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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성서와 교회 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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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177

성서와 교회 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인

 

 

1.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1) 어떤 이는 "나는 나다."라고 쉽게 대답할지 모르지만, 이는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자식, 형제, 신부, 수녀, 그리스도인, 목사, 스님, 교사, 회장, 국회 의원, 회사원, 또는 고뇌하는 존재,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 등등의 답으로 평범하게 다룰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들은 모두 인간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나 후천적으로 습득한 가치관과의 '관계'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답은 '나'를 본질적으로 규명하는 정의가 될 수 없다.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철저하게 그런 관계에서 떼어놓아야 한다. 자신을 철저하게 홀로 세워 놓고 자신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많은 철학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내가 누구인지 또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했다. 프랑스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 P. Sartre 1905-1980년)가 그렇게 시도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존재와 무]에서 신의 존재를 강력히 부인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저 그 자체에 존재한다."2)라고 했지만, 결국은 "나는 모른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라고 역설하였다고 한다. 이 고백은 자신만을 홀로 철저하게 세워 놓고 누구인지를 알려고 했을 때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모순된 인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을 철저하게 홀로 세워 놓고서 누구인지를 물었을 때 어떠한 대답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자기 안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물을 때는 항상 '나와 너', 나아가 '우리'라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너'나 '우리'의 존재는 '나'라는 존재가 가지는 제한된 영역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너나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자가 요청된다. 이 존재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그 자체 안에 담고 있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esse subsistens), 곧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자존자(自存者)인 신(神)이어야만 한다.3)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기 밖의 존재인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다른 무엇이 아닌 하느님께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또한 자신이 이름 받아 불리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에게 규정된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물음이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 범위를 뛰어넘듯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인간인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욕망 그 이상의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한 세계와 인류의 정체성과 미래상에 대한 다양한 전망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한 전망들의 한편은 고도로 발달된 과학 기술이 몰고 가는 혁명적 변화의 물결에 '영혼을 빼앗긴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잘 표명하고 있으며, 또한 이를 우려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인간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 휘몰아치는 혁명적 변화의 흐름(flux)과 기질(temper)에 휩쓸려 '참 그리스도의 영혼'은 빼앗긴 채 '빈 껍질의 그리스도'만을 입고 살아가지는 않는가? 앞서 논의하였듯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관하여 묻지 않고서는, 또 이들과 관련 짓지 않고서는 어떠한 인간도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묻는다는 것은 '신학적 인간학'(theologische Anthropologie)을 정립하는 일이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묻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론적 인간학'(christologische Anthropologie)을 정립하는 일이다. 

 

새 시대를 향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원 의식을 고취시키고 그 정체성에 대한 지평을 넓히기 위하여 초기 성서 공동체를 비롯한 과거 교회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왔는지에 대하여 성찰하여 보자.

 

 

2. 성서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인간 - 하느님의 모상)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인'(christianus), 또는 '그리스도 신자'라는 명칭은 분명히 신약성서적 용어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을 성서 전체로 넓혀야 함은 온전한 정체성을 밝히기 위함이다. 성서가 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서 우선 구분하여 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과 기능적 특성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첫째로 '누구'이며, 둘째로 '무엇 하는 사람인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구약성서는 다분히 존재론적 특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신약성서는 기능적 특성을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약성서가 두 가지 특성 - 백성과 율법 - 을 모두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1) 구약성서

 

구약성서적 인간학의 핵심을 이루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이 하느님 모상(模像)'(imago Dei)이라는 가르침이다.4)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창세 1,26-27)

 

