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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한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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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180

한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1. 머리말

 

본 주제는 신학적인 전문 지식도 없고 사목상의 실제 경험도 없는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운 문제여서, 그에 관해 논하려고 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앞설 따름이다. 그러나 그 동안 신앙 생활을 해 오면서 체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철학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고해하는 자세로) 솔직하게 진술하는 것이 아마도 필자에게 맡겨진 과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1) 

 

필자에게 주어진 논제가 "한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것인데, 이 주제를, 우리는 근세 이후의 일반적인 태도, 곧 분석적, 실증적, 비판적 태도로 다루지 않고, 오히려 종합적, 직관적, 사변적 태도로 다루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 현대 철학의 무슨 주의니 무슨 입장이니 하는 것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구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 또는 가톨릭적 예지에 의거해서 다루고자 한다. 

 

'한국 그리스도인'에 관한 본 주제는 '한국'이라는 요소와 '그리스도인'이란 요소의 복합으로 되어 있는 어려운 것이다. '그리스도인' 자체는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 두루 타당하는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데(이것은 특별히 우리의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더욱 타당하다.) 반하여, '한국 그리스도인'은 한국의 특정한 역사와 사회적 상황 안에 있는 '특수적'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얼핏 보면, 우리의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일반적 원리가 한국이라는 특수한 여건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실현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서, 원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제적, 기술적 문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2)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원리상으로는 당연히 '보편 교회'로서의 그리스도교가 우선이지만 현실적으로 그 보편 교회는 지역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실존하는 '특수적 교회들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경우에, 보편과 특수의 관계, 그리고 이념적 타당성과 실재적 현실성 관계가 심각한 문제로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정체성'이란 것을 두고 보더라도, 그것이 죽은 것이 아닌 '살아 있는' 존재, 더구나 인간의 정체성인 한, 역사와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변하고 발전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변천과 발전으로 또한 자기 동일성과 정체성을 유지해 가는 그러한 정체성인 것이다. 곧 그리스도인들, 나아가서 이들의 집합으로서 그리스도 교회의 정체성은 변화성 안에서 동일성, 또는 동일성 안에서 변화성이라는 변증법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또한 정체성이란 것은, 단지 추상적인 이론으로써 다루어질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어서,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의 '영혼의 숨결'이며 우리의 '몸의 피'와도 같은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은 화석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이 일깨워지고 우리의 행위와 삶으로 끊임없이 확인(증거)되고 또 새로이 창조되어야 할 역동적, 실천적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사명 의식, 또한 그에 바탕한 우리의 실천과 삶 속에서 비로소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현실적으로 살아 계시게 되는 것이다.

 

 

2. 한국 그리스도인이 안고 있는 어려움들

 

그런데 한국 그리스도인은 매우 큰 어려움을 안고 있다. 곧 우리에게는 첫째로 '옛 것'과 '새 것'의 대립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낡은'(오래된) 그리스도교의 이데올로기가 오늘날의 변화된 '새로운' 현실과는 대립한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교의 초월적 차원은 철저히 세속화(내재화)된 오늘날의 세계와, 또 그 정신적, 영적 차원은 오늘날의 유물주의적인, 그리고 물화(物化)된 세계와는3) 도저히 맞지 않는다는 데에,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의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오늘날 모든 사람이 - 특히 IMF 이후 우리 나라에서 - 새 것과 변혁을 그 자체로서 절대적 선으로 보고 이에 대해 옛 것과 전통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 악으로, 또는 적어도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교, 특히 옛 전통을 충실히 지키려는 가톨릭교는 오늘날의 시대적 주제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우리는 옛 것과 새 것의 대립에서 오는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의 어려움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 한국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일반적'인 어려움 외에 '또 하나의 다른' 어려움을 갖고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외래의 것 '남의 것'으로 보여지고 그에 비해 유교, 불교, 도교 (그리고 무교)를 '우리 고유의 것'으로 중시하려는 태도가 한국인의 일반적 의식 속에 깊이 박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 특히 보수적인 지역에서 - 전교에 나설 때 부딪치는 큰 어려움이 바로 이것이다. 두 이념 체계가 '우리 것'이냐 '남의 것'이냐 하는 대립 구조 속에서 마주치고, 또 거기에 사대주의니 문화적 주체성이니 하는 선동적인 구호까지 끌어들이면, 그 결과는 자명해진다. 바로 여기에 그 고유의, 그리고 고도의 전통적 문화와 종교를 갖고 있는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의 존립과 성장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3. 그러한 어려움들에 대한 비판과 평가

