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 신유박해 순교 신앙의 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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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2 ㅣ No.680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보내며] 신유박해 순교 신앙의 뿌리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이 저물어간다. 한 해 동안 순교자 현양대회가 여러 곳에서 열렸고, 시성 시복을 위한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 이 한 해를 보내며 나는 “지금도 순교 신앙이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이 짧은 글의 화두로 삼고자 한다.

 

현대의 물질문명은 인간의 생활을 무척 풍족하고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 반면에 우리의 정신생활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이제 순교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피를 흘려 죽음으로써 하느님과 그 진리를 증거하였다는 순교에 지나치리만큼 매여있다.

 

순교는 신앙의 극단적인 표현이다. 순교 신앙은 그 시대 공동체의 신앙이었다. 따라서 그 시대 공동체가 이루어놓은 신앙의 뿌리가 무엇인지 먼저 찾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각자는 그 뿌리를 자기 생활에 옮겨 자기 분수에 맞도록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이 지녔던 신앙의 뿌리들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자.

 

 

영혼을 가진 인간은 하느님처럼 존귀하다

 

당시 민중들은 신분제도에 따른 절망과 고통으로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삶의 뜻을 잃고 있었다. 바로 그들에게 천주교는 인간의 존엄함을 가르쳤다. 더구나 신도들은 성체성사가 그리스도와 자신의 몸이 접목한 사실을 알고, 인간의 고귀함을 몸으로 깨달았다. 잡초 같은 삶을 살아가던 신도들은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그저 신바람이 났다. 신분제도에 빼앗겼던 신도들의 풀뿌리에 생명이 부활하고, 훈훈한 사랑에 삶의 맥박이 다시 뛰었다. 자긍심과 자존심 그리고 자애심을 마음에 다졌다.

 

비록 제도가 인간의 존엄함과 평등을 보장하지 않는다 해도 신앙 공동체에서나마 그것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 것으로 족했다. 그들은 정신이 육체를 이긴 사람들이었다. 정신이 사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신분제도의 질곡에서 해방되고, 한이 풀리며 신명이 났다. 그래서 천주교는 신명나는 공동체였다.

 

 

하느님은 늘 나와 함께 계신다 - 효 사상

 

우리 신앙 선조들은 조선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 덕목인 효(孝)를 확대하여 하느님을 인식했다. 신도들은 하느님을 정서적으로 표현할 때는 ‘부모’로, 사회적으로 표현할 경우에는 가부장제도의 권위를 빌려 ‘아버지’라고 불렀다. 하느님을 맨 처음 ‘대부모(大父母)’라고 부른 사람은 1791년에 순교한 윤지충이었다. 그 뒤로 조선 신도들에게 하느님 이름은 대부모였다. 1801년 경상도 흥해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최해두는 그의 ‘자책’이라는 참회의 글에서 하느님을 “우리 대부모요 우리는 주님의 대식(大息, 큰 자식)”이라고 했다.

 

부모에 대한 우리 나라 사람의 정서는 예나 지금이나 ‘자식과 늘 함께 계신 분’ 이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부모는 자식보다 늘 한걸음 앞서 사랑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식을 걱정하고, 자식 위하는 일이라면 어떤 수고와 갖은 희생도 아끼지 않는다. 하느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정약종은 “주교요지”에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자식의 출생을 준비하는 부모의 마음에 비유하며 “천주께서 우리 사람을 사랑하심이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과 같다.”고 했다. 윤지충은 배교를 강요하는 공권력에게 “만약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곧 부모님)를 배반하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러한 마음은 신도들에게서 공통된 것이었다. 신도들은 십계명을 폭군의 명령이 아니라 부모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부모, 이웃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을 법정에서까지 부끄러워했다. 윤지충은 법정에서 “하느님을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공경하고 높이는 뜻이 못됩니다.”고 했다. 그는 배교를 마지막 불효로 단정했던 것이다.

 

 

신바람 나는 형제적 사랑의 공동체

 

우리네 인생을 지탱하는 힘은 희망과 사랑, 그리고 연대감이라고들 한다. 교우들은 신분을 초월하여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으로 완전히 맺어진 형제 자매였다. 신도들은 신분을 초월하여 모두가 한 형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느님을 형제라 부를 수 있다니 그저 살맛이 났다. 신바람은 맺힌 것이 풀렸을 때 생기는 성취감과 해방감에서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는 자기 결단 의식이다.

 

하느님을 부모로 모시게 된 것, 하느님처럼 존귀한 존재가 된 것,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의 여한이 없었다. 이러한 의식이 확고하게 머무는 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정 출신 황일광은, 자신을 구원해 주고, 인간의 존엄함이 지켜지고, 서로가 천사처럼 존경하고 형제애를 실천하고 있는 신앙 공동체를 천국으로 여겼다.

 

신도들에게 신바람을 일으키지 못하는 신앙은 생명력이 없다. 공권력도 신바람과 사는 보람을 누리고 있는 신도들의 의지를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었다. 고통도 형벌도 죽음도 신바람과 사는 보람에 흥이 난 그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순교자들은 고통과 죽음을 하느님 나라에 새로 태어나는 산고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신도들은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하느님과 같이하려고 복음을 통째로 외우며 복음이 권고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피를 흘려 죽은 순교자의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찾고 삶의 가치를 발견하려고 하는가?

 

티베트 사람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강조했다. “죽음을 생각하고 줄곧 죽음을 의식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온전히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달라이 라마가 말하는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람을 항상 번민에 빠지게 하는 집착, 소유욕, 이기심의 환상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신유박해의 순교자 정약종은 법정에서 말했다. “사람이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의(義)를 배반하고 사는 것은 천지의 죄인이라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합니다.”

 

그래서 선조들은 죄를 극복하며 불멸로 가는 길을 묵상하고 실천하고자 “칠극”(七克,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소속 판토하 신부가 쓴 “칠극대전”의 약칭으로,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을 다루고 있다.)을 아리랑처럼 노래하며 수양했다.

 

물은 고여있으면 썩지만 땅속에 스며들어 다시 나올 때는 생수가 된다. 그렇다. 우리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삶 구석구석에서 그 생수를, 바로 생명수를 퍼담을 수 있다.

 

*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천주교 호남교회사 연구소 소장으로 교회사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1년 12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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