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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신