 

이처럼 이중의 어려움, 곧 옛 것과 새 것의 대립에서 오는 어려움과 또 내 것과 남의 것의 대립에서 오는 어려움 속에서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활로를 찾아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원칙을 먼저 확정해 둘 필요가 있다. 곧 첫째를 옛 것과 새 것의 대립 구도에서 오늘날 흔히 생각하듯이 옛 것은 옛 것이란 이유만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 각기의 안에, 오늘날의 표현법에 따르자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과연, 그리고 얼마만큼 실현되어 있느냐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내 것과 남의 것의 대립에서도 중요한 것은, 각기의 안에, 진선미 같은 고급의 보편적인 정신적 가치들이, 또는 인간의 존엄성 등이, 과연 그리고 어느 정도로 실현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하느님 말씀의 진리를 믿고 또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원칙적으로 내 것과 남의 것의 대립, 옛 것과 새 것의 대립 구도를 이러한 차원에서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가장 큰 이유이며 우리의 존재 이유(raison d' etre)이다. 

 

이제 시각을 좀 달리 해서, 일반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 공동체의 삶과 역사의 관점에서 우리의 주제를 살펴보자. 만일 한 생활 공동체가 남의 것을 모두 배격하고 오직 자신의 것만을 지키고 키워 나가려는 태도로 그들의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 공동체는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며 결국에는 멸망해 버릴 것이다. 곧 한 민족 공동체가 그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 보존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근본 조건은 그 바깥 다른 민족 공동체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교섭하여 이들의─자기들에게는 없는─적극적인 가치들을 자신 안에 받아들여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동화함으로써, 자신을 더욱더 새롭게, 더욱더 풍요롭게, 더욱더 온전하게 발전시켜 가는 것이다. 또한 한 공동체가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그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해야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동일성을 줄곧 유지하면서 또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앞에서 지적했거니와, 이것은 다른 면에서 본다면 '옛' 전통의 보존과 '새로운' 것의 창조의 변증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곧 한 공동체가 신의 경우처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유에서 곧 주어진 전통에서, 또는 전통을 바탕으로 한 창조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옛' 전통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며 조건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전통은, 아무리 그것을 옛적의 모습 그대로 지켜 나가려고 하더라도, 시대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전통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새로운 시대적, 역사적 상황과 사정에 맞게 변용(變容)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전통의 일반적인 운명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통은 도태되어 소멸하고 만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생활 공동체가 옛 것(전통)을 바탕으로 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또 새로운 것을 그처럼 창조해 나가면서 그 과정과 그 결과 속에서 자기 동일성을 전통에 따라 확립해 나가는 삶의 법칙을 확정해 둘 수 있다.4) 이처럼 일반적으로 생명 현상이, 내 것과 남의 것, 옛 것과 새 것 간의 끊임없는 교호 작용 또는 변증법적 통일(예컨대, 생명체의 신진 대사 작용)이라면, 위에서 지적한 한국 그리스도교의 이른바 이중의 어려움은 이 점에서 볼 때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또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뒤따라 져야 할 그리스도교 교회가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것은 더욱더 당연하다. 이와 반대로 아무런 어려움도 난관도 없는, 따라서 지극히 평안하고 안이한 교회, 곧 '십자가 없는 교회'는 그 자체 모순인 것이다. 

 

