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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에 나타난 이냐시오의 영적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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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121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에 나타난 이냐시오의 영적 세계관

 

 

I. 들어가는 말

 

<영신수련>의 내적 기원으로서의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을 살펴보면 그의 회심 체험은 그리스도교적 구원 체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음을 보여주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체험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이냐시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투신으로 발전해갔음을 보여준다. <영신수련>에 관한 연구를 이러한 관점에서 전개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만나는 하느님의 체험이 어떻게 피정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헌신하도록 이끄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즉 구원 체험의 원형으로서의 회심 체험이 지니는 역동성을 <영신수련>의 체험적 구조를 통해 밝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영신수련> 피정에는 고유한 역동적인 흐름이 있어 한 단계에서 또 다른 단계로 전개되는 영적 체험의 연속성이 고유하게 펼쳐진다. 이러한 연속성이 형성하는 역동적 구조는 구원의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동일한 은혜의 역동성이기에, 이 <영신수련> 피정에서 핵심적인 지표는 물론 성서적 구원 체험이다.

 

한편 <영신수련>을 이끄는 지도자는 피정자의 영적 체험을 깊이 이해해서 그가 놓여진 상황에 맞게 필요한 영적 지도를 베풀고 묵상을 이끌어 주어야 하기에, <영신수련>에 담긴 역동적 구조에 대해 이론적으로 뿐 아니라 체험적으로도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그 자신이 영성생활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더불어 영적 체험의 다양성에 대하여 깊은 인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영성생활 혹은 영적 체험에 대한 인식은 영혼 안에서 활동하시고 일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친밀하고도 민감한 감응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활동하도록 배려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진지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진지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랑에 담긴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영신수련> 안에서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제기되며, 이에 대한 개개인의 답 또한 여러 각도에서 아주 다양하게 표현된다. 하지만 은총의 역동성이 그러한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발견하는 진정한 자아는 결코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의 종 횡적 관계 안에서 동시적으로 발견되는 자아이기에 늘 하느님과 세상을 향해 개방된 자아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영신수련>, 특별히 <원리와 기초>에 담겨진 이냐시오의 영적 세계관을 살펴볼 것이다. <원리와 기초>에 담긴 사상은 전체 <영신수련>의 전제 조건이며 그 나아갈 방향적 지표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는 <영신수련> 피정을 위해 피정자에게 어떤 마음가짐이 요구되며, 이러한 준비를 위해 <원리와 기초>가 어떻게 제시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원리와 기초>의 본문과 그 내용을 살펴보고, 이에 담긴 이냐시오의 세계관을 이냐시오의 삶이라는 좀더 폭넓은 맥락에서 살펴볼 것이다.

 

 

II. <원리와 기초>

 

<영신수련>에 관한 초기 연구에 의하면 <원리와 기초>는 이냐시오가 알카라 에서 체류하던 시절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졌었으나, 레뚜리아(Pedro Leturia)신부와 이파라기르(Ignacio Iparraguirre)신부의 연구에 의하여 이냐시오가 파리에서 체류하며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시기에 처음으로 작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거기에 담겨진 내용과 실제적인 문자적 표현을 구분해야만 한다. 그 문자적 표현은 파리 시절에 완성된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물론 만레사에서의 체험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원리와 기초>에 담긴 신학사상을 밝히기 위해 접근할 때 놀라게 되는 사실은 이 본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언급이나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하느님께 대한 공경심, 세상 사물에 대한 태도, 그리고 인간의 궁극 목적에 더 합당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열망해야 한다는 내용 등만이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초기 주석들은 <원리와 기초> 본문이 단지 <영신수련> 전체의 구조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영신수련>의 중심 내용은 <그리스도 왕국>, <두개의 깃발>, 그리고 <선택 과정>의 전개 과정에서 파악될 수 있다. 즉 영혼의 구원과 모든 창조물에 대한 불편심 등의 <원리와 기초>에서 언급되는 내용은 생활 신분의 선택에 있어 중요하게 작용하는 원리이며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원리와 기초>에 담긴 내용은 (1) 인간 영혼의 구원, (2) 모든 창조물에 대한 불편심, (3) 삶의 궁극적 목적을 향해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창조주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모방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열망 등의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은 우리 주 천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그에게 봉사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 그외에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사람을 위하여, 즉 사람이 조성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면 그 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또 방해가 되면 그만큼은 배척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에 대해서, 만일 그것이 우리 자유에 맡겨졌고 금지되지 않았으면, 중용을 지녀야 할 것이니 즉, 우리는 질병보다 건강을, 빈곤보다 부귀를, 없신여김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함을 원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모든 다른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을 최고 목적에로 보다 더 인도하는 사물만을 원하고 선택해야 할 것이다. 

