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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2014년엔 간절함을 회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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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4 ㅣ No.325

[레지오 영성] 2014년엔 간절함을 회복하자!



2014년 새해를 맞이하며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2)라는 시편의 노래가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새해노래가 되길 희망해 본다. 2014년 인사를 이렇게 하는 이유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마음의 ‘간절함’을 되살리겠다는 의지만 가진다면 한국 레지오 마리애가 오늘날 어려워진 사목현실을 극복하는데 아주 큰 공헌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 때문이다.

“우리를 삶으로 치달리게 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우리들 영혼 속에 불타고 있는 영원한 ‘갈증’임을.”(김화영, 행복의 충격, 91쪽).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선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아버지의 뜻을 향한 그 갈증과 그 간절함을 되살려내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이 예수님께서 지상 전 생애를 통하여 추구하신 “의로움”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


우리의 ‘인생여정’은 ‘신앙여정’이어야


2013년 ‘신앙의 해’ 동안 우리는 ‘새로운 복음화’를 기치로 내세우며 약화된 신앙을 회복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2014년 출발선에서 다시 새롭게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며 과연 우리의 신앙이 얼마만큼 회복되었는지를 반추해보게 된다. 신앙의 회복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모든 의로움”을 이루는 것인데, 그 결실은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우리 안에 “아버지의 뜻”을 향한 ‘갈증’과 ‘간절함’이라도 있었던가를 반문해보게 된다. 단언컨대 “아버지의 뜻”에 대한 ‘갈증’과 ‘간절함’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신앙회복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의 생활은 물질적으로 과하게 풍요롭기 때문에 거기엔 ‘갈증’과 ‘간절함’이 자꾸만 상실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격언 옆에 “과함은 간절함을 잃게 한다”는 해석을 토로 달아보았다.

예를 들면 사진기가 귀하던 시절 암막을 덮어쓰고 시골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찍던 사진사는 졸업생들이 평생 추억하며 간직할 졸업사진을 찍겠다는 ‘정성스런(간절한)’ 마음가짐을 지녔었다. 하지만 요즘엔 동네 한 바퀴 돌면서도 휴대폰으로 화질 좋은 사진을 얼마든지 찍을 수가 있다. 거기엔 “아, 좋다!”는 순간적인 감동은 있지만, 조금 지나면 언제 사진을 찍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카메라 렌즈를 통하여 들어오는 바로 그 사물 안으로 푹 빠져들고자 하는 그 간절함이 거기엔 없다.


1년이 약간 넘는 기간 동안 “신앙의 해”를 보냈다. 하지만 “신앙의 해”는 단 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순례하는 이 세상 여정 전체이어야 한다. 그래서 전임교황이신 베네딕도 16세께서 “신앙의 해”를 선포하시면서 “신앙여정의 재발견의 필요성”(『믿음의 문』 2항)을 강조하셨다. 우리의 ‘인생여정’은 ‘신앙여정’이어야 하고, 우리의 인생여정 안에 주님께서 동행하실 때 인생여정은 신앙여정으로 승화된다.

이를 위해서 신앙인이 하느님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신앙 여정의 재발견의 필요성”을 깨닫는 깨달음이 크면 클수록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을 향한 갈증과 간절함을 더욱 많이 느끼게 되어 있다.


성숙한 신앙 원한다면 하느님을 바라보는데 몰입해야

안셀모 성인께서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을 찍는 사진사라면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세세히 바라보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커질수록 우리의 신앙은 더욱 돈독히 성장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도 “이해하기 위해 믿고, 믿기 위해 이해한다”라고 하셨다.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을 믿는 믿음이 커질수록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도 커지고, 하느님을 이해하는 이해가 커질수록 우리 믿음도 커진다는 말씀이다.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 “추구한다”라는 단어 옆에 “간절하다” “몰입하다”라는 해석을 덧붙이고 싶다. 사실 ‘추구하다’의 내용물은 ‘간절히 원하다’이고 ‘간절히 원하다’는 우리를 그것에로 ‘몰입하게’ 만든다.

성숙한 신앙을 간절히 원한다면 하느님을 바라보고 이해하는데 몰입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의 회복’을 위해선 ‘간절함의 회복’이 먼저라는 확신은 논리의 올바른 전개라 여겨진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듣다”는 ‘마음을 다하여 귀를 기울이다’이고, 이는 간절한 마음가짐이다.


다시 한 번 결론을 내려 보자. 신앙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모든 의로움”을 이루는 것이고, 신앙은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는 ‘간절함’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선 “너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 15-16)라 하셨나 보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2).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1월호,
하성호 요한(신부, 대구대교구 1대리구 주교대리, 대구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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