이는 창세기의 제관계 문헌과 지혜 문학의 몇 부분에만 언급되고 있지만(창세 1,26-27; 5,1; 9,6; 지혜 2,23; 집회 17,3), 구약성서 전체를 포괄하는 가르침이며, 구원사적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이 창조의 목표이며 정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곧 인간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에 놓여 있다. 그렇다고 인간이 하느님의 '동업자'나 '자식'은 아니다. 하느님 모상으로서 인간은 인간 이하의 여느 피조물과 구분되며 하느님과 함께 좀더 높은 차원에 속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일 뿐이므로 하느님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구약성서 신학자들은 제관계 문헌의 근본 구상은 인간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이 "어떻게 부름을 받았는가?" 하는 데 있다고 본다. 곧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창조적인 행위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 대한 왕적이며 신적인 하느님의 독보적 행위가 그 관심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의 저자는 인간의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관심을 보이면서 인간이 누구인지, 곧 인간이 신적 존재와 유사함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의 하느님과 유사성은 외적인 육체만의 유사성이나 순수 영혼만의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영육의 전체성에서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되었음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로써 구약성서의 핵심 사고에 접근한다.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 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시편 8편)

 

이렇게 인간이 세상 안에서 특별한 품위를 지닌 존재로서 하느님의 주권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권능을 수행하는 자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대리인이고, 그런 존재로서 자유롭고 영적인 인격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인류가 비록 타락하여(창세 3장) 죄로 기우는 경향과 고통과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함으로써 인간의 하느님 모상이 내포하는 기능적 특성은 퇴색되어 구원받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그의 존재론적 품위는 손상되지 않았음을 구약성서는 말하고 있다.

 

2) 신약성서

 

신약성서의 전체 관심사는 사람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자기 계시의 충만과 완성, 그리고 최대 정점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가 모든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제시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일어난 모든 사건은 인간 모두 안에 일어나는 가장 핵심적인 사건인 것이다. 라너(K. Rahner)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인간 최대의 사건'(Hochstfall)이다. 

 

신약의 사도 바오로는 구약의 핵심(인간 - 하느님의 모상)을 자기 신학의 주요 주제로 삼아 그리스도의 구원적 기능에 질서 지우고 있다(골로 1,15-20; 2 고린 4,4; 히브 1,3). 그리스도 홀로 하느님의 참 모상이시다. 신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분은 사실상 하느님의 원상(原象)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로 퇴색된 모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동시에 이를 완성시키신다. 하느님 모상은 이제 그리스도 모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골로 1,15 이하) 

 

…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2 고린 4,4).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히브 1,3)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으로서 창조의 중개자이시며(인간인 그리스도의 기능적 특성), 완전한 인간으로서 창조의 목표이시다(존재론적 특성).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양면적 특성을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순명으로 완수하신다(필립 2,6-11; 골로 1,15-20). 여기서 우리 인간의 하느님 모상은 은총과 신앙 가운데 그리스도의 하느님 모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서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완전한 모상에 참여하게 되고(2 고린 3,18), 아들의 모습과 한 모양이 되며(로마 8,29), 나아가 하느님의 아들 신분을 받게 되어 그분을 '아빠, 아버지'라 외칠 수 있으며(로마 8,14-15), 이렇게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생명 은총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로마 8,17; 히브 6,12; 1베드 3,7.14; 갈라 4,7). 

 