 

<원리와 기초>는 <영신수련> 전체 과정의 축소판이며,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그리스도 왕국> 묵상에 엿보이는 그리스도의 소명을 통해 파악된다. 만일 <원리와 기초>가 하나의 묵상 형태로 사용된다면, 그 전개는 분명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피정자는 <영신수련>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인간 삶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그를 바탕으로 하느님을 향한 구원의 질서에 자신의 삶을 내어 놓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육화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수용하게 될 때, 그는 바로 <원리와 기초>로 되돌아와 그 위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선택을 위한 길잡이>에서 새삼 강조된다: “모든 선택에 있어서 그것을 잘하기 위하여는, 우리들의 마음의 눈이 맑고 밝아야 한다. 즉 한결같이 내가 창조된 목적인 우리 주 하느님의 영광과 내 영혼의 구원만을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원리와 기초>에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표상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찬미하고 공경하고 봉사하는” 그분은 바로 창조주이시며 육화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홀로 원수를 쳐 이기시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을 이행하고 계시며,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통해 모든 인류를 구하고 계신 분이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만레사에서의 하느님 체험에 근원을 둔 이냐시오적 신학의 기본적 골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언제나 ‘창조주 하느님’이시다. <영신수련>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이러한 점을 명백히 밝혀준다. 원조의 죄를 묵상하는 첫째 묵상에서 엿보이는 이냐시오적 그리스도론의 특징은 창조의 신비에서 구원의 시작을 바라보는 데 있다. 즉 하느님의 창조는 말씀의 육화이기에, 비록 천사나 원조의 등장이 예측되기 이전 일지라도 그안에 성자 그리스도의 현존이 있다. 모든 존재의 시작과 끝은 은총안에 있다. 영원하신 성부께 대한 봉사와 흠승이라는 표상안에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의 우주적 표상이 담겨있다. 십자가에 못박시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가져온 죄로부터의 해방은 지상의 모든 존재가 그 창조된 본연의 목적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원리와 기초>에서 엿보이는 이냐시오 신학에서는 자연과 은총 사이의 금욕적 이원론이 없다. 그의 신학과 신비주의에서는 세상과 천상계, 포기와 포용, 모든 것에 대한 기꺼운 포기와 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함 사이의 긴장과 조화가 있다. 하느님이야말로 자연과 은총의 주재자이시며, 영원하신 말씀에 의해 창조된 자연 세상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본연의 목적에로 회복되어야 한다. 즉 창조된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를 지닌다. 

 

<원리와 기초>의 세 요점, 즉 구원, 불편심, 더 많이(magis) 등은 <겸손의 세 단계>와 연결된다. <원리와 기초>에 깔린 영감은 피정자가 자신의 삶의 신분을 올바로 선택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상 사물에 대한 불편심을 지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며,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지닐 수 있는 태도이다. 동시에 앞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관상하는 배경을 통해서만 가능한 ‘더 나은’ 봉사의 선택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원리와 기초>를 구성하는 문장 하나 하나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낸다. 인간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며 봉사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불편심의 의미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기꺼운 포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십자가의 신비 안에 담긴 위대한 삶의 질서를 통해서 그 참다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원리와 기초>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이해할 때 비로서 우리는 첫째 주간의 죄와 지옥의 신비, 그리고 영원의 언어로서의 십자가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III. 이냐시오의 영적 세계관

 

우리는 이제 위에서 언급한 <원리와 기초>의 신학적 사상의 기본 골격이 이냐시오의 체험에 세계에서 어떠한 유기적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휴고 라너(H. Rahner)는 이냐시오 영성의 역사적 형성을 다룬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신수련>의 단순한 문체나 [회헌]의 집약된 문장의 저변에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이 담겨있다. 이냐시오의 마음에 담겨진 세계, 찬란하고도 따스한 세계, 만레사에서 하느님과 신비적 만남을 통해 얻게된 신비적 조명으로 부터 형성된 세계가 담겨져 있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이 세계를 뚫고 들어가 이냐시오로 하여금 위대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끔한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엿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미하는 그의 세계관이란 바로 ‘이냐시오의 마음에 담겨신 세계’를 의미한다. 이 안에는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이냐시오의 고유한 인식이 담겨있다. 이러한 이냐시오의 인식과 영적 세계관은 로욜라와 만레사의 체험을 바탕으로 계속 성장하고 발전해갔다. 하느님, 창조물, 인간, 그리스도, 인간의 다양한 활동 등 여러 주제에 관한 이냐시오의 사상은 <영신수련>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냐시오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521년 로욜라의 회심에서부터 1555년의 로마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기술한 [자서전], 하느님 체험을 실천적 방법론으로 구성한 <영신수련>, 구체적인 상황들에 다양하게 적용되고 설명된 이냐시오의 사상을 엿볼수 있는 편지들, 사도적 삶의 제도적 체계를 구성한 [예수회 회헌], 그리고 그의 내면의 삶을 엿보게 해 주는 [영적일기] 등을 폭넓게 연구해야 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회 사료집](Monumenta Historica Societatis Jesu)에 수집되어 있는 다양한 문서들, 특별히 초기 동료들이 전해준 귀중한 증언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자료들과 이냐시오의 세계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이에게는 <영신수련> 자체 만으로도 피정자가 피정을 시작하면서 설정해야 하는 그리스도교적 목표가 충분히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영신수련>에서 이냐시오의 세계관을 가장 핵심적으로 요약해 주는 부분은 물론 <원리와 기초>와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 왕국>과 <두개의 깃발> 묵상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이러한 축을 중심으로 죄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묵상, 그리스도의 생애가 묵상을 통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1. 엄위하신 창조주 하느님

