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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영신수련의 죄 묵상이 이끄는 구원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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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122

영신수련의 죄 묵상이 이끄는 구원 체험

 

 

Ⅰ. 들어가는 말

 

우리는 이 글에서 ‘죄 묵상’이라 불리는 <영신수련> 첫 주간의 핵심 주제인 죄의 신비에 대하여 밝히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나라>(91-109)나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136-147) 등의 둘째 주간 묵상들이 <영신수련>의 고유한 그리스도 중심적 특질을 보여 주기에 중요하다면, 첫 주간의 묵상들은 잇따라 오는 모든 체험들의 밑바탕이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 중요성을 지닌다. 이것이 ‘죄 묵상’이라 불리기에 이 첫 주간의 체험을 인도하는 지도자는 죄의 신비에 대한 더욱 특별한 이해와 예민한 적응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다운 안목은 죄 체험 그 자체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 혹은 그분의 자비하심이라는 지평 안에서 죄의 가증스러운 현실을 성찰할 때 형성된다. 이 첫 주간의 ‘죄 묵상’들이 그 기대하는 바대로 착실히 진행되지 않는다면, 피정의 다음 각 단계로의 진입과 진행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피정 지도자들이 지니는 일반적 견해이다. <영신수련>의 죄 묵상이 지닌 독특한 전략은, 죄에 대한 신학적 해설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이라는 지평에서 죄의 가증스러운 현실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적극적으로 당신의 구원사업에 투신하도록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깊이 자각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영신수련> 첫 주간의 여정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피정자로 하여금 '죄의 신비'에 대한 체험적 감각으로서의 내적 인식을 얻도록 이끌어 주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Ⅱ. 첫 주간의 전략적 구조

 

<영신수련> 첫 주간의 근본 목적은 피정자로 하여금 인간의 죄스러움에 대하여 깊이 묵상함으로써 결국에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깊이 체험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다. 이러한 체험은 더 나아가 피정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 전체를 온전히 하느님을 향하여 내어 놓을 수 있도록 이끌어 갈 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이끌어 주실 때에야 가능한 응답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간의 노력이라는 시각에서, 분명 이러한 체험의 여정을 위한 시발점이 설정되어야만 한다.

 

가. 첫 주간 체험의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가짐

 

첫 주간의 죄 묵상을 시작하기 위해 요구되는 피정자의 마음가짐은 <원리와 기초>(23)에 잘 요약되어 있다. {자서전}에 서술되어 있는 이냐시오 자신의 영적 체험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 빚을 졌다는 인식, 즉 하느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의식은 즉각적으로 그분의 뜻에 자신의 삶을 기꺼이 바쳐 따르겠다는 강한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고, 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 가난과 모욕을 감수하면서 하느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게 한다. <원리와 기초>에서는 피정자들이 이러한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5)을 지니도록 그들을 초대하고 준비시킨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중심으로 감사함이 자리잡기 시작할 때 비로소 첫 주간의 죄 묵상으로 진입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마음가짐이 인위적으로 인간적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피정자는 진심으로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이끌리는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고 성찰하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관대함과 신실성이 은총으로 주어지도록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나. <영신수련>의 첫 주간과 성서의 계시 진리

 

첫 주간의 두 가지 핵심적인 주제는 물론 죄의 신비와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죄와 그리스도의 구원적 사랑의 신비를 사변적 신학의 수준에서, 혹은 <영신수련> 본문의 언어적 이해 수준에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영신수련>이 이끄는 첫 주간의 죄 묵상들은 죄에 대한 신학적이거나 윤리적 견해를 제시하거나, 혹은 그러한 신학적 견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이 구원의 역사 안에 어떻게 현존하시는가를 밝히려는 신학적 시도도 아니다. 오히려 은총의 상태에서 죄의 상태로 떨어진 타락 역사의 객관적 교훈이 성서 이야기를 통해 피정자에게 묵상 주제로 제시되고, 피정자가 자신의 죄스러움이 어떻게 더 넓은 죄의 현상과 신비 안에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지를 성찰하면서 죄에 대한 깊은 내적 인식을 얻도록 초대한다. 즉, 피정자는 <영신수련>이 제시하는 방법에 따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마음의 눈에 모시고, 죄의 신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체험적 인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냐시오에게 그리스도는 늘 영원한 말씀이신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사람이 되신 엄위하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의 전 과정에 있는 모든 묵상에서, 그분이 구유에 누워 계시거나 길을 걸으시거나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시거나, 그분은 늘 영원하시고 엄위하신 하느님이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신수련>의 역동성의 중심은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죄’에 대한 이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죄’는 그 첫 순간부터 하느님과 온 우주의 창조에 역행하는 힘으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거슬러 구원의 역사에 침입한 무질서의 힘이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육화하신 그리스도께 정면으로 반대하여 대립되어 있는 힘이다. 이 죄의 힘은 우선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으며, 무질서한 애착을 불러일으켜 하느님을 향한 창조의 질서를 늘 어지럽힌다. 그러기에 이냐시오와 <영신수련>의 세계에서 ‘죄’란 악습이며 거짓에 찬 행위일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인식 범주를 넘어서는 훨씬 거대한 힘이다. 