인간은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한 공동체를 이루는 데서, 인류의 죄 때문에 타락한 품위를 다시 얻으며(로마 1,23; 3,23), 비로소 '하느님의 모상'이 된다. 다시 말해 첫 창조가 완성되는 두 번째 창조에서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의 모상이 된다(2 고린 4,4-5; 골로 3,9 이하; 에페 4,23 이하). 동시에 첫 인간의 하느님 모상(구약성서적 인간 - 하느님 백성)은 바오로에게서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한 두 번째 인간의 하느님 모상(신약성서적 인간 - 그리스도인)보다 한 단계 아래에 서게 된다(1고린 15,45-49).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며, 원초적 모상인 아담은 완전한 모상인 그리스도의 예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원초적 모상이 상실한 인간의 기능적 특성을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셨기 때문이다. 아담적 모상이 구원의 시작이라면 그리스도적 모상은 구원의 성취와 완성인 셈이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참다운 하느님의 모상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이루어진 현재와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종말론적 완성(jam sed nondum) 사이의 긴장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최종적인 공적 계시로서 성자의 육화 사건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서기 원년). 성자의 육화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 포함된 인간이 받을 품위를 위한 필연적 사건이다. 이는 새 하늘 새 땅, 새 창조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지속적인 유효성 안에서 새 계약과 새 계명을 선포하시고(마태 1,1-17; 4,12-16; 5,13-48; 7,12; 15,24.26; 21,33-46; 22,34-40; 26,26-28; 마르 7,27; 루가 4,16-21; 요한 1,17; 8,58; 13,15.34 등), 이를 자신의 공생활, 수난, 죽음, 부활, 승천 사건, 곧 인류 구원 사건으로 완성하신다. 신약성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공생활 중에 제도적이고 가시적인 교회를 제정하신 것으로 본다(마태 16,18; 18,17).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교회는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름의 공동체'였다(마태 16,24-25), 여기에는 어떠한 모양의 명예나 권력 다툼(마태 18,1-4; 20,20-28; 마르 9,33-35) 등의 야욕은 허용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교회 창설 의지는 첫째, 공동체의 본질적 요소인 예배와 기도를 통한 믿는 자들 사이의 사랑과 일치와 증거의 삶이요(마태 16,19; 요한 13,35; 17,6-26), 둘째는 공동체와 인간과 세상에 봉사이다(마태 20,26-28; 요한 20,23 참조).5) 예수님을 '따름의 공동체'가 그리스도께 마지막으로 부여 받는 교회 존속의 본질적인 사명은 바로 파견과 선교이다(마태 28,19-20; 마르 16,15-16). 이로써 예수님의 교회 창설 의지는 본질적인 세 가지 사명으로 요약된다. 이들은 교회 공동체(Koinonia)의 존재 이유이며 본질이다. ① 케리그마/마르튀리아(Kerygma/ Martyria):파견과 증거, 복음 선포의 사명. ② 레이투르지아(Leiturgia):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찬미, 영광, 곧 전례와 성사를 통한 인간의 성화. ③ 디아코니아(Diakonia): 세상과 인류에 대한 봉사. 이 세 가지가 바로 성서 공동체가 확립한 그리스도인 정체성이다. 초기 제자 공동체는 파견과 선교의 사명을 승천한 예수님의 지상 명령으로 깨달았다. 물론 여기에는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예수님의 확고한 약속(마태 28,20)과 모든 것을 깨우쳐 주고 이끌어 주실(요한 15,26-27; 16,12-15) 성령 강림 사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사도 2,1-36). 바오로의 개종과 더불어 초대 교회 제자들의 선교 활동은 그들의 열성적 사명감과 성령의 도움으로 삽시간에 큰 성과를 올린다.

 

 

3. 교의사적 고찰

 

지난 2000년의 교회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교는 세계 역사를 주도했던 유럽 역사의 정신적인 지주가 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거기에는 인간이 하느님 모상이라는 성서의 핵심 주제가 큰 몫을 담당했다. 이 주제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전체를 통틀어 기본 주제가 될 수 있었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에게서부터 하느님의 모상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주제였다. 동시에 고대 동양과 고대 그리스, 그리고 후기 유다신학의 사상적 조류와 논쟁하는 가운데 이 주제는 큰 쟁점이 된다. 많은 신학자들은 사도 공동체와 초기 교회 공동체가 처음에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인간 이해에 따른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었는데 후에 희랍 철학과 이단자를 만나면서 왜곡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 견해는 일방적이기도 하지만 제법 지배적이기도 하다. 