 

이냐시오 영성은 그리스도중심의 삼위일체적 영성이라고 말한다. 이냐시오에게 하느님은 한분이시며 동시에 삼위이신 창조주 하느님이시다. 온 우주 만물을 사랑으로 내시고, 사랑을 주시며, 그와 함께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끊임없이 모든 창조물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며, 인간을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은혜로서 온전한 자기 봉헌으로서 이 사랑에 응답하도록 이끄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단지 하느님에 대한 관념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냐시오의 구체적인 삶에서 더 잘 드러나는 영성적 특질을 의미한다. <영신수련>과 [회헌] 혹은 편지 등의 객관성을 드러내는 문헌에서는 비교적 그리스도중심의 영성적 특질이 더 잘 드러나고 있으며, [자서전]이나 [영적일기] 등의 주관적 문헌에서는 그 자신의 내밀한 내적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만큼, 그의 생애에 계속되는 성삼위의 현존이 뚜렷하게 엿보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냐시오적 신비주의의 특성을 다른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신비주의적 특이성이 그리스도께 대한 철저한 봉사를 향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특이성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지니는 의미를 이냐시오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밝히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이냐시오의 삶에 있어서 교육을 통해 얻게 된 여러 종교적 이념들보다는 체험을 통해 새롭게 발견된 하느님이 훨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자서전]에 담긴 만레사에서의 신비체험이나 라스토르타에서의 체험, 혹은 [영적일기]에 담긴 여러 체험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듯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늘 자신을 엄위하신 하느님(Divine Majesty) 앞에 놓이게 했으며, 이 만남과 현존은 그의 삶을 뒤바꿔 놓았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 이르는 문으로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엄위하신 하느님이시며, 자신의 삶 속에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시다. 이분과의 만남은 헛된 명예만을 따랐고 어둠의 세력에 의해 좌절에 빠졌던 지난 날의 삶으로부터 이냐시오 자신을 이끌어 냈다. 우리를 하느님을 향해 이끌어 주시어 신적 생명에 참여하도록 베푸시는 그리스도는 단지 교의적 가르침을 명상하는 가운데에 머무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적극적인 신앙을 향해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하느님이시며, 세상을 창조하시고 유지시키시며, 끊임없는 사랑으로 이 세상에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냐시오에게 다가오셨고, 이냐시오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생명을 살았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냐시오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그분께로부터 고유하고 우주적인 사명을 받고 있음을 깊이 의식하게 되는 과정을 감지할 수 있다. 만레사에서의 깊은 하느님 체험은 이냐시오의 마음을 전폭적으로 변화시켜 자신의 야망과 세속적 영광을 추구함으로부터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적극적 봉사에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도록 했다. 특별히 <영신수련>의 <그리스도 왕국> 묵상의 원천적 씨앗이 이 만레사의 체험에 담겨있다. 이 묵상은 <영신수련>의 전개 과정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핵심적 기둥이다. “영원한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계 사람들을 당신 앞에 두시고, 그들을 한 사람 한사람씩 부르시는” [95] 모습을 관상하면서 이냐시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엄위하신 하느님의 영광에 봉사하고자 하는 사도적 열정을 향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는 이냐시오의 영적 생애 맨 첫 순간에서부터 그 핵심에 자리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활동적 현존이시기에 이냐시오를 신적 친밀감 속으로 이끌어 주셨다. 즉 하느님의 완전하신 현존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배울 수 있기에, 우리는 타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고 도움을 줄 수가 있다. 하지만, 오직 그리스도 당신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엄위하신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실 때에만 이 만남은 가능하다. 이냐시오는 특별히 창조주께서 친히 그 피조물과 관계하시며 일치를 이루시는 만남의 순간을 중시한다. 

 

피정 동안에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의미에서, 찾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께 충실한 영혼에게 당신의 뜻을 표시하시고, 그를 당신의 사랑과 찬미에로 이끄셔서 그가 지금부터 더 낫게 당신을 섬길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시게 하는 편이 훨씬 더 유익하고 좋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정 지도자는 어느 한편에로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말고, 오직 저울처럼 중간에 서서, 창조주가 피조물과 더불어, 또 피조물이 자기의 창조주와 더불어 직접 행동하도록 맡겨 둘 것이다. 

 

이냐시오의 삶은 천주 성삼과의 내밀한 일치를 통해서 얻게되는 영적 확신에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삶과 사도적 활동은 이러한 하느님과의 사랑 깊은 일치가 드러나 표현되는 현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용하는 하느님의 이미지, 즉 ‘엄위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늘 성삼위를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를 독립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냐시오의 마음 속에서 이 성삼위의 통일성이 깨어진다거나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그리스도와 하느님, 그리스도와 성부,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지 않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동시에 그는 영원하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 앞에 놓이게 된다.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그는 영원하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의 굴레 속에서 다가오시는 엄위하신 하느님을 의미한다. 