 

이냐시오 자신의 영적 체험에서 흘러나오는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 이해와 죄의 신비에 대한 인식은 물론 대단히 성서적이다. 그러므로, 실천적으로는 피정 지도자가 성서적 주제들을 사용하여 첫 주간의 죄 묵상을 지도할 때 가장 순조롭고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피정 지도자에게, 실천적 적응력으로서의 영신식별의 지혜뿐 아니라 건실하고 바른 성서신학적 지식도 필요하다. 즉, 이는 <영신수련>의 고유한 역동성을 존중하면서 어떻게 성서의 계시 진리를 묵상 요점으로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다루는 문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죄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성서의 계시 진리를 깊이 묵상하도록 이끌면서 이를 통해 엄청난 영적 열매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그 체험들이 <영신수련>이 초대하고 이끄는 영적 체험들의 디딤돌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어떻게 이끌어 줄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우선 이 시점에서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계시 진리인 성서의 세계를 떠나서는 죄의 신비를 묵상할 수 없고, 성서의 계시 진리 없이는 <영신수련>이 기대하는 고유한 영적 체험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 첫 주간의 과정과 목적

 

하느님의 부르심은 늘 회심을 향하여 이끈다는 것이 성서적 관점이다. 첫 주간의 목적은 피정자가 하느님의 자비하신 사랑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자기 처지를 깊이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개혁하도록 하는 그리스도인다운 구원 체험을 지니도록 이끌어 주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성서의 언어’로 뉘우침, 즉 회심의 체험이다. 전통 신비신학의 관점에서도 정화, 조명, 일치라는 세 가지 길을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영적 여정의 단계로 묘사한다. 즉,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분을 깊이 알아야 하고, 그분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눈이 맑아야 한다. 자신의 죄스러움에서 정화되어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이기적인 욕심으로 형성된 그릇된 관념을 버리는 과정이 바로 정화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피정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제기되는 주제가 죄의 신비이다. 

 

이것이 ‘죄 묵상’이라 불리는 것이지만, 첫 주간의 우선적 관심은 결코 양심성찰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깊이 파악하거나 진심으로 뉘우쳐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사함을 받는 고해성사적인 의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냐시오는 피정자로 하여금 우주적이고도 역사적인 죄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숙고하게 이끈 후에야 피정자 자신의 죄를 묵상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묵상하는 것 역시 단지 고해성사를 잘 받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영신수련>에 제시된 양심성찰이나 기타 등등의 제언들은 고해성사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피정의 진전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들이다. 이러한 준비들은 피정자로 하여금 자기의 현재 모습 있는 그대로, 현실감 있게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대면하여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하느님의 자비하신 사랑의 신비 앞에, 피정자가 자신의 죄스러움을 바라보며 진정한 내적 회심에 이르도록 도움을 주기 위하여 이냐시오는 그 시간적 길이를 한정함이 없이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묵상을 제시한다: 

 

첫째 묵상(45-54) : 세 가지 죄, 

둘째 묵상(55-61) : 자신의 죄, 

셋째 묵상(62-63) : 되풀이, 

넷째 묵상(64) : 되풀이, 

다섯째 묵상(65-71) : 지옥. 

 

이 묵상들의 순서에 엿보이는 구조적 특이점이 있다. 즉, 죄라는 그 가증스러운 파괴적 힘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인 지옥을 향하게 된다. 객관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면 죄의 역사는, 완전한 멸망에 이르는 과정과, 이와는 정반대인 인간이 되신 하느님 사랑의 신비인 봉사와 사랑의 역사라는 양극단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체험의 주관적 차원에서는 피정자가 죄의 신비와 세계라는 우주적 상황을 묵상하면서, 죄인으로서의 자기 처지가 어떻게 그 우주적 상황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깊이 깨닫도록 이끈다. 비록, 자신의 죄스러움에 대한 인식이 더욱 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세계 속으로 깊어지지만, 이러한 깊은 인식이 일어나는 배경은 보편적인 지평에 펼쳐진 객관적 죄의 세계이다. 이러한 객관적 지평이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개인의 죄스런 상황에 대한 묵상은 오히려 피정자 자신을 폐쇄적으로 이끌어 갈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죄의 적나라한 힘과의 대면은 영원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눈 아래, 즉 구원의 역사에 펼쳐진 사랑의 신비라는 지평 아래서 이루어져야 한다.

 

라. 첫 주간의 ‘구(求)할 은총’

 

이냐시오가 제시한 첫 주간의 <구할 은총>(48)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며 그 죄스러움에 아파하면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서, 이와 같은 영적 정감들은 피정자로 하여금 죄의 신비에 깊이 몰입하고 이에 대한 내적 인식을 얻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첫 주간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구하는 구체적인 것으로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고 미워하는 은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깨닫고 지겨워하며 그것을 시정하여 생활을 바로잡을 수 있는 은혜, 세속을 지겨워하여 헛된 것들을 멀리하기 위한 세속 인식의 은혜 등이 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이끌리는 진정한 내적 쇄신은 궁극적으로 관대하고 효과적인 투신을 불러올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피정자의 이러한 내적 체험이 하느님의 계시 진리에 의해 유발되고 이끌린다는 것이다. 즉, 죄인으로서의 깊은 인식은 바로 구원의 깊은 내적 체험이다. 구원의 객관적 진리에 대한 진지한 묵상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피정자의 내면에서 구원을 체험하도록 이끌 것이다.