여기에서, 유/불/도교는 우리 고유의 것인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외래의 것이며 남의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기로 한다. 우선 유/불/도교도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고 외국에서 유입되었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우리 안에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동화시킴으로써' 우리 것으로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 우리의 민족 문화가 그만큼 더 발전하게 된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야만족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한족이나 일본족에게 흡수되고 말았을 것이다. 남의 것, 이질적인 것에 대한 우리 선조의 이러한 지혜로운 개방적, 포용적 태도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교에서 보편적인 인권과 보편적인 인간 사랑, 개인적 인간의 자유, 독립, 평등 그리고 존엄성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민족의 문화가 더 한층 발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남의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리스도교가 우리 한국의 경우에는 우리 선조들이 그분들의 자유 의사에 따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찾아 얻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히 '남의 것'으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로 '구해서 얻은' 이 귀중한 신앙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그 혹독한 핍박과 박해 속에서 만 명이 넘는 신앙 선조들이 그들의 고귀한 피를 그리스도교에 바쳤으니, 그 결과 신앙의 자유를 얻어 그것을 우리의 종교로 공인받게 되고, 드디어는 103위 성인을 우리 땅에서 배출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 그리스도교가 그 동안 200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서 한국의 역사 속에서 훌륭한 업적과 귀중한 공헌을 쌓아 왔다(양반과 상인, 남자와 여자, 적자와 서자 등의 차별 철폐와 미신의 폐지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유/불/도교는 우리의 것인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외래의 것이며 남의 것이라는 식의 생각을 하는 것은, 전체 사리에 맞지 않을 뿐더러 '우리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 죄는 일반적으로 한국인이 가장 큰 죄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이다. 그러나 보편성과 불변성을 그 정체적 특질로 하는 진리에 대해서, 그것이 새 것이 아니고 옛 것이어서, 또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어서 배척되어야 한다는 발상법 자체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4. 그리스도교의 보편성과 특수성 안에서 규정되는 한국 그리스도교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교적 진리는 어떤 특수한 민족이나 어떤 특정한 계층에, 또한 어떤 특정한 시대나 사회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별과 차이를 넘어서 만인에게 두루 그리고 불변적으로 타당한 보편적인 것이다. 더구나 우리 가톨릭교에서는 이러한 보편적 교회의 원칙은 바로 그 자신의 정체적 특질인 것이다. 이런 원리적 관점에서 보면 그런 보편 교회와 구별되는 특수적 교회로서의 한국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특수적 교회들은 하나의 보편적(가톨릭) 교회의 부분이며 지체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하나의 보편 교회가 현실적으로는 -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또는 민족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 특수 교회들의 다양한 모습으로 현존한다는 것도 또한 부정 못 할 사실이다.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진리는 구체적으로는 역사적, 사회적 제약의 측면을 강조하게 되면 '이념적 보편성'의 계기는 점점 희박해지고 '사실적인 특수성'의 계기만 일방적으로 부각되게 되고, 이것은 그 자체 종교에 커다란 위험 요인으로 된다. 이 연관에서, 우리는 이러한 '현실적인 특수성'이 '이념적인 보편성'을 결코 능가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정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공번된 교회로서 가톨릭 교회의 정체성이 무너져 버린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근세 이후의 점증하는 역사적 사고의 추세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교회도 그 자신의 구원 사업의 '역사적 성격'을 점차 주목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시대의 징조'를 알아 그에 맞추어 복음을 가르치고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교 교회의 원래 사명에 충실하는 것으로 된다. 불변적인, 영원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그때 그때의 역사적 상황과 필요에 맞게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교회가 반드시 따라야 할 원칙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또한 그리스도교 교회의 모습도 역사적 변천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영원하고 불변적이어야 할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으로 변천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역사적 발전 또는 역사적 사명의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나머지 그의 '초자연적, 불변적' 성격을 간과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곧 시간성, 역사성 안에 있는 교회의 모습만을 보면서, '초시간성, 영원성'의 차원 속에 놓여 있는 교회의 모습을 놓쳐서는 결코 안 된다. 특수한 것 안에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철학'으로서의 가톨릭 철학의 기본 입장이기도 하다.

 

 

5. 두 가지의 대립되는 인간 이념

 

- 자연과 문화의 대립과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 -

 