 

이냐시오는 만레사 체류 초기에 사변적 수준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지녔었다. “그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께 극진한 신심을 가졌고, 매일 성삼의 각위께 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성삼위께 기도를 드릴 때면 무엇때문에 성삼위께 네 차례의 기도를 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이러한 의문은 실천적 체험의 수준에서는 아무런 어려움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사변적 수준에서 엿보이는 그리스도와 성삼위의 이질적 긴장은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하느님 신비의 의심할 수 없은 통일성에 대한 깊은 인식 속에서 사라진다. 생활한 체험의 영역에서 그리스도는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을 하느님과 결합시키신다. 오직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남 녀 가릴 것없이 모든 인류는 신적 신비의 통일성을 깨닫게 된다. 이냐시오에게 그리스도는 삼위이신 하느님께 이르는 문이시며, 동시에 삼위이신 하느님의 온전한 현현이시다.

 

 

2. 창조된 세상의 아름다움

 

인간의 마음을 교육시키고 당신의 모상대로 변화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친히 당신이 선택하신 방법으로 한 영혼에게 다가오시고, 바로 그 방법을 통해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께 대한 어떤 개념이나 서술을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구체적인 인물의 삶과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주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냐시오가 자주 사용하는 ‘창조주 하느님’이란 표현은 그가 지닌 하느님의 통합적 비전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냐시오는 또한 세상과 삶의 한복판에서 ‘위로부터 오는’ 빛을 발견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위해 늘 일하시며 온 우주를 성부의 영광 속으로 이끄신다. 그와 동시에 이냐시오의 가슴은 세상을 향해 열려지면서 이 세상의 장엄함의 근원이신 분을 향한 공경심에 가득차게 된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 거기에 담겨있다. 그 목적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모든 인류에게 반영해주고, 인간은 그로써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럼으로써 참다운 행복에 다다른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느님께서 비추어주시는 빛에 따라 위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신적 역동성 안에서 창조물을 사랑하게 된다. 바로 창조주 하느님께서 비추시는 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사랑하고 사용하게 된다. 

 

영원한 행복을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영원하신 사랑에 의해서, 온 우주는 무에서부터 이루어져 영광을 향한 여정속에 놓여졌다. 이 여정은 한편으론 우주의 자연적 존재 목적 뿐 아니라, 영광을 향해 움직여 나가도록 부여된 근본 지향이 성취되는 모습과 이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미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인간의 역할을 드러내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이 역할은 인간이 하느님의 선하심을 반영하며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봉사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을 통해 완성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되돌아 간다. 하느님에 의해 이끌리는 전체 우주는 자석과 같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함을 통해 상승하는 운동 속에 놓여진다. <영신수련>의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명상>은 이러한 영적 인식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 

 

나의 제한된 능력이 절대자의 무한한 능력으로부터 내려오듯이, 모든 선과 은혜가 위로부터 내려오는 모양을 생각할 것이며, 또 같은 모양으로 의로움과 착함과 인자함과 자비가 마치 태양에서 광신이 내려오고 샘에서 물이 나오듯이 내려오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위에 말한 대로 내 자신을 반성하면서 끝마친다. 

 

이냐시오는 하느님을 창조주로 체험하면서 모든 창조된 존재의 궁극 원리이신 분과 성화를 향한 존재의 궁극적 목적을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세상을 향하여 한없이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게 했다.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 안에서 그 참다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고유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이 흘러나온다. 즉 이냐시오의 눈에는 가장 미소한 것 안에서도 엄위하신 하느님의 놀라우신 영광이 비추어지게 된 것이다(Non coerceri maximo, contineri tamen a minimo divinum est). 모든 것에서 주도권을 지니시는 하느님의 우위성이 자리잡으면서, 보이는 사물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관상할 수 있는 힘과 재능이 형성되었다. 세상의 모든 창주물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언어이며, 계시 사건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Finding God in all things) 하는 자질이며, ‘바로 행동 그 자체 안에서 관상적인’(simul contemplativus in actione) 자질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 각성의 원천적인 체험은 만레사에 있으며, 특별히 까르도네르 강가에서의 조명 체험 안에 잘 드러나 있다. 

 

한번은 그가 신심으로 만레사에서 일 마일쯤 떨어진 성당으로 길을 나섰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성 바울로 성당이라고 했던 것 같다. 길은 까르도넬 강가를 뻗어 있었다. 길을 가다가 신심이 솟구쳐 그는 강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앉았다. 강은 저 아래로 흐르고 있었고, 거기 앉아 있을 동안 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비록 환시를 보지는 않았으나 영신 사정과 신앙 및 학식에 관한 여러 가지를 깨닫고 배우게 되었다. 만사가 그에게는 새로와 보일만큼 강렬한 조명이 비쳐왔던 것이다. 비록 깨달은 바는 많았지만 오성에 더없이 선명한 무엇을 체험했다는 것 외에는 자세한 설명을 못했다. 그는 예순 두해의 전생애를 두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은혜와 그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들을 모은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그가 받은 것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의 모든 조물은 하느님 계획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목적, 즉 하느님을 찬미하고 봉사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해서 개개의 창조물을 통해 어떻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 식별할 수 있고, 성스럽고 신적인 창조계의 질서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방법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이냐시오가 받은 이러한 은혜는 그가 창설한 예수회에 전수되는 은혜이며, 모든 예수회원들도 마찬가지로 같은 은혜를 향하여 초대되었음은 예수회 [회헌]에 법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상기하면 분명해진다. 