 

 

Ⅲ. 죄스런 실상에 대한 깊은 인식

 

죄란 하느님께 배은망덕한 태도를 지닌 악덕으로서 무질서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질투하는 악마의 하수인이다. <영신수련>에는 죄에 대한 이러한 성서적 인식이 죄의 역사를 묵상하는 과정에서 역동적으로 드러난다. 죄란 과거에 끝난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연속적으로 이어져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모두 위협하는 역사적 힘이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모든 영역을 꽉 채우려는 힘으로서, 이미 새로운 계약에 의해 구원받은 이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힘이다. <영신수련> 첫 주간의 죄 묵상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진행된다. 천사의 거역을 통해 시작되어 지금 여기 나 자신의 죄에까지 이르는 죄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거역할 때 초래되는 쓰디쓴 결과뿐 아니라 새로운 창조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인간을 완성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엄위하신 사랑을 동시에 바라보게 된다.

 

가. 죄의 역사에서 우리가 차지한 위치

 

첫 주간 내용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첫 묵상은 악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이 안에 위치한 인간의 처지를 숙고하도록 이끌고, 둘째 묵상은 죄의 신비 앞에 선 자신의 처지를 더 깊이 더 적나라하게 숙고하도록 촉구한다. 셋째와 넷째의 묵상들은 이러한 주제를 되풀이 묵상하도록 함으로써 죄의 신비에 대한 더 깊은 내적 인식을 지니도록 배려하고, 다섯째 묵상은 죄가 이끄는 미래를 응시하도록 이끈다. 이냐시오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피정자로 하여금 죄의 세계에 눈을 뜨도록 초대한다. 이냐시오는 여기에서 결코 죄의 신학적 개념 내지는 교의를 펼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라는 역동적 실체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대면하도록 초대한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은 성서에 계시된 죄의 역사를 성찰하면서 이해한 바를 적용하도록 요구한다. 

 

“기억력을 활용하여 제일죄악(第一罪惡) 즉 천사들의 범죄에 대한 역사를 생각해 볼 것이요, 그 다음에는 이해력을 활용하여 그 죄의 원인을 생각해 볼 것이요, 셋째로는 의욕력을 활용하여 그 모두를 기억하고 알아듣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50). 

 

묵상하는 계시 사건에서 영적이며 신학적인 의미를 얻어내고 지성을 개방하여, 하느님께서 전해 주시려는 빛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능력과 재능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보고서를 쓰듯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교육시키시고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 진리가 설정되는 성서적 역사와 <영신수련>에서 제공하는 묵상의 틀이 균형 있게 엮어져야 한다. 묵상과 연관된 어떠한 주제라도 독립되어서 전후좌우에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죄의 현실에 대한 기도와 묵상이 충분히 열매를 맺도록, 첫 주간의 기간을 경우에 따라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기량이 피정 지도자에게 필요하다.

 

나. 죄의 신비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시각의 형성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첫 주간은 세 개의 ‘죄 묵상’, 즉 죄의 역사를 다루는 <첫째 묵상>(45-54), 개인적 죄의 여러 현상을 성찰하며 죄의 심리를 살피는 <둘째 묵상>(55~63), 죄의 종말을 다루는 <지옥 묵상> (65-71)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첫 주간의 묵상들은 <영신수련>의 그리스도 중심성이라는 시각에서 이해되고 진행되어야 한다. 죄란 본질적으로 그 첫 죄가 저질러지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론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냐시오는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성을 ‘죄 묵상’들의 첫째 길잡이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관상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들과 비교하여 언급하고 있다. 

 

“뵈올 수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할 때처럼, 볼 수 있는 사물에 대하여 관상이나 묵상을 할 때의 장소 묘사는 내가 관상하고자 하는 대상이 있는 구체적 장소를 상상의 눈으로 보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 말하는 구체적 장소란, 관상하고자 하는 데에 따라서 보게 될 예수님 또는 성모님이 계시는 성전이나 산 같은 것을 말함이다. 그리고 죄악과 같은 무형한 것에 대하여 관상할 때의 장소 묘사는, 내 영혼이 썩어질 이 육신 안에 갇혀 있고, 또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된 인간 전체가 다른 짐승들과 더불어 서러움의 이 땅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상상의 눈으로 보고 생각함을 말함이다”(47). 

 

비록 ‘죄 묵상’은 죄스러움이라는 의미적 사건에 그 관심이 주어지지만, 모든 관상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떠오르는 감각과 감동을 통해 성찰하게 된다. 여기에서 피정자가 구해야 할 은혜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당황함”(48)이다. 이 부끄러움과 당황함은 후에 피정자가 경험하게 될 “아픔으로 가득 차신 그리스도와 함께 아파함”(203)이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러한 영광과 기쁨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즐거워하고 기뻐함”(221)과 대비되는 내적 체험이다. 죄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은 대상이 없는 막연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서 지니게 되는 부끄러움이다. 이 부끄러움은 후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은혜를 베푸신 임금과 그의 모든 측근자들 앞에서, 자기 자신이 그의 마음을 크게 상해드린 죄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74)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영원하신 최고 심판자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죄스러움의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모습이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부끄러움과 당황함은 자신의 죄를 보속하기 위한 고행을 통해 진정한 회개를 불러일으킨다. 