 

초기 교회는 소수 집단에 불과했고, 신약성서의 사도 서간들이 잘 말해 주고 있듯이 아직도 극복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복음 선포를 위한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교회가 다른 소수 집단 가운데 하나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 계속 살아 남기 위해서는 범우주적 보편성을 가져야만 했던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범우주적 보편성이란 구체적이고 지엽적인 그러나 인간 최대의 사건인 '나자렛 예수 사건'이 인류의 사건이 되도록 하는 보편화와 복음의 합리화를 뜻한다. 곧 초기 교회는 적어도 당대의 복합적인 보편성에 적응해야 자신의 사명 완수는 물론 '예수님을 따름의 공동체'로서 존속할 수 있다고 각성했던 것이다. 사실상 원초적 복음 자체가 이미 보편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 이 요소가 팔레스티나의 협소한 경계를 넘어 보편적 전교로의 도약을 가능하게 하였다.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은 '역사'를 요구하고, 이 역사가 한 국가의 종교라는 범주를 뛰어넘어 인류 전체를 하나의 실재로 볼 수 있게 하였다. 특히 복음의 종말론적 성격은 역사의 완성을 내다보면서 이스라엘에 주어진 하느님의 약속이 곧 세상의 모든 백성을 위한 약속임을 고백하게 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이 다른 문화권에 소개되어야 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빠른 성취와 완성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자(이른바 재림 지체 현상) 지속되는 역사를 위해 복음은 매번 새로운 작업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특별한 성격을 띤 복음이 지속되는 역사와 서로 다른 문화권에 적응되기 위해 매번 새로이 피력되고 가능한 보편적 성격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하는 운명 속에서 합리화 또는 반성이 요구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신학'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당대의 복합적 보편성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리스 정신에 따른 철학적 보편성, 그리고 로마의 제국적 행정에 따른 정치적 보편성에 적응하는 것을 말한다(그리스-로마적 적응!). 결국 당대의 복합적 보편성에 적응하라는 요청은 교회 안에 권위주의적 '교계 제도'(敎階制度; Hierarchia)를 설정하게끔 하였고, 동시에 신앙의 학문인 '신학'(神學; Theologia)을 탄생시켰다. 이제 신학이 그 적응 수단으로 사용된다. 적응은 무리 없이 그러나 심도 있게 진행된다. 신학은 지금까지의 유다-그리스도교 전통과 구체적인 그리스도 사건을 그리스의 이성 세계로, 아테네의 보편적 철학적 사고로, 신플라톤주의의 역동적 사변적 존재론으로, 그리고 로마 제국주의적 행정 원리와 세계관으로 전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여기서 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복음을 공식적인 이성 앞에 '참된 진리'로 증명한다. 이로써 신학은 끊임없는 내외적 논쟁과 씨름을 시작하게 된다. 초세기의 희랍, 로마 교부들은 신학을 공동체의 신앙 교육자로 발전시켰으며, 교회 제도가 그 감독자가 되었다. 외향적으로는 신학을 논쟁에 항거하는 호교론적 '법정'이 되게 하였고, 교회 제도를 그 재판장이 되게 하였다. 신학과 교회 제도의 우선적 과제와 기능은 곧 신앙의 정립과 옹호였다.6)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범우주적 교회로 상승되어 로마 제국 위에, 나아가 방대한 제국의 국교로 군림하게 되었다. 로마를 거점으로 가톨릭 교회는 중세(4-13세기) 말기까지 이 시대의 역사가 '가톨릭의 역사'로 불릴 만큼 유럽 전 지역으로 퍼져 나가 국가, 정치, 사회, 문화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자리잡는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신학을 근거로 하여 실제로 각 시대에 맞는 그리스도교 믿음의 법적 정당성을 피력하였다. 정당성이 본래 부당성을 전제로 하듯이 교회는 내외적 정당성 논쟁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이단 파문과 교회 분열의 아픔을 감수해야 했으며, 많은 폐단과 오점을 역사에 남기기도 했다. 아무튼 교회의 권위는 신학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 대한 합법적 해석을 결정하는 기준이며 척도로 자리 매김된 것이다. 