이제 우리는 관점을 바꾸어 인간 자신을 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순수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곧 형태학상으로나 생태학상으로 볼 때, 인간은 그의 자연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그리하여 자연 - 외적 자연이든 내적 자연이든 - 에 인위적인 변경을 가하여 문화와 역사를 창조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는, '문화적, 역사적 존재'라는 점이 이 방면의 연구에서 부각되고 있다.5) 이러한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오늘날의 인간학이 그것을 심신 통일체로서 '인간 존재의 전체적 구조에서' 입증한 것이 새로운 점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더니즘의 근본 취지인 인간의 문화성과 역사성이 오늘날 인간 소외, 환경 파괴, 생태계 경시 등의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 결과, 이런 것들을 극복하는 방안으로서, 역사와 문화의 전략을 버리고 원시와 자연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제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세 이후 줄곧 고수해 왔던, 자연에 대한 정복과 착취의 태도 대신에 '자연과 조화되는, 자연을 따르는, 그리하여 자연의 일부분으로 되는' 그런 방식의 삶이 오늘날 예찬되고 있다. 문화 대신에 자연이 절대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자연 및 자연적 생명 일반의 중시 가운데서 인간 공의 정신적 인격이나 영적 존재에 대한 존중은 인간 중심적 편견과 오만으로 배척되기 쉽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문화와 역사를 절대시하는 것에 못지 않게 '일반적'이고 위험하다. 문화를 절대시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자연을 절대시하는 것도 잘못일 것이다. 엄밀하게 자연을 따르고 그 일부분이 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법칙 자체를 부정하며 인간 됨을 포기하는 것이다. 생물보다 무생물이, 또 인간보다는 동물이, 나아가서 동물보다도 식물이 더 한층 자연을 충실히 따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극단적인 자연 예찬론자의 자연 개념이 또한 매우 애매 모호하다. 예컨대 도가의 자연은 고도의 도덕성을 띤 문화적인 것이지, "단순한 자연은 결코 아니다." 요컨대 우리가 갈 길은, 일방적인 문화 예찬론도, 일방적인 자연 예찬론도 아닌, 양자를 종합 지양하는 것, 곧 자연과 문화를 좀더 큰 틀 안에서 조화시키는 것,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연을 바탕으로 해서, 또 그 법칙에 따라서, 그리고 그 테두리 안에서"6) 문화와 역사를 창조하는 길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다양한 삶과 상이한 문화의 현실에 직면해서, 우리는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올바른 것, 참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에는 두 가지 대답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올바르고 이상적인 규범과 이념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하나의 것이 있을 따름이라는 계몽주의 입장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획일적인 문화와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시대와 사회와 민족에 따라서 각기 서로 다른, 그러면서도 각자 그 고유의 의의와 가치를 지닌 다양한 인간과 문화가 있을 따름이라는 낭만주의 입장이다. 계몽주의는 인간과 문화에서 보편성과 통일성은 중시하되 그 차별성과 다양성을 무시하는 폐단을 갖고 있고, 낭만주의는 이와 정반대의 장단점을 가진다. 언제나 전체를 공정히 볼 줄 아는 가톨릭적 예지는 이 경우에도, 양자를 종합 지양할 것을, 곧 '다양 가운데서 통일'을, 또 '차별 가운데서 일치'를 추구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문화적 다원주의'의 오늘날의 세계에서, '문화적 차이성'이라는 구실 아래에서 모든 것이 용납되는 무분별한 관용주의, 무관심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가 만연하는 이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갈 길은 이 길밖에 없다. 사실 '다양 가운데서의 통일' 사상은 라이프니츠(Leibniz)가 주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보다 훨씬 앞서 토마스 데 아퀴노가, 피조물의 세계를 논하는 자리에서, 명백히 피력하였다. "사물의 구별과 다수성은 제1 작용자(능동자)인 하느님의 의도에서 있게 된다."7)라고, 거기에서는, 천명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볼 때 각기 상이한 삶과 문화와 인간이 있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의도 속에 근거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각기 상이한 그리고 다양한 피조물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에서 나온 것으로 이 점에서 또한 동일하므로, 같은 논리로 다양한 인간과 문화도 동일성 아래로 수렴될 수 있다. 이것이 '다양 가운데서 통일'의 전략의 신학적 근거일 것이다. 물론 '다양 가운데서 통일'을 이룩해 내는 것은 힘들고 어렵다. 그러나 힘들고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특히 그리스도인의 지상 과제이다.