 

이러한 기초 위에 세워졌을 때 사람들을 다루기 위한 주 하느님의 인간적 도구를 갖추는 자연적인 수단은 우리 수도회 전체를 보존시키고 발달시키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 봉사만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할 것이며, 그 수단 자체를 믿을 것이 아니라 우리 주 하느님의 지고하신 섭리에 따른 은총에 협조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왠가하면 그분은 손수 창조하신 모든 자연적인 수단과, 그리고 은혜로운 조물주로서 주신 초자연적인 수단 모두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것을 습득할 수 있는 존재인 사람은 건전하고 충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 매우 부지런히 힘쓸 것이며, 또한 설교, 강론, 기타 더불어 대화하며 사람들을 다루는 여러 좋은 방법을 통해 이를 사람들에게도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814] 

 

이냐시오의 삶의 여정에 있어서 이러한 태도는 바로 그가 하느님을 참다웁게 만나는 체험에서 형성된 태도로서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을 공경하고 봉사하고자 하는 태도로 표현된다. 창조된 세상이 하느님 안에서 지니는 아름다움 뿐 아니라, 그 모든 존재가 놓여진 지평이신 하느님을 향한 적극적인 사랑이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체험한다함은 바로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인지하는 체험이다. 이러한 체험의 양태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체험으로서, 하느님과의 구체적이고도 인격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체험이다.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의식하는 이는 충실함으로 가득찬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게 된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의 방향성이 <원리와 기초>에 담겨져 있는 근본 사상이다.

 

 

3. 인간과 그의 소명

 

이냐시오는 온 우주를 하느님을 향해 움직여가는 실체로서 파악했으며, 바로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세계관은 형성되었다. “세상은 하느님의 장엄으로 충전되어 있고,” 인간은 세상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알며 사랑하고 섬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완성이고 행복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냐시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우주적 여정에 놓여진 자신의 실존을 의식케 했다. 하느님 체험이 그에게 가져온 변화만 보더라도 이러한 점은 명백해진다. 인간은 자유를 지닌 존재로서 성부를 향한 이 우주의 여정에서 책임을 지니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특별한 소명에 의해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드러나는 신비스런 구원의 경륜 중심에 놓여져서, 창조와 구원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하느님의 협력자로 부르심을 받는다. 

 

이냐시오의 영적 이해를 형성하고 있는 기반이 하느님의 신비와 구원 계획에 대한 자신의 체험임을 상기한다면, 그 모든 것의 궁극적 표준은 엄위하신 하느님께 대한 봉사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신수련>을 마무리하면서 피정자가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에서 최종적으로 구하는 은혜는 “만사에 있어서 지존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봉사하고자”하는 것이다.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인간이 지니는 소명은 하느님께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창조물 안에 규정해 놓으셨다. 창조물은 한편으로 인간의 존재 목적이 성취되는데 도구로 사용되도록 조성되었으며, 또 한편으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은 성부께서 의도하신 바대로 모든 창조물이 성부께 이르고 영광을 드러내도록 일한다. 창조주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을 찬미하는 수단을 제공하셨다. 하느님께 대한 찬미는 인간이 자신이 지니는 책임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향한 이 우주의 여정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것을 통해 성취된다. 즉 모든 인간이 지니는 소명은 자연적 재능 뿐 아니라 초자연적 은혜에 힘입어, 매사에 있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봉사함으로써 우주의 완성에 동참하는 소명인 것이다. 

 

이냐시오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지니는 소명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 소명은 하느님께 대한 봉사로서 세상을 향한 소명이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봉사하도록 불리우는 소명인 것이다. 둘째로, 이 소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소명으로서,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섬긴다 함은 바로 신비체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의 봉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로, 참다운 소명과 봉사는 늘 식별된 사랑의 정신을 요구한다. 

 

