생 수녀원 지도신부로서 수녀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개혁 가르멜 수사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개혁 가르멜 운동에 탄력이 붙자 이를 두려워한 기존의 원 가르멜 수사들은, 맨발 가르멜 운동의 정신적인 지도자 격인 십자가의 성 요한을 납치해서 회유한다면 개혁 운동의 기가 완전히 꺾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1577년 12월 2일 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강생 수녀원 근처의 작은 집에서 끝기도를 바치고 있을 때 성인을 납치했습니다.

납치된 다음 날, 성인은 톨레도의 가르멜 수도원으로 이송되어 수도원의 쪽방에서 감금된 채 8개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당시 성인은 원 가르멜 수사들로부터 갖은 협박과 회유, 인격 모독을 받으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성인이 옥살이했던 방은 폭이 2m, 길이가 3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방인 데다가 창문도 없어 빛이 전혀 들어올 수 없는 구조에 견고한 나무문으로 닫혀 옴짝달싹할 수 없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침대처럼 쓰도록 갖다 둔 나무 널빤지 두어 장과 낡은 담요 한두 장 그리고 변기로 사용한 통이 전부였습니다.

이 어둡고 냄새나는 방에서 성인은 인생 최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성인에게 주어지는 음식은 아주 조금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수사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였다고 합니다. 또한, 매주 금요일이면 성인은 식당에 끌려가 식당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약간의 빵과 물만 먹어야 했으며 식사가 끝나면 원장 신부의 인격 모독 발언을 수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원장 신부의 야단이 끝나면 모든 수사는 시편 50편을 읊조리며 차례로 성인을 채찍질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직접 그린 '가르멜 산 등반 여정'


영혼의 어두운 밤을 체험하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때부터는 뇌물과 명예를 약속하며 끊임없이 성인을 회유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인이 맨발 가르멜 운동을 포기한다면, 원장 자리를 약속한다거나 금으로 된 십자가를 주겠다며 성인을 꼬드겼다고 합니다.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 열악한 환경, 빈약한 식사 등으로 인해 성인은 이질을 비롯해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해야 했습니다. 성인은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심지어 목숨의 위협까지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하느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거둬 가시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런 물음이 성인의 마음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주어지는 것일까?”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다는 말인가?” “혹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이러는 가운데 성인은 그간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는 체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체험, 자기 나약함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암흑의 고통 속에서 성인은 점차 정화되어 갔고 하느님의 부재(不在) 속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빛나는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성인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기에 이릅니다.


톨레도 감옥에서의 탈출

당시 성인은 옥살이를 하며 알게 된 마음씨 좋은 간수 수사로부터 필기도구와 종이를 얻어 주옥같은 이 체험을 시로 써내려갔습니다. 이 재료는 훗날 영성사에 길이 남을 명작인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의 모티브가 됐습니다. 이렇듯 톨레도에서의 어두운 밤 체험은 성인의 인생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곳에서 옥살이하며 갖은 고생을 하던 성인은 1578년 성모 승천 대축일 밤에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몰래 만든 밧줄을 타고 창문으로 내려가 수도원과 톨레도 성벽이 이어진 높은 담벼락을 따라 간신히 탈출했습니다. 그 후 성인은 성녀 데레사가 창립한 톨레도 맨발 가르멜 수녀원에 잠시 피신해 있다가 스페인의 남부인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또 다른 박해가 있을 것을 염려한 맨발 가르멜 회원들이 성인을 남부 지방으로 피신시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갈바리오 수도원 시절

이렇게 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스페인 남동부 지방의 갈바리오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신설된 수도원의 원장으로 발령을 받아 가게 됩니다. 성인은 그곳에서 수도 생활을 하며 주말에는 그곳에서 가까운 베아스의 가르멜 수녀원을 방문해서 수녀님들을 위해 미사도 봉헌하고 고해성사도 주며 영적 지도도 했습니다. 그리고 수녀님들의 끈질긴 청원에 못 이겨서 성인은 톨레도 감옥에서 지었던 시들에 대한 해설서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영혼의 노래」라는 책입니다.

또 성인은 그곳 수녀님들을 위해 「영적 권고」도 썼습니다. 그리고 완덕을 상징하는 가르멜 산의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유명한 ‘가르멜 산 그림’도 그때 그려서 베아스 수녀님들에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성 요한의 영적 가르침 전체를 집약하는 상징적인 그림으로서 성인의 영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17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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