 

 

6. 맺음말:한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자각의 필요성

 

그런데 이상의 논의는 일반적 그리스도인에 한한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서, '한국 그리스도교'를 주목해 볼 때, 우리는 문화 일반의 법칙에 따라 그리스도교를 '토착화'해서 그것을 '우리 것'으로 한 것이 곧 '한국 그리스도교'인가 하는 물음에 직면한다. 그리스도교를, 우리 전통에 맞게, 적당히 유교식으로 맞추고 적당히 불교식으로 고쳐서 만든 것이 한국 그리스도교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 그리스도교를, 우리의 전통 문화인 유/불/도와의 교섭과 관계를 철저히 차단한 채, 서구에서와 꼭 같은 방식으로, 꼭 그대로 우리 땅에 적용시킨 것인가? 이것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부당하다. 한국 그리스도교는 그 정체성을 지키면서 타종교와 끊임없는, 개방적인 대화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타종교와의 대화에서 가톨릭 교회는 그 합리성, 보편성, 개방성 등으로 매우 유리한 처지에 있으며, 또 자연과 은총을 구분하는 가톨릭적 도식은 유/불/도교와 무교 등의 동양의 모든 종교들을 배척하는 대신 큰 틀 안에서 '자연 종교'로서 '용납'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스스로 초월적인 것들은 은총으로써 순화 또는 교화하고 '완성'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은총은 자연을 폐지하지 않고 그것을 완성한다."라는 토마스의 가르침은, 유/불/도교와 마주해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러한 것을 넘어서, 그리스도교가 한국의 전통과 문화 속에 들어와서, '누룩'으로 작용하여 그것을 새롭게 발전시키고 더 고차적인 것으로 완성시켜 가는 것이, 곧 우리 나라를 '그리스도화'하고 '복음화'해 가는 것이, 한국 그리스도인의 정체적 사명이다. 

 

그런데 내가 내 자신을 돌이켜 볼 때,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고 점잔과 근엄으로 몸을 겹겹이 싸고 있는 사이비 유교 신자가 아닐까? 또는 좋은 게 좋다는 '속물적 근성'에서 무슨 무슨 일은 재수 없는 일이어서 피하는 식의 무교 신자는 아닐까?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유교 신자, 무교 신자 노릇을 하는 셈이니 이보다 더 큰 위선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리스도 말씀의 진리에 따르기보다는 돈과 권력과 명예의 신, 한마디로 '맘몬신' 신자는 아닐까?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무자비한 시장 경제 체제 속에서 우리는 모두 맘몬신을 섬길 것을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 경우에, 우리는 맘몬신의 우상을 과감하게 깨뜨려야 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곧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 나라를 위한 길'인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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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논문과 관련된 필자의 다른 논문으로서, "To be a Korean and to be a Catholic - Are the two Contradictory or Harmonizable?"(제4차 아시아 가톨릭 철학자 대회, 1999.8.17-19. 발표)이 있다. 

 

2) 일반적으로 모든 문제를 '실제적, 기술적 문제'로서 다루는 것은 오늘날의 일반화된 기술주의적, 공리주의적, 실용주의적 태도인데, 이것은 인간의 정신과 인격도 예외 없이 그의 '기술적 처리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진실한 신앙의 영역조차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3) 흔히 공산주의 체제는 유물주의적인데 반하여 자유 민주주의 체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순전한 오해일 따름이고, 실은 자본주의 체제도 교묘한 형태로 철저한 유물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체제 안에서 항상 주의와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N. Hartmann, Das problem des geistigen Seins, Berlin, Walter de Gruyter; [정신 철학 원론], 차기락/이종후 옮김, 이문 출판사, 1990년, 그 중에서 특히 제III장(682-744면) 참조; 좀더 간략한 것으로는, M. Landmann, philosophische Anthropologie, 4. Aufl. Berlin, Walter de Gruyter, 1976년 ; M. Landmann, [철학적 인간](개정판), 허재윤 옮김, 형설 출판사, 1996년, 그 중에서 특히 제4부 "객관적 정신"(219-252면) 참조. 

 

5) 인간은 심신 통일체로서의 그의 존재 구조상 문화적 존재임을 구명한 것으로는, A. Gehlen, Der Mensch, 12. Aufl. Wiesbaden 1978년; H. Plebner, Die Stufen des Organischer und der Mensch, Ges. Schriften, Bd. IV. 1981년; M. Landmann, [철학적 인간](개정판), 허재윤 옮김, 형설 출판사, 1996년 참조. 

 

6) 허재윤, [환경 윤리, 경제 윤리 그리고 생명 윤리], 영남 대학교 출판부, 1999년 참조. 

 

7) Thomas Aquinas, [신학 대전], 정의채 옮김, 197면(제6권 제47문제 제1절) 참조.

 

[사목, 2000년 2월호, 허재윤(영남 대학교 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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