하느님과 세상을 향한 봉사의 소명: 이냐시오는 창조와 구원의 사업에서 인간이 지니는 역할을 ‘엄위하신 하느님께 대한 봉사’라는 표현으로써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인간 실존의 궁극적 의미와 그가 드러내는 장엄함은 이냐시오에게 ‘봉사함’이라는 표현 속에서 결정화된다. 봉사한다는 것은 인간이 그 존재 목적으로 부여받은 구원의 여정에서의 책임을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 그분과 협력한다는 의미이다. 창조물의 기본 방향을 존중하고, 구원을 위해 타인을 도우며,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그분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영원 안에서 하느님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신적 영광으로 들어오도록 온 세상을 조성하셨다. 이러한 협동은 겸손한 봉사로서 엄위하신 하느님께 드리는 끊임없는 공경인 것이다. 이냐시오가 자신의 체험 안에서 이 ‘봉사’ 의미를 발견한 것이 바로 이냐시오적 회심의 특수성이다. 한 마디로, 봉사함이란 인간 완성을 위해 부여된 신적 임무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관대하게 협력자로 동참하면서, 구원의 여정의 움직임을 존중함으로써 보다 더 적극적으로 동료 인간을 위해 애씀을 의미한다. 이러한 마음은 바로 하느님의 엄위하심과 그분께 대한 끊임없은 숭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봉사의 마음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냐시오에게 하느님께 대한 봉사는 자신을 내어주시며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관대한 사랑의 응답으로서의 봉사라는 역동적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냐시오의 태도가 그토록 하느님께 대한 봉사를 향하고 있는가를 밝혀주는 것들이 바로 이와 같은 이유들이다. 아무리 미소한 경우에 있어서라도 이 봉사를 거절한다는 것은 구원 사업에서 자신이 지니는 엄청난 책임을 게을리하는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무 제한없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며 사랑하시는 분께 대한 배은망덕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것 안에 관여되어 있고, 엄위하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존재하시며 일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영신수련>의 <그리스도 왕국>묵상에 집약적으로 상징화되어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소명: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맥락에서 파악되는 이냐시오적 세계관의 인간학적 특질은 그 궁극적 목적이 창조주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이냐시오적 세계관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살펴질 수 있으며, 특히 <영신수련>에는 그리스도중심의 역동적 흐름이 아주 고유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영적 생활에 각성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구원 뿐 아니라 중개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성삼위의 내적 친밀함 속으로 이끌어 주셨다. 이냐시오가 로욜라와 만레사에서 만난 이는 영원하신 주님으로서 엄위하신 그리스도이시다. 바로 그분을 통해서 이냐시오 자신은 참다우신 하느님의 현존 앞에 놓여진 자신을 발견했고, 어떻게 그분께서 모든 이 안에 그리고 창조된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존재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계신지를 깊이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영광, 그리고 그분의 힘을 깊이 인식하면서 어떻게 그분께서 강생의 신비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간 영혼의 깊은 심층에서 경외와 감사를 불러 일으키시는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즉, 이냐시오에게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고, 절대 군주이시다. 그의 영적 체험의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삼위이신 하느님과의 친밀함 속으로 이끌렸고, 그분의 현존을 통해서 매사에, 온 우주 만물 속에, 특별히 인간과 함께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발견은 더 깊은 내적 발견으로 이끌어 갔다. 

 

은총의 구원적 경륜 속에 펼쳐지는 이해와 경배, 그리고 감사로움의 역동적 관계는 영혼 속에 관대한 마음을 불러일으켜, 애덕의 정신을 더 깊이 살며 모든 창조물과 더불어 지존하신 하느님께 봉사하고자 하는 열정을 고취시킨다. <영신수련>을 마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에서 극적으로 표현되는 역동성이 바로 이러한 움직임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적 사랑에 의해 정화된 관대한 영혼은 마음 깊숙이에서 어떻게 신적 은총이 사랑과 봉사의 열정을 불러내는지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는 하느님께 받은 무수한 은혜를 진심으로 깊이 알기를 구함이니, 그 목적은 그 모든 은혜를 완전히 알아서, 만사에 있어서 지존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되기 위함이다.” 한없이 관대하시고 자유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끝없는 선하심을 통해 인간 영혼의 깊은 심층으로부터 관대한 응답을 이끌어 내신다. 

 

이냐시오가 하느님과 그분의 창조와 구원의 업적을 관상하면서 지니게 된 열정은 주님의 왕국에서 영원하신 분께 세상의 구원을 위해 그분과 함께 일하고 섬기고자 하는 열정으로서 그의 생애를 통해서 결코 시들지 않았다. 이러한 열정은 1637년 11월 라스토르타에서의 내적 환시의 체험과 더불어 공동체적인 특성으로 심화되면서 교회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예수회의 기초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봉사하고자 하는 적극성에 있다. 그리스도는 이제 전적으로 공동체적이고 교회적인 지평 위에서 새롭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가 가시적 우두머리를 지닌 교회에의 봉사라는 맥락에서 이해된다는 점이 이냐시오적 은사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식별된 사랑: 주님께 대한 봉사의 열정이 이냐시오를 사로잡고, 이 열정이 모든 것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지만, 그 결과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결코 인간적 야심이나 세속적 질서에 따라 흐트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열정의 근원은 하느님이며, 신적 의지와 목적이 그 궁극적인 척도이다. 이냐시오는 완덕이나 그리스도를 모방함을 그 자체 안에서 다루지 않고, 늘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과 관련해서 다룬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 삶의 완성은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보거나 혹은 수행된 봉사의 사명이 성공된 여부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입장에서 개별적인 특수성에 따라 하느님의 안목으로 보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 꺼리낌이나 조건없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무엇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지를 알아듣도록 원하고 스스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 이냐시오의 궁극적 척도는 ‘위로부터’라는 표현에 아주 잘 드러난다. 즉 하느님께 대한 끊임없는 봉사의 열망, 그리스도를 본받고 완덕을 향한 열망은 오직 하느님의 관점에 의해서, 그분의 구원적 의지에 따라서 식별되고 다듬어져야 한다. 

 

<원리와 기초>에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면 그 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또 방해가 되면 그만큼은 배척해야 할 것이다” 하는 원리에 따르면 원천적 척도는 창조된 사물의 본성 그 자체에 온전히 의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의지에 달려있다. 여기에 바로 하느님과 성령의 활동이 인간의 체험 속에서 어떻게 감지되고 식별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우리를 ‘식별’이란 문제로 이끌어 간다. 자신의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하느님의 의지가 실현되도록 지금 그분께서 의도하시는 바를 알아듣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끊임없는 자기 정화를 요구하며, 자신의 삶을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정돈해야 할 필요가 제기되는 것이다.