 

“외부의 고행은 주로 세 가지 목적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 첫째로는, 과거에 범한 죄를 보속하기 위해서 이고; 둘째로는, 자기를 이기기 위함이니, 즉 감각적인 모든 하급 기능이 지상적인 상급 기능에 더욱 복종케 하기 위함이고; 셋째로는, 자기가 원하는 어떤 은혜를 구하여 얻기 위함이니, 예를 들면, 자기 죄에 대하여 깊이 통회하기를 원하거나, 혹 그 죄에 대해서 혹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실 때에 겪으신 고통과 고난에 대하여 슬피 울기를 원하거나, 혹은 어떤 문제의 해결을 원할 때에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고행을 하는 것이다”(87). 

 

바로 이러한 맥락의 신학적 견지에서 ‘죄 묵상’이 진행되어야 한다.

 

다. 첫째 묵상: 죄의 우주적 역사

 

이제 <영신수련>의 ‘죄 묵상’에 드러나는 그리스도론적 특성을 살펴보자. 세 가지 죄악에 대한 묵상이라고 불리는 첫째 묵상의 중심 주제는 죄의 역사이다. 이 묵상들에서 다루는 세 가지 죄악의 그리스도론적 특성은 <영신수련>의 이해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특별히 첫째 요점인 <천사들의 죄>(50)는 뒤에 나오는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136-147)을 이해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이냐시오는 여기에서, 단순히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의 가르침에 입각한 전통 신학의 내용을 간략하고 투박하게 묘사한다. 

 

“천사들의 죄악을 기억에 되살린다 함은 은총 지위에 창조되었던 그들이 어찌하여 자기 자유를 창조주께 존경과 순종을 드리는 데 선용하기를 싫어하고 오만해져서, 은총 지위에서 죄악의 상태로 변하여 천상에서 지옥에로 떨어졌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50). 

 

이렇게 간략하게 묘사된 요점들이 묵상 그 자체 안에서 점차로 확장되어 갈 것이다. <영신수련>의 한 전통적인 해설서는 죄의 신비 저 깊은 밑바닥에 내려가는 것에는 두 가지 방안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주입조명(注入照明)의 은혜로 죄의 본성에 대한 깊은 내적 감각을 얻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죄의 기원에 관하여 지성적 노력을 기울여 신학적으로 깊이 성찰하는 것이다. 특별히 <천사들의 죄>라는 막연할 수도 있는 계시 진리에 관해서, 이 두 번째 방안을 적용하여 그 핵심적 깊이에 도달하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의 죄에 대해 기도하고 묵상하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은 이 천사들의 죄가 육화하신 말씀과 정면으로 대립되어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총으로 주어진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천사들을 지옥으로 떨어지게 한 오만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신, 강생하신 성자를 자유롭고 적극적인 의도로 거부한 행위를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영신수련> 본문에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눈앞에 두고 전개되는 죄 묵상과 담화를 살펴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을 제공해 준 만레사에서의 신비적 체험에 입각해서 살펴볼 때 그것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둘째 주간의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은 이 묵상에서 전개되는 인간 본성의 원수인 사탄과의 전쟁이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십자가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 결말이 나는지, 그리고 이 대결이 십자가의 깃발 아래 뭉쳐진 교회가 드리는 정열적인 봉사를 통해 어떻게 끝을 맺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실제로 <영신수련> 피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광야에서 유혹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이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에 이어서 제시되는 점을 본다면, 천사들의 죄에 대한 묵상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이 제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원사의 맥락에서 보면 <원리와 기초>에 제시된 구원의 의미는 천사들의 범죄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하느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을 향해 이끌리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죄의 뿌리는 악마가 저지른 죄에 있으며, 이 죄는 바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죄가 된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죄를 “인간 본성의 원수”(7, 10, 135, 136, 325, 327, 334)라고 부른다. 죄는 맨 처음부터 살인자였으며 거짓말장이였다(참조: 요한 8,44). 이 원수의 목적은 그 첫 순간부터 육화하신 말씀을 죽이고자 하는 데 있었으며, 바로 그 목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자 하는 모든 영혼을 죽이고 있다. 이러한 죄의 기원이라는 무서운 신비에 대한 묵상은 잇따라 오는 죄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도움을 준다. 이렇게 타락한 천사의 죄를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할 때, 비로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택하신 십자가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처음부터 살인자인 원수는, 참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죽이는 성공 아닌 성공에 의해 파멸에 이르게 된다. 