 

신학과 교회 제도가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시각의 지평을 넓혀 주었고 그 내용을 풍요롭게 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교회의 실질적인 측면에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철학과 형이상학을 근간으로 한 신학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서 떼어놓았고, 제도는 일찌감치 그리스도인 사이에 불평등을 조장했다. 바로 라이쿠스(laicus)란 용어로 평신도를 성직자와 구분한 것이다. 초대 교회 이후 20세기를 거쳐 오면서 평신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평신도가 교회 안에 최하위 지위로 다스림의 대상이었다는 사실로 점철된다. 이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한마디로 20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본질적인 그리스도인 정체성에 관한 성찰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다행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를 계기로 평신도에 대한 편협한 이해와 그 위상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공의회는 "교회헌장"에서 교회 안에 직분상의 교계 제도를 언급하기에 앞서 신약적 의미의 '하느님 백성'이라는 표제를 채택하여 세례와 견진성사에 의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반적 사제직'이 '특수 사제직'에 우선함을 천명하고 있으며, '평신도' 장을 따로 두어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삼중 직무를 가진다고 밝힌다. 나아가 평신도에 관한 고유한 교령을 발표하여 구체적인 사도직 수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리스도인

 

20세기를 접으면서 우리는 본질적인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사도직은 교회의 구원 사명 자체의 한 부분이며, 주님께서 친히 세례와 견진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이 사도직에 부르시는 것이다(교회헌장, 33항).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하느님 백성의 산 지체로서 창조주께 받은 선물과 구세주께 받은 은총으로 교회의 발전과 그 끊임없는 성화를 위하여 자신의 힘을 다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사도직 수행의 권리와 임무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 받으며, 사도직의 효과 또한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일치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 맡겨진 전 사도직의 원천은 성부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므로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평신도 사도직의 풍요한 결실은 분명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일치에 달려 있다"(평신도 사도직 교령, 4항).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결합된 이 생활은 다름 아닌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된 영적 생활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 살아 있는 다양한 영적 수단으로 양육되고 신/망/애 삼덕으로 무장함으로써 현세 임무를 올바로 수행할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평신도에게 영적 생활과 현세 생활은 서로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법적인 삶은 슈마우스(M. Schmaus)가 말하듯이 '신앙의 가시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 사도직은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다양한 형태로 수행될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형태가 바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 곧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참여하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인의 사제직:이는 교회가 가지는 성화의 임무(munus sanctificandi)로서 교회와 세상의 성화와 성삼 하느님께의 영광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당신 생명과 사명에 밀접히 결합시키시며 당신 사제직의 일부도 맡기시어,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영신적 예배를 드리도록 하셨다. … 그들의 모든 일, 기도, 사도적 활동, 결혼 생활, 가정 생활, 일상 노동, 심신의 휴식 등을 성령 안에서 행하며, 더구나 생활의 번민을 인내로이 참아 받는다면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뜻에 드는 영적 제물이 될 것이며, 미사 때에 주님의 몸과 함께 정성되이 성부께 봉헌될 것이다"(교회헌장, 34항). 그리스도인의 영적이고 현세적인 삶은 그 자체가 하느님께 올려지는 예배이며 제사이다. 

 

2) 그리스도인의 예언직:이는 교회가 가지는 가르치는 임무(munus docendi)로서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Kerygma)와 증거의 삶(Martyria)에 참여하는 것이다. 복음 선포와 증거의 삶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가지는 권리이며 임무이다. "생활의 증거와 말씀의 힘으로 성부의 나라를 선포하신 위대하신 예언자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을 완전히 드러내실 때까지 당신의 예언직을 수행하시되 …(그리스도인을) 증인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신앙의 마음과 말씀의 은총을 주시어(사도 2,17-18; 묵시 19,10), 그들 가정과 사회의 일상 생활 가운데서 복음의 힘이 빛나도록 하시었다"(교회헌장, 35항). 공의회는 그리스도인이 예언직에 참여하는 수단을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증거의 삶'과 '말씀의 힘'으로 이해하며, 하느님께서 이를 '신앙의 마음'과 '말씀의 은총'으로 굳세게 해 주실 것을 믿고 있다. 아울러 공의회는 예언직분의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속해 있는 그리스도교적 결혼과 가정의 숭고한 가치를 깨달아 그들의 현세적 삶이 세상의 빛과 땅의 소금이 되기를 권고하며, 둘째는 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나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의 예언직을 수행할 것을 촉구한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은 실로 이 세상 안에 살아 있는 진리의 증거자며 예언자이다. 