 

 

4. 악의 문제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 속에 엿보이는 하느님, 세상, 인간에 관한 그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죄의 문제에 대해서도 대답하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지평 속에 놓여진 인간의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은 결코 죄의 문제와 별도로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 오가는 사랑의 역동적 관계가 오히려 죄의 본질과 의미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죄란 인간이 자신의 삶과 우주 속에 끌어들인 무질서로서,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에 배은망덕하고 불충한 모습이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부여하신 원래적 질서가 파괴된 무질서의 모습인 것이다. 죄란 모든 창조물을 당신의 품 안으로 이끄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창조물 속에 심어진 궁극 목적을 향하는 자연 본성이 인간에의해 흐트러져 혼란 속으로 몰아 넣는 힘이며, 죄 자체도 인식치 못하게 만들어 인간으로 하여금 공포를 체험하게 만든다. 죄란 공포를 불러 일으켜 사랑에 끊임없이 거슬러 행하도록 이끈다. 

 

이냐시오의 관점에서는 죄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 죄의 기원과 발전을 생각한다면 분명 죄란 인간의 입장에서 창조물의 원래적 목적을 거슬러 무질서하게 사용하는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행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자체의 성스러운 성격을 오염시켜 죄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세상에 현존하는 죄의 현실을 다루면서 이냐시오는 인간이 그가 "인간 본성의 원수"라 부르는 매우 활동적인 실체를 언급한다. 원수인 사탄은 한 인간이 지닌 약점이 이끌리는 방향으로 몰아넣어 그로 하여금 창조물을 왜곡되게 사용하도록 이끄는 힘이다. 죄의 힘은 인간이 그 자신 안에 갇혀 스스로의 노예가 되도록 이끈다. “기억력을 활용하여 제일 죄악 즉 천사들의 범죄에 대한 역사를 생각해 볼 것이요, 그 다음에는 이해력을 활용하여 그 죄의 원인을 생각해 볼 것이요, 셋째로는 의욕력을 활용하여 그 모두를 잘 기억하고 알아듣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즉, 천사들의 죄 하나와 이렇게도 많은 나의 죄를 비교해 보고, 또 그들은 단 한 가지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갔는데, 나는 그렇게도 많은 죄 때문에 얼마나 여러번 갔어야 마땅하였겠는지를 생각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두려음을 갖도록 노력할 것이다. 여기서 천사들의 죄악을 기억에 되살린다 함은 은총 지위에 창조되었던 그들이 어찌하여 자기 자유를 창조주께 존경과 순종을 드리는 데 선용하기를 싫어하고 오만해져서, 은총 지위에서 죄악의 상태로 변하여 천상에서 지옥에로 떨어졌는가를 생각할 것이다.” 악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냐시오가 지닌 창조물이 지니는 근본적 지향과 방향에 대한 긍정적 통찰에 있다. 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오히려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죄송스러움과 감사안에 담긴 사랑과 공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III. <영신수련> 체험을 위한 마음가짐의 준비

 

이제 이러한 영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형성되고 구성된 <영신수련>의 체험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피정자의 마음을 준비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어 보겠다.

 

 

1. 피정자의 선택과 준비

 

<영신수련>은 피정자의 선택에 있어서 뿐 아니라, 피정을 시작함에 있어서 피정자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리스도교적인 구원 체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냐시오는 단지 <영신수련> 첫째 주간의 내용과 과정들 만은 아니고, 이들을 위해 피정자 자신이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제시한다. <영신수련>은 완덕에 대한 열망에 불타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다섯째 일러두기에서 모든 영적 진보와 심화에서 필요한 마음가짐은 관대하게 자신을 봉헌하는 마음가짐임이라고 분명히 제시한다: “영신수련을 받는 이가 창조주와 주님께 넓은 마음과 자유를 지니고 임하며 자신의 모든 원의와 자유를 바쳐서 지존하신 하느님께서 자기와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당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 쓰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과 태도를 지니지 않고서는 아무도 <영신수련> 피정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관대하고 자유로운 마음을 지니도록 피정자를 준비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30일 피정을 위해서 이냐시오는 피정자가 충분한 지성적 능력을 지녀서 하느님의 빛에 민감하고 하느님의 신비와 구원의 신비에 대해 개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물론 이러한 자질들은 한 개인의 인격적 성숙도 혹은 자유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영신수련>은 그 어떠한 이기적 사욕편정에 좌우됨이 없이 자신에 대해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자신들의 전 삶을 내어드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영신수련>을 바탕으로 하는 피정을 진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상대해야 한다.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이냐시오는 피정을 시작하면서 즉시 첫째 주간에 인간의 죄스러운 조건에 관해 묵상하도록 이끄는 것 같다. 이 죄에 대한 묵상들은 단지 고백의 성사를 잘 준비시키는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원한다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체험도 아닌 것이다.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의 가르침과 많은 성인들의 예를 통해서 알고 있듯이, 이것은 하느님을 참으로 만날 때 얻어지는 영적 열매인 것이다. 하느님의 엄위하신 모습과 한없이 아름다우신 사랑은 우리 인간의 보잘 것없는 죄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은총의 결과이기에 아무런 준비없이 이러한 체험의 세계에 들어가기로 즉석에서 결심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서히 오랜 시간동안 이러한 체험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물론 첫째 주간의 체험이 진정으로 이루어 지고 열매를 맺기 위해선 여기에서 제시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인간적인 눈으로 고찰하는 것으로서는 불충분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신 빛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첫째 주간의 체험은 원천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이며,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전개되는 인간 실존에 대한 체험인 것이다. 우리가 이미 이냐시오의 삶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선권을 지니고 계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첫째 주간의 체험이 진행되기 위해 우선적으로 준비되어야하는 마음 가짐은 어떤 것일까?