 

첫째 묵상의 둘째 요점은 원조의 죄이다. 이에 관한 <영신수련>의 본문 역시 성서와 전통신학에서 언급하는 정도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두 번째 죄악인 우리 원조들의 죄를 기억해 본다는 것은 어떻게 아담이 다마스커스 들판에서 창조되어서 지상 낙원에 살게 되었으며, 그 갈빗대에서 에와가 만들어진 후에 따먹지 말라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죄를 범하였으며, 그 다음에 가죽옷으로 입힌 채 낙원에서 쫓겨나, 본래의 의로움을 잃어버린 채 일생을 많은 수고와 보속 중에서 보낸 것을 돌이켜 생각함이다. 그리고 또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더 자세하게 머리로 이치를 따지고 마음으로 감동하는 것을 말함이다”(51). 

 

이냐시오가 제시하는 대로 “자세하게 머리로 이치를 따지면서” 이 묵상을 전개하기 위하여는, 원조들의 죄를 그리스도론적 시각에서, 즉 모든 죄가 어떻게 “죄의 아비”(요한 8,44; 1요한 3,8)와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세상의 죄”(요한 1,29)에 대한 승리인 십자가와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죄란 본질적으로 모든 창조물을 당신 안에 결합하여 완성으로 이끄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역행하는 힘이다. 원조들의 죄 역시, 천사들의 죄처럼 그 첫 순간부터 살인자였다.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원의에 질투를 느낀 원수에 의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지혜 2,24). 이 힘이 인류의 역사 안에서 오직 한 번의 궁극적인 죽음, 즉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하느님의 죽음에 의해 극복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첫 원조들의 죄악이 얼마나 큰 죄인지, 그리고 이 죄가 어떻게 인류에게 전해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죄가 가져온 결과로서의 “수고와 보속”(51)이 <그리스도의 나라> 묵상에서 새로운 신학적 맥락을 제공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데 필요한 한 원리가 되며, 궁극에는 성부께서 본래 인간에게 부여하신 영광을 회복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첫 원조들의 죄를 그리스도론적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써 <영신수련> 전반에 깔려 있는 “수고와 영광”(95)이라는 양 극점이 예고되고 있다. 낙원을 잃어버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원수를 쳐부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등장하게 되고, 원수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결정적으로 죽음의 힘을 쳐부순다. 

 

이러한 신학적 맥락의 연속선에서 ‘한 개인의 대죄’에 대한 요점이 제시된다. 

 

“같은 모양으로 제삼 죄악에 대하여 생각할 것이다. 즉 누구든지 간에 대죄 하나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사람의 본죄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 다음에 내가 범죄한 죄보다 훨씬 작은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떨어진 무수한 사람의 본죄를 돌이켜 생각할 것이다. 같은 모양으로 제삼 죄악, 즉 사람의 본죄에 대하여 생각한다함은 자기의 조물주를 배반한 죄가 얼마나 중대하고 악질적인지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지혜를 써서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을 거슬러 범죄하고 또 그에게 반항하는 행동을 감히 한 그러한 사람이 영원한 지옥벌을 받게됨이 얼마나 지당한지를 추궁해보고, 끝으로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마음으로 감동을 받음으로써 끝맺을 것이다”(52).

 

여기에서 피정자가 고려하도록 제시된 요점은 죄의 본성과 아무리 작은 죄일지라도 그것이 지닌 강도이다. 피정자는 무한히 선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거슬러 배반한 죄가 얼마나 중대하고 악질적인지를 성찰한다. 천사들의 죄와 원조들의 죄를 육화의 신비에 역행하는 힘으로서 성찰한 내용을 배경으로, 하나의 죄가 얼마나 파괴적인 힘으로 이 커다란 힘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성찰하면서, 피정자는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어떻게 죄의 역사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중심점을 통해 드러나는지를 성찰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신학적이며 영적인 관점에서 이냐시오는 십자가 앞에서의 담화를 제시한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우리 주 그리스도를 눈앞에 모시고 그와 서로 이야기할 것이다. 즉 주님은 창조주이시면서 어떻게 내 죄를 위하여 사람이 되셔서 영원한 생명에서 현세의 죽음을 당하시게까지 되셨는지 생각할 것이다. 그 다음엔 다시 내 자신에 눈을 돌려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를 생각하고, 그리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감동할 것이다”(53). 

 

피정자가 이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찰하는지는 분명 피정자 자신이 지니는 십자가에 대한 신학적 견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전체 죄의 역사에 핵심적 중심이시므로, 피정자는 그분을 마음의 눈으로 모시고 진정한 회개의 정신을 지니게 된다.

 

라. 둘째 묵상: 개인의 고유한 죄의 역사

 

둘째 묵상은 <자기의 여러 가지 개인적 죄에 대한 묵상>(55~61)이라 불린다. 외적으로는 자신의 삶 전체를 돌이켜 보며 구체적으로 죄를 살피는 성찰 형식의 묵상이지만, 그 밑에는 ‘과연 어떤 맥락에서 앞에서 살펴본 죄의 신비와 역사가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인 현실로 자리잡고 있는가’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이 깔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죄라는 현상의 심리적 속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죄스러움에 대한 우주적 감각을 지니려는 것이다. 자신의 죄스러운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죄인으로서의 깊은 감각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죄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없이는 얻어지지 않는다. 죄인으로서의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얼마나 미약하고 작은 존재인지를 생각해 보고, 자신을 종기나 헌데처럼 여기면서 자신이 범죄 함으로써 반역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해 볼 때, 비로소 하느님 앞에서 대역죄를 범한 자신을 오히려 참아 주고 보존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하신 사랑에 대해 "경탄의 소리"(60)를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피정자는 죄인으로서, 죄의 신비가 열어 주는 지평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내가 범죄함으로 반역한 하느님은 누구이신지를 생각함이니, 즉 하느님의 속성들을, 그와는 반대되는 나 자신 안에 있는 것들과 비교해서 생각함이다. 예를 들면 그의 전지를 나의 무식과, 그의 전능을 나의 무능과, 그의 의로우심을 나의 불의함과, 그의 전선(全善)하심을 나의 악함과 비교해서 생각함이다”(59). 

