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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 103위 시성과 한국교회4: 증거자 최양업 신부와 124위 시복시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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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5 ㅣ No.643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 - 103위 시성과 한국교회] (4 · 끝) 증거자 최양업 신부와 124위 시복시성운동


‘103위의 뿌리’ 시복시성 추진 마땅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조사단이 2006년 2월 경남 김해시 진례면 다곡리 마을 뒷산에 위치한 박대식 순교자 묘역을 현장조사하고 있다.

 

 

‘증거자 최양업 신부와 124위 시복시성’은 103위 시성 25주년이 남긴 가장 가시적인 과제다. 1984년 5월 20일자 가톨릭신문을 보면 김남수 주교(당시 200주년 기념위원회 위원장)는 ‘시성식 후 우리들의 자세’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또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103위 성인들에 앞서 이 땅에 교회를 창립하셨던 분들의 시복시성 추진일 것이다. 성인들을 공경하며 그분들의 도우심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생활이 창립 성현들의 시복운동과 직결된다면 창립 성현들의 시복시성도 우리의 기대보다 훨씬 빠르게 이뤄질 줄로 믿는다.”

 

 

‘시복시성’이라는 과제

 

김남수 주교의 말대로 1984년 시성된 103위는 모두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 박해 때 숨진 순교자들이다. 103위 순교자 이전 순교자 즉, 신해(1791)와 신유박해(1801) 순교자들은 아직 시복되지 못한 것이다. 교회사 관계자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복자가 못 된 상황에서 아들과 손자들의 시성이 먼저 이뤄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김진소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는 이러한 상황의 원인을 1831년 조선교구 설정과 함께 프랑스 교회 통치 아래 놓였던 한국교회사에서 찾는다.

 

그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순교자들 중 프랑스 선교사들이 포함됐으므로 프랑스 교회에서 시복운동을 추진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를 통치하게 된 1831년 이전 초기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운동은 한국 교회의 과제로 남겨졌다”고 말했다.

 

이번 시복시성 절차를 밟고 있는 124위는 1791년 신해박해 3위, 1795년 을묘박해 3위, 1797년 정사박해 8위, 1801년 신유박해 53위, 1814년 1위, 1815년 을해박해 12위, 1819년 2위, 1827년 정해박해 4위, 1839년 기해박해 18위, 1866년~1868년 병인-무진박해 19위, 1888년 1위로 대부분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이다.

 

2006년 5월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오른쪽에서 네번째)를 비롯한 청주교구 관계자와 조사단이 현장조사를 벌이고 있다.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위원들은 장기대와 청주 병영, 청주 진영 등을 살펴봤다.

 

 

이 가운데는 103위 성인들과 가족관계를 이루고 있는 경우도 있다. 124위 가운데 포함된 정약종은 기해박해 때 순교한 유조이의 남편이며 정하상과 정정혜, 정철상 성인의 아버지다. 정철상 성인의 장인은 124위 중 한 위인 홍교만이며 그의 아들 홍인도 124위 시복시성 대상 중 하나다.

 

현계흠 순교자도 현석문과 현경련 성인의 아버지다. 또 김진후와 김종한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와 작은 할아버지며, 최경환 성인의 아내이자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또한 시복시성 대상자에 올라있다.

 

한국 교회의 103위 시성은 25년이 지난 지금, 이전 순교자들인 124위 시복시성에 이 같은 당위성을 부여한다.

 

김남수 주교는 ‘시성식 후 우리들의 자세’에서 “창립 성현들의 시복운동은 103위 시성과 직결돼 추진해야 마땅하다”며 “성인이 되신 후손들의 전구로써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시복시성이 더욱 쉽게 성취되겠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시복시성 추진 어디까지 왔나

 

주교회의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와 각 교구에 의해 진행됐던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노력은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서 ‘통합 추진’이 결정되며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후 2001년 3월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는 시복시성 통합 추진의 청구인(추진 주체)을 ‘주교회의’로 명시하고 담당 주교에 마산교구장 박정일 주교를 선출했다. 같은 해 10월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하느님의 종’ 선정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2002년 제1차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 124명 확정과 신학위원, 역사위원 등이 임명됐으며 2003년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한글 약전이 발간된다.

 

2003년 10월 124위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심사에 대해 시성성으로부터 ‘장애없음’을 통보받은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는 재판부를 구성한다. 2004년 시복 법정이 열리고 그해 9월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한 청원인이 결정됐다.

 

지속적인 시복 재판과 함께 2005년 시복 자료집이 발간됐으며 2006년 2~8월 현장조사를 마치고 시복 조사 회기 문서를 정리, 2009년 5월 20일 ‘증거자 최양업 신부와 124위’ 시복 자료를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한 상태다. [가톨릭신문, 2009년 5월 24일, 오혜민 기자]

 

 

시복시성 검찰관 박동균 신부 - “순교영성에 대한 지침 필요”

 

 

“우리들 의식 속에 124위 시복시성 대상자들은 이미 성인이었죠. 정약종, 강완숙 모두 순교영성으로 이름나신 분들 아닙니까. 그런 분들의 시복시성을 위해 이제야 절차를 밟는다는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시복시성 검찰관 박동균 신부(서울 반포4동본당 주임)는 한국 교회가 1984년 있었던 103위 시성의 열기를 제대로 이어오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한국 교회에 103위 성인이 있다는 것에 대한 자만에 그치지 않았는가’하는 자조다.

 

하지만 5월 20일, 여러 노력 끝에 ‘증거자 최양업 신부와 124위’ 시복시성을 위한 자료가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됐고, 성인을 위한 기다림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그는 이번 시복시성운동에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 한국 교회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염원하며 우리의 뿌리를 잊지 않고 찾아간다는 의미와 ▲ 한국 교회 스스로 처음 시복시성을 위한 준비와 절차를 밟아간다는 점이다.

 

“이번 시복시성운동은 한국 교회의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우리 스스로 순교조상들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과제를 안을 수 있게 된 것이죠. 병인박해 이후 일제시대, 6·25에까지 이르는 순교자들을 찾아내는 것도 교회의 몫입니다.”

 

그는 신자들이 ‘순교영성’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화된 순교영성이 필요하다고도 지적했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일이 없는 현대사회에서도 지켜나갈 수 있는 순교영성에 대한 지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103위 시성 25주년의 열기를 지속적인 시복시성운동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처럼 천주교가 들어오며 극심한 문화 충돌을 겪은 나라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 신앙선조들은 엄격했어요. 목숨을 내놓을 만큼 교리를 그대로 따르고 ‘재’도 확실히 지켰지요. 아주 철저하게 신앙윤리를 지켜나갔던 거예요.”

 

그는 선조들이 지켰던 그 생활이야말로 현대인들이 지켜나갈 수 있는 ‘순교영성’이라고 했다. 우리도 세속화, 현대화 등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선조들의 삶을 비춰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 선조들은 처음 신앙을 ‘학문’으로 받아들였지만 결코 머리로 끝내지 않았어요. 103위 시성 당시만 해도 많은 가정이 아침, 저녁기도를 함께 했습니다. 요즘은 그런 가정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초기 순교자들이 머리와 몸으로 실천했던 신앙을 다시 되살려야 할 때가 아닐까요?” [가톨릭신문, 2009년 5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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