 

 

2. <원리와 기초>의 제시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을 지도하면서 어떻게 이 <원리와 기초>를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매우 단순한 형대로 지도했지만, 시간의 흐르면서 좀더 섬세한 모습으로 이 <원리와 기초>가 제시되었다. <영신수련>을 받고자 하는 지원자의 마음가짐을 오랜 기간 동안 준비시킨 후에, 이냐시오는 피정자에게 <원리와 기초>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고, 동시에 여러 성찰 방법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부터 죄 묵상에 들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리와 기초>는 두 가지의 역할을 수행한다. <영신수련>을 체험하기를 원하면서 오랜 기간 마음 자세를 준비해 온 피정자로 하여금 이 피정을 시작하면서 구원에 대한 통괄적이고 객관적인 지평을 상기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이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창조와 구원의 역사안에 펼쳐진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이제 시작하는 <영신수련>의 여정을 위해 마음을 준비시키고, 동시에 이 여정의 첫 발을 내딛도록 이끌어 준다. 

 

하지만 <영신수련>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감에 따라서,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영신수련>을 시작했기에 비교적 덜 성공스러운 결과들을 얻게 되는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냐시오는 좀더 충분한 준비 묵상들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원리와 기초> 본문을 세분하여 몇개의 요점으로 나누어 묵상하도록 제시하는 방법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냐시오는 인간의 창조 목적, 수단들, 어려움 등의 세개의 요점으로 나누어 이 묵상을 제시했다. 이냐시오의 동지들과 후계자들 역시 때로는 세 가지, 때로는 네 가지의 요점으로 나누어 <원리와 기초>의 내용을 묵상하도록 제시했다. 예를 들어 성 베드로 까니시오(St. Peter Canisius)는 인간의 창조된 목적, 창조물의 목적, 창조물을 사용하는 올바른 자세 등의 세 가지 욧점으로 나누었고, 폴랑코(J. Polanco) 신부는 창조와 인간의 목적, 창조물의 목적, 창조물의 사용, 불편심 등의 네 가지로 나누어 제시했다. 물론 <원리와 기초>을 며칠 동안 계속해서 묵상하도록 하는 것은 <영신수련>의 근본 사상에 어긋난다는 제안이 있었지만, 1599년에 공식적으로 출판된 [지침서]는 <영신수련>이 올바로 진행되기 위해서 충분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원리와 기초>의 내용이 몇개의 욧점들로 나누어져 묵상하도록 제시하는 것은 사부 이냐시오의 실천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재 천명했다. 

 

그러므로 <원리와 기초>는 <영신수련>을 시작하는 피정자로 하여금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의 빛에 의해 자신의 삶이 개선되어야 할 필요를 의식하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느님 은총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신앙에 성장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준다. 이러한 열망은 <영신수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만일 피정자가 이미 오랜 준비기간을 통해 이러한 마음과 열망을 지니고 있으면, <원리와 기초>은 이미 형성된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으로 자신의 약점과 죄스러움을 의식하게 해주면서 첫째 주간의 묵상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피정지도자는 피정자가 영적이해력과 성숙에 도움을 주면서, 좋은 피정의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시켜야 한다.

 

 

IV. 나오는 말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그 신비의 빛 아래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보더 더 포괄적인 것은 보다 더 구체적인 것을 향해 빛을 비추어 준다. 그리고 이 구체적인 것이 더욱 더 정확하게 진실되게 우주의 움직임에 동화 되도록 이끈다. 우주를 내신 하느님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구체적인 사람을 통해 그 장소, 그 시간에서 구원의 신비에 마음을 열도록 초대하신다. 그리고 이 구체적인 시공의 상황은 늘 실존적인 상황이다. 인간 운명의 어두운 측면을 늘 지니고 있다. 인간은 여기에서 엄청난 책임을 지니고, 인간다웁게, 그리스도인다웁게 응답해야 하는 소명을 지닌다. 그래서 인간은 늘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어려움 속에 놓여진다. 인간은 이러한 여려움 속에서 갈등하고 수고하면서 늘 자신의 삶을 하느님을 향해, 그분의 의도하심에 따라 쇄신해야 한다. <영신수련>의 관심은 이기적인 자기 사랑인 무질서한 애착이며, 죄의 원천인 이 무질서한 애착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개선해서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투신하도록 이끌기 위해 <원리와 기초>라는 객관적 지평을 통해 죄의 문제와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을 바라보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전망, 115호(1995년 가을), 심종혁(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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