 

우주적 지평에서 바라보는 죄의 가증스러운 파괴적 힘과) 이러한 죄의 연대적 힘에 구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창조주이시며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힘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볼 때, 피정자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압도되어 <경탄의 소리>를 발하게 될 것이다. 이 경탄의 소리는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감사의 기도로 바뀔 것이다. 

 

“자비하심의 담화로 끝마칠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나를 그의 은총의 도움으로 지금부터는 개과천선하도록 권고하시면서, 아직도 내게서 생명을 거두시지 아니하셨음을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주님의 기도를 욀 것이다”(61). 

 

개인적 죄에 대한 묵상 역시 죄의 역사에 대한 묵상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신비 앞에서 마무리된다.

 

마. 셋째와 넷째의 되풀이 묵상

 

이제 이 앞선 죄 묵상들은 ‘되풀이’라 불리는 셋째와 넷째 묵상에서 더 심화되는데, 이것은 앞선 묵상에서 경험한 위안과 고독의 체험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 단계는 자신의 죄에 대한 내적 인식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행위의 무질서함이라는 죄의 뿌리를 깨닫는 것이며, 셋째는 세속적이고 헛된 것들에 대한 내적 인식을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죄에 대한 내적 인식과 연관된 위안이나 고독 등의 영적 체험들이 바로 죄에 대한 체험의 세계로 피정자를 인도한다. 이제부터 피정자는 둘째 주간의 정점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반대하여 형성되어 있는 반그리스도의 세력인 사탄의 힘과 직면하게 된다. 요한 복음이나 바울로 서간에서는 죄의 힘이 “세상의 지배자”(요한 12,31; 14,30; 에페 6,12; 2고린 4,4)의 형상으로 묘사된다. 하느님의 창조적이며 구원적인 힘과 대립되어 있는 세속의 힘에 관한 묵상이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에서 적나라하게 전개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이 죄 묵상의 내적 움직임은 궁극적으로는 둘째 주간의 핵심 묵상들로 이미 피정자를 이끌어 간다. 

 

첫 주간의 묵상에서 피정자는 모든 죄의 침략적 힘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추스르기 위한 스스로의 의식을 준비한다. 피정자는 이러한 죄의 힘과 영향력에 대하여 깊이 숙고하고 묵상하면서, 자신과 세상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죄의 원천에 대한 깊은 영적 인식을 얻게 된다. 이냐시오는 여기에서도 역시, 죄에 대한 친밀한 감각과 인식을 얻기 위하여 담화와 같은 친밀한 기도의 양식을 권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성의 사변적 활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고, 피정자는 오히려 이미 자신이 앞선 묵상에서 깊이 숙고하면서 살펴본 내용들을 차근차근 돌이켜보면서 주님과의 담화를 나누도록 초대되고 있다. 여기에서 담화는 십자가에 달리신, 육화하신 창조주 그리스도를 마음의 눈에 모시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론적 특성이 깊이 깔려 있다. 죄의 밑 뿌리에 깔려 있는 무질서에 대한 깊은 인식은 피정자로 하여금 삶을 개선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의식을 불러올 것이다. <영신수련>의 안목에서 삶의 개혁이란 무질서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16, 169, 172, 179).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죄의 힘에 의해 일그러진 자신의 삶 안에 새로운 질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무질서의 아비인 죄의 힘에 의해 스며든 혼돈을 극복하고, 하느님께서 원래 심어 주신 은총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해방은 오직 엄위하신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16). 그러므로 질서와 무질서라는 대립은 결국 그리스도와 사탄이라는 대립적 구도의 한 가지 표현이다.

 

바. 다섯째 묵상: 죄의 결과에 대한 가능성으로서의 지옥 묵상

 

다섯째 묵상은 죄의 종말을 다루는 <지옥에 관한 묵상> (65)이다. ‘지옥’이라는 실체는 오직 그리스도 중심의 관점에서만 밝혀질 수 있다. 세상 끝날(요한 12,48)에 내려질 십자가 심판의 근거는 육화하는 말씀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려 있기에, 심판의 날이란 이미 사람의 마음속 깊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참조: 요한 3,18).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말씀에 대한 태도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성령을 알아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대자로부터 악령을 받는 것입니다”(1요한 4,2~3). 

 

인간이 되어 오신 그분께 대한 신앙이나 불신앙에 의해 천국과 지옥이 갈라진다. 