 

3) 그리스도인의 왕직:이는 교회가 가지는 다스리는 임무(munus regendi)로서 교회와 인간 및 세상의 봉사직(Diakonia)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명하셨으므로 성부께 들어 높임을 받으시고(필립 2,8-9) 당신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셨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복종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드디어 당신 자신과 이 모든 피조물을 성부께 복종시키심으로써 하느님을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이 되시게 하실 것이다(1 고린 15,27-28).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권한을 당신 제자들에게 주시어, 그들도 왕다운 자유를 누리며 극기와 거룩한 생활로써 죄가 자신들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고(로마 6,12),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겸손과 인내로써 자기 형제들을 그리스도 왕에게 인도하게 하셨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은 바로 왕권으로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당신 왕국을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확장시키고자 하신다"(교회헌장, 36항). 그리스도의 왕직에 우리가 참여함은 이 세상을 참다운 가치로 이끌며, 세상을 하느님의 질서 아래 두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왕국의 통치는 권력이나 명예, 폭력과 억압, 부정과 비리, 착취와 치부가 아닌 진리와 사랑과 봉사이다. 무엇보다도 사랑과 봉사는 그리스도 왕국의 헌법인 것이다. "너희 가운데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28). 

 

이렇게 그리스도인 각자는 현세에서 주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어야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표지(標識)이어야 한다. 다함께 또는 각기 자기 몫을 따라 영신적 열매 를 맺음으로써(갈라 5,22) 세상을 길러 주고, 주님께서 친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선포하신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의 정신(마태 5,3-9)을 세상에 전파해야 한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육신 안에서 영혼의 역할을 세속 안에서 완수해야 한다(교회헌장, 39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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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기둥에 새겨져 있었다는 "너 자신을 알라!"(gnothi sauton!)라는 요청에 선행되는 질문이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시도가 철학의 시작이다. 미카엘 비트쉬어(M. Wittschier), [철학의 모험], "나는 누구인가?", 서유석 옮김, 동녘, 1996년 참조. 

 

2) "Existieren, d. h. einfach: dasein." Religionskritik von der Aufklarung bis zur Gegenwart, hrsg.v. K.H. Weger, Freiburg, 1979년, 272면 참조; [세계 철학 대사전], 성균서관, 1979년, 475-476면 참조. 

 

3) 토마스 데 아퀴노에 따르면 다음의 다섯 가지 철학적 명제들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① 제1원인(prima causa), ② 제1원동자(prima remota), ③ 자존자(esse subsistens), ④ 필연자(esse necessarium), ⑤ 시간상의 순수 현재태(pura praesentia). 

 

4) 독일의 신학자(구약학) 한스 발터 볼프(H. W. Wolff)는 1973년에 저술한 [구약성서의 인간학](신학 총서 제10권, 분도 출판사, 1976년)에서 구약성서에 의한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과 기능적(사회학적) 특성을 시간과 공간의 개념과 연결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5) T. Schneider, Handbuch der Dogmatik, Bd. 2, Dusseldorf, 1992년, 70면. 

 

6) P. Eicher, Theologie. Eine Einfuhrung in das Studium, Munchen, 1980년, 72-89면. 

 

[사목, 2000년 2월호, 박상대(부산 가톨릭 대학교 교수, 신부, 교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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