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술ㅣ교회건축
본당순례: 부활 감수성 월영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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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순례] 부활 감수성 월영성당
‘월영’은 달그림자라는 뜻이다. 신라시대 때 격문을 써서 적을 퇴치한 당대 최고의 문필가 최치원이 유랑생활을 하다 말년에 머문 곳이 월영대이고 월영동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뛰어난 문장가이자 사상가였던 그는 신분의 벽을 넘기 위해 유학을 다녀왔으나 신분제도의 아성에 막혀 좌절하고 만다. 그의 비애와 천재성이 응집해 승화된 이름 월영, 그래서인지 월영 신자들은 저마다의 본성에 월영이라는 의미가 유입되면서 신앙의 감수성이 촉발한 것이다.
통일의 상징, 성모자상
살아서 바라보시는 주님
성전건립 때 드러난 일치의 기적
성전건립이 확정되자 전 신자가 양파를 캐러 간 적이 있었다. 종일 양파를 캐주고 받은 일당 3만원씩을 성전건립에 보태고 녹용엑기스도 팔러 다녔다.
공동체 안에서도 차별은 존재하고 그 차별은 끊임없이 배척과 배제를 낳으며 분열을 조장한다. 개인이 느끼는 차별이 가정공동체를 넘어 구성원에게까지 미치면 예수님과의 관계도 불편해지고 인간관계도 이와 같이 되어버린다. 성전건립은 이런 악습을 돌파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살면서 한 번도 머리를 조아릴 일이 없다가 녹용을 팔기위해 남편의 직장동료를 찾아가 굽실거리고 뙤약볕에 쪼그리고 앉아 종일 양파를 캤다. 환대만 받아오다 박대를 받아보고 심한 노동으로 온몸이 욱신거렸다. 예수님만 아니면 이 고생을 할 이유가 없노라고 투덜거릴 만도 하련만, 편하게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자성(自省)했다. 그리고 발설하지 않았다. 하나의 불평은 모두의 불평이고 하나의 찬사도 모두에게 해당되기에 끓어오르는 말들을 곰삭혔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건립기금을 대출 내거나 먼저 약정을 해 놓고 차차 갚아 나갔다. 이로 인해 신자들은 빚이 있지만 성당은 빚 하나 남기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바로 주님의 나라에 주님의 백성이 사는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성령이 사제의 몸을 통해 우리를 움직였고 우리는 그것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이것이 일치가 아닐까. 일치는 빠르게 번지며 신자들을 독려하였다.
부활에 기초한 월영성당
주소는 해운동이지만 월영동이란 이미지가 큰 이곳은 성당의 명칭으로 인한 혼란이 많이 생겨, 신자들에게 설문을 조사한 후에 2004년 9월 ‘월영성당’으로 변경했다. 대신 성당 명칭에서 ‘동’이란 글자는 빼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7월 노영환 마티아 신부님 때 지금의 건물로 신축하면서 가건물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바다가 매립되면서 땅이 생기고 그곳에 수천 세대의 아파트가 운집한 가운데 들어선 월영성당을 두고 흑자는 뜨내기들의 집합소 혹은 정체성이 없다고도 했다. 현대사회는 뜨내기가 중심세상이다. 직장 따라 환경 따라 떠돌다보면 끼리끼리 모이고 끼리끼리가 새로운 문화를 주도해 가면서 토착한다. 월영의 정체성은 ‘없는 것이 정체성’이다. 성인의 유해도 성전이 들어설만한 유래도 최초란 수식어도 없지만, 없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시작이 가능하다. 바다가 땅이 되고 그 땅 위에 세워진 성전처럼, 없음에서 있음으로 이어가는 것이 월영이고 그 중심은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신앙의 근간이라면 부활은 삶의 방향이고 그 삶은 밝고 활기차야 한다는 본당 사제의 말이 이제는 월영의 이미지가 되었다.
[2020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가톨릭마산 2-3면, 조정자 이사벨라] 0 1,852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