 

피정자 자신의 마음속 깊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형성되고 있다면, 마음의 눈에 우리 주 그리스도를 모시고 다음과 같은 담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우리 주 그리스도와 담화하면서 지옥의 영혼들을 생각해 볼 것이니, 그들 중에 어떤 영혼은 그리스도의 강생을 믿지 아니한 연고로, 또 어떤 영혼은 믿기는 하였으나 그의 계명대로 실천하지 아니한 연고로 그렇게 된 것을,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하여 볼 것이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강생 전에 있던 영혼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있던 영혼들. 셋째는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서의 생활이 끝난 후 태어난 영혼들.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일찍이 나를 죽게 하시어 이 세 종류의 영혼들 중 하나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음을 감사할 것이다. 또 같은 모양으로, 어떻게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내게 대하여 이렇게 큰 인자와 자비를 베풀어 주셨는지 생각하고 감사할 것이다”(71). 

 

이처럼 첫 주간의 막바지에 피정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초대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태도는 <그리스도의 나라> 묵상을 통해 둘째 주간에 진입하도록 발판을 마련해 준다. 물론 이 지옥 묵상을 다루기는 대단히 어렵고 조심스럽다. 앞의 묵상들은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지평하에서 진행되어 왔다. 이제 이냐시오는 피정자로 하여금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도록 초대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부르심을 거부했을 경우 초래될 미래의 가능적 현실에 대해 묵상하라고 제시한다. 피정자들은 죄가 초래할 궁극적 결과와 이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하느님의 자비하심의 발치 아래 겸허히 바라보도록 초대되고 있다.

 

 

Ⅳ. 죄스러움에 대한 내적 체험의 조심성

 

죄스러움에 대한 적나라한 체험은 피정자 자신을 폐쇄시킬 엄청난 위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냐시오 자신의 경우를 살펴볼 때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처절한 죄스러움에 대한 체험은 동시에 엄위하신 하느님께로 향하는 봉사의 열망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첫 주간의 체험을 이끄는 피정 지도자는 하느님의 자비하신 사랑을 강조한다는 명분으로 죄에 대한 숙고와 노력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반대로 죄의 가증스러운 신비를 적나라하게 다룬다는 명분하에 하느님의 자비를 접어 두어서는 안 된다.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죄의 신비 그 밑 뿌리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 주간의 피정을 지도하면서 지도자가 접하게 되는 현실적인 어려움은 피정자로 하여금 어느 만큼 객관적이고 지성적인 수준에서 죄의 역사를 숙고하도록 배려해야 하는가를 식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분명 어떤 입장에서의 선택은 피정자로 하여금 죄의 가증스러운 현실에 대한 주관적 체험을 약화시킬 수 있다. 중요한 관점은 <영신수련>의 묵상이 죄에 대한 교의신학적 전개가 아님을 염두에 두고, 동시에 복음의 객관적 구원 진리에 의해 주관적 체험이 유발되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죄 그 자체가 지닌 은폐성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피정자의 내면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피정 지도자는 노련하게 이 문제를 살피고 이끌어 주면서, 죄 묵상이 지성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을 넘어서 곧바로 마음에서 진행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수준과 주관적인 수준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피정 지도자는 첫 주간에서의 죄에 대한 성찰과 둘째 주간, 특히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에서 원수의 계략에 대한 고찰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명쾌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첫 주간의 죄 묵상은 감성적 차원에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의 체험이 중심이 되면서, 죄의 가증스러운 힘 앞에 죄의 본질과 그 죄가 불러오는 결과를 묵상한다. 반면 둘째 주간의 체험은 올바른 선택을 위한 준비의 지성적 체험을 중심으로 하면서, 원수의 흉계를 간파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투신하도록 이끌어 주는 묵상이다. 

 

피정자가 접하는 또 다른 어려움은 피정자의 주관적 체험을 심리적 차원, 혹은 윤리적 수준에서 다루게 될 위험이다. <영신수련>의 체험은 지성적이고 객관적인 수준에서 구원의 진리를 고찰하면서, 이 구원의 객관적 진리가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차원의 응답을 유발하는 체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의 주관성 내지는 감성적 경향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강하게 요구되는 능력은 물론 식별의 지혜이다. 이냐시오는 이를 위해 영신식별의 규범들을 덧붙였다. 물론 이 안에 심리적인 인식이나 조언이 영성적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에서 <영신수련>의 첫 주간이 이끄는 죄의 신비에 대한 내적 체험이 다음과 같은 특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첫째, 죄스러움에 대한 내적 체험은 은총의 힘에 의해 인도되는 영성적이고 감성적인 체험이어야 한다. 둘째, 죄스러움의 체험은 이론적인 체험일 뿐 아니라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체험이기에, 하느님, 전체 우주 창조물, 세상과의 관계 안에서 조명되는 체험이다. 셋째, 인간은 죄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창조의 첫 순간부터 사랑이라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진다. 죄는 바로 첫 순간부터 이 질서를 어지럽힌다. 죄는 단지 저질러진 죄스러운 행위만은 아니다. 

