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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정베드로 · 서태순 베드로 · 김홍범 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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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약전 정베드로 · 서태순 베드로 · 김홍범 요한
정베드로(?~1867)
정베드로는 경기도 이천 단내(현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단천리) 출신으로 재종조부(할아버지의 사촌 형제)인 정은(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1866년 12월 19일 광주 포졸들이 단내를 덮쳤을 때 그는 옷을 잡고 매달리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자수했다. 재종조부 정은과 함께 광주 관아로 압송된 정 베드로는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했다.
정베드로는 정은과 함께 1867년 1월 13일 남한산성 형장에서 얼굴에 물을 뿜고 한지를 그 위에 붙여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형으로 순교했다.
서태순(베드로, 1823~1867)
서태순은 충청도 청풍에서 서처보의 3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66년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한 서익순(요한)이 그의 형이다.
서태순은 김데레사와 혼인한 후 충주 장호원에 살다가 대구로 이주했다. 그는 경신박해(1859~1860년) 때 체포돼 대구 진영에서 팔다리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기까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고 6개월간 옥살이를 하다 배교하고 석방됐다.
서태순은 이후 여러 해 동안 냉담 상태로 지내면서 교회를 멀리하다 회개하고 다시 신앙생활을 했다. 이때부터 그는 ‘다시 체포된다면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겠다’는 원의를 다지곤 했다.
신앙을 회복한 서태순은 대구를 떠나 문경 한실(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 교우촌으로 이주해 신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러다 그는 1867년 1월 18일 교우촌 신자들과 함께 체포돼 문경 관아를 거처 상주 진영으로 압송됐다. 이곳에서 그의 아내 김데레사는 임신했다는 이유로, 또 아들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석방됐다.
반면, 서태순은 세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 다음 함께 투옥되었던 김아우구스티노, 서유형(바오로), 박루치아 등과 함께 1867년 1월 23~24일 다시 한 차례 매를 맞고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김홍범(요한, 1822~1867)
김홍범은 서울 출신으로 어려서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착하고 후덕하며 착실했다. 17세 때 김씨와 혼인해 두 아들을 두었으나 상처하고, 25세 무렵 김아기(마리아)와 재혼했다. 김아기는 1870년 좌포도청에서 순교했다.
김홍범은 서울 장동(현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3가)에서 살면서 대궐 문기수로 일했다. 김홍범은 1849년 정의배(마르코) 회장을 만난 다음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그는 베르뇌 주교에게 성사를 받고 자신의 집에 공소를 차려 많은 신자가 주교에게 성사를 받도록 했고, 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노력했다.
그는 또 1866년 순교한 베르뇌 주교의 시신을 안정하는 데 참여했고, 교우들을 구하려는 생각에서 방물장수 신자를 시켜 “양민을 잘못 체포하고 있다”는 말을 사방에 퍼뜨리도록 했다. 그리고 1867년에는 교우들이 도움을 청하려 중국으로 배를 보낼 때 700냥의 돈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같은 활동으로 김홍범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됐고, 그로 인해 그는 1867년 2월 자신의 집에서 체포돼 우포도청으로 압송됐다. 이때 친구로 지내던 포교와 문기수들이 여러 차례 그를 찾아와 “배교하고 자식과 집안을 보존하라”고 회유했지만, 그는 “말씀은 고맙지만, 나는 이미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니 다시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오”라며 자신의 결심을 드러냈다.
김홍범은 배교를 강권하며 혹독한 형벌이 계속 가해지자 중국으로 배를 보낸 일을 발설할까 봐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김홍범은 1867년 4월 12일 우포도청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1월 17일, 리길재 기자] 0 1,24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