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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의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 (7) 영화와 성경의 노아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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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斷想) (7) 영화와 성경의 노아 이야기
2014년 초에 개봉되었던 대런 에로노프스키 감독의 ‘노아’는 충분히 문제작이다. 독실한 신자들에게는 성경의 이야기를 함부로 판타지적 요소와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교묘히 섞어 놓아 불쾌감을 주었다고 논란이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본 영화 ‘노아’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성경 속에서는 하느님께로부터 ‘의인’이라 인정을 받고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일컬어졌던 인물이 영화에서는 인간을 멸망시키겠다는 신의 의지를 맹목적으로 받들고 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간에, 설령 가족이라 해도 제거해야 할 정도의 비인격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것도 꿈을 통해 알려준 계시를 일방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해석해 실행하는 노아의 모습은 결국 하느님을 비인격적이고 권위적이기만 한 존재로 그리게 된다. 영화 속의 노아는 인간을 멸망하겠다는 하느님의 의지를 따르기 위해 충실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며, 하느님의 의지는 자신뿐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도 해당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간에게도 희망은 줘야 한다.”고 믿는 가족과 “인간이 세상을 타락시켰으니 새 세상에 인간의 존재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신의 계시라고 믿는 노아는 갈등한다. 그래서 결국 가족의 입장을 받아들였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신탁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고 자괴감에 포도주를 과음하여 골아 떨어졌다는 설정도 성경의 본래 이야기와는 다르지만 재미있는 설정이기도 하다.
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월한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그래서 신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역설하는 ‘두발가인’은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하며 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노아와 충돌한다. 인간은 어느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그래서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기적이고도 오만한 생각이 현재 우리의 삶과 자연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경고도 감독은 빼놓지 않았다.
영화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철학적 입장은 휴머니즘과 반휴머니즘,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인간 중심적 사고’와 ‘신 중심적 사고’가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휴머니즘적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인 두발가인이 오히려 악당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고, 묘하게도 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노아 또한 신탁을 빙자하여 고지식하고 잔혹한 인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영화가 성경에서 모티브를 땄다고 꼭 성경의 관점으로 해석돼야 하는 것은 아냐
그리고 인류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서는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 즉 세상에 남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 아버지를 광신도로 여기며 노아와 대립하고 돌발행동을 하는 둘째 아들 함(로건 레먼)의 심리적 갈등에서 결국 독실한 가족을 떠나 혼자만의 먼 길을 떠나는 그의 선택에 기성종교에 대해 실망한 젊은이들과 우리 현실을 되돌아본다.
초대형 블록버스터의 영화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도, 또한 종교 영화로서 기대를 가졌던 이들에게도 이 영화는 별로 좋은 영화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노아’는 나름 철학적 메시지를 던지며 그 몫을 충분히 수행해내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성경에서 소재를 가져왔지만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적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본인이 유대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쉰들러 리스트’(1993)라는 영화에 투영시켰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멜 깁슨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라는 영화를 통해 절절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어떤 감독들에게 어떤 영화는 감독의 자의식을 영상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빼먹지 않고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내적 영감과 성경을 통해본 감독의 영성을 표현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3살의 나이에 노아에 대한 시를 써서 상을 받았던 다소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던 대런 에로노프스키 또한 어렸을 적부터 이 노아 이야기를 영상을 통해서 어떻게 표현해 낼 것인가 고민하면서 준비했던 영화가 바로 이 ‘노아’이다. 그는 오랜 시간, 자기 안에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인간과 신에 대한 물음을 온전히 자신만의 방법으로 구현했다.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재능이 결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는 아름다운 판타지 영화이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을 돕는 타락천사들과 신비한 능력을 지닌 현자로 묘사된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앤서니 홉킨스 역) 등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성경과는 많은 부분 동떨어진 판타지로 재창조됐다. 전반부가 웅장하고 화려한 부분이라면, 후반부는 심리극이다. 전반부가 많은 이들에게 시각적으로 충분히 인상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면, 반면 후반부는 완성도를 떠나, 호불호를 안길 자극적인 설정들이 나타난다. 노아가 창조주의 뜻을 실현하는 대리인에서 가족과의 갈등에서 내적 고뇌에 휩싸이는 “햄릿형 인간”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이 담긴 후반부야말로 대런 에로노프스키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영화가 성경에서 모티브를 땄다고 해서 꼭 성경의 관점으로 해석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하느님께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기에 하느님의 의지가 정말로 노아가 해석했던 것과 같은지 그 실체를 그려내기는 불가능하다. 단지 감독은 성경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영상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라면 이 점을 유념해서 보면 되겠고, 비기독교인이라면 영화가 이야기하는 고민들을 함께 고민해보고 성경 원작에서 설명하는 노아가 어땠는지를 한번쯤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당신께서 빚으신 창조물을 끝끝내 품고 가시겠다는 사랑의 고백
성경 속 창세기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의지는 인류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다. 노아 이야기가 나오는 창세기 본문에서도 하느님은 어떻게 죽일 것인가 만큼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 8장의 내용을 예로 든다면, 홍수가 계속되는 동안 노아는 참고 기다리다가 비가 그치는 걸 깨닫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내어 땅의 동정을 살핀다(8,7-8). 그러면서도 그는 또 삼 주간을 기다린다(8,10-12).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 지루한 인고의 세월을 마감해 주시고 가족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라고 분부하셨을 때, 노아는 그 즉시 배에서 뛰쳐나와 해방의 기쁨에 도취되어 날뛰기보다는 하느님께 제사를 바칠 생각부터 한다(8,20). 이를 보면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려 했던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주님께서는 번제물을 받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신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8,21)이라고 사람의 악한 성향을 인정하신다. 앞서 주님께서는 이 악을 보시고 무척 마음 아파하셨다(6,5-7). 그래서 쓸어버리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다른 관점을 취하신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이지만, 아담 때부터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는 경향이 고착되었음을 받아들이신다. 결국 홍수에도 불구하고 사람 자체의 본성에는 큰 변화가 없으리라는 점을 간파하신다.
그럼에도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8,21)고 다짐하신다. 이는 하느님의 새로운 결정이자 그분께서 뜻을 바꾸신 새로운 결정이다. 당신께서 빚으신 창조물을 끝끝내 품고 가시겠다는 사랑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리고 9장은 그 계약을 무지개라는 표징을 통해 보여주신다. 계약이란 쌍방 간의 충실한 상호신뢰관계에 의해 유지되어 나가는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7월호, 이동훈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상설고해전담)] 0 1,550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