 

영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고 자신의 자유를 하느님께 내어 드리는 삶이기에, 그 영역은 곧 마음이며, 이 마음의 움직임은 단지 심리적 현상만은 아니다. 이것은 영적 체험으로서 하느님의 동기에 의해 충동되고 유발되는 체험이다. 그러므로, 피정 지도자는 이러한 움직임들에 대해, 즉 영적 영역의 다양한 움직임에 대해 민감하고 예민한 영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Ⅴ. 구원 체험의 접합점

 

인간의 죄스러운 실존의 체험은 그저 부정적인 체험일 수만은 없다. 아니, 이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다운 구원의 체험, 즉 하느님을 만나는 구원 체험의 접합점이다. 첫 주간의 맥락에서 은총은 감성적인 체험을 주도하면서 죄스러운 실존에 대한 깊은 인식을 향해 이끈다. 죄스러움에서 발견되는 당황함, 슬픔, 눈물은 그 기원이 하느님의 은총이기에 진정한 회심을 유도한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께 온전히 승복하는 회심이다. 이럴 때 비로소, 우리가 이냐시오에게서 발견할 수 있듯이, “주여, 나를 받으소서”(234)하고 자신을 봉헌하는 관대한 응답이 우러나온다. 

 

첫째 주간의 체험은 바로, 자신의 실존을 성서의 세계가 유도하는 정화의 세계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힘 앞에 전폭적인 선물로 내어 드리는 체험이다. 이 뒤에 따라 나오는 <영신수련>의 과정은 이 관대한 응답이 더 세련되고 성숙되도록 이끄는 여정이어야 한다. 이를 세 단계로 요약해 보자. 첫 단계의 기본 태도는 하느님의 사랑에로부터 움터 나오는 구원계획을 관상하면서,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자신을 펼칠 때 갖게 되는 마음의 태도이다. 이냐시오는 이 마음의 태도를 <준비기도>(46)에 표현한다. 이 준비기도는 늘 똑같다.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겸손과 존경의 마음으로 창조주이신, 엄위하신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자신을 펼치며 <영신수련>의 모든 묵상들을 전개한다. 

 

“준비기도는 나의 모든 의향과 행동과 노력이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그에게 봉사함을 위하여서만 마련되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는 것이다”(46). 

 

둘째 단계에서는 묵상을 통해 죄의 신비로 내려간다. 이는 자신의 죄스런 실존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하느님을 향한 투신으로 전환되도록 이끈다. 죄의 신비를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관점에서 묵상하고, 이 죄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는 자신의 죄스런 실존을 묵상하며, 피정자는 자신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 앞에 무한히 빚을 진 존재임을 인지하게 되면서 그분을 향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투신하기를 원하게 된다. 죄스런 실존 앞에서 슬픔에 압도된 그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오직 그분의 은총에만 의지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깊이 절감하게 된다. 

 

셋째 단계에서 구원과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서 자신이 대역 죄인임을 인식한다. 자신이 대역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어쩌면 그 순간을 감당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체험은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는 체험이 된다. 이냐시오에게 그러했듯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면서 엄청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첫 주간에 기대하는 영적인 체험이며, 첫 주간의 고유한 역동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적나라한 죄의 현실에 대한 체험은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거기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 비로소 영적인 의미를 지닌다. 죄의 공포 앞에서, 바로 그것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엄청나신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피정 지도자는 죄스러움의 체험 속에 깃들인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도록 피정자를 도와야 하며, 자신 스스로도 이러한 죄의 신비에 대한 체험을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Ⅵ. 나가는 말

 

이냐시오의 영적 세계관, 특히 <영신수련>에 담겨 있는 세계관의 입장에서 보면, 하느님의 구원계획이라는 지평 속에 놓여진 인간이 그분에게 부여받는 소명은 결코 죄의 문제와 별도로 이해될 수는 없다.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 오가는 사랑의 역동적 관계가 오히려 죄의 본질과 의미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죄란 우주와 인간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무질서의 힘으로서,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에 배은망덕하고 불충한 태도를 말한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부여하신 원래적 질서가 파괴된 무질서의 모습이 바로 ‘죄’이다. 그러기에 죄란 모든 창조물을 당신의 품안으로 이끄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창조물 속에 심어진 궁극 목적을 향하는 자연 본성을 인간에 의해 흩트리어 혼란 속으로 몰아 넣는 힘이며, 죄 자체도 인식치 못하게 만들어 인간으로 하여금 공포를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죄란 공포를 불러일으켜 끊임없이 사랑을 거슬러 행하도록 이끈다. 이냐시오의 관점에서 ‘죄’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죄의 기원과 발전을 생각한다면, 분명 ‘죄’란 인간의 입장에서 창조물의 원래적 목적을 거슬러 무질서하게 사용하는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행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간은 그 자체의 성스러운 성격을 오염시켜 죄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세상에 현존하는 죄의 현실을 다루면서 이냐시오는 그가 “인간 본성의 원수”라 부르는 매우 활동적인 실체를 언급한다. 원수인 사탄은 인간이 지닌 약점을 자신에게 이끌어, 그로 하여금 창조물을 왜곡되게 사용하도록 이끄는 ‘힘’이다. 죄의 힘은 인간이 그 자신 안에 갇혀 스스로의 노예가 되도록 이끈다. 악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창조물이 지니는 근본적 지향과 방향에 대하여 이냐시오가 지니고 있는 긍정적 통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신학과 사상, 26호(1998년 겨울), 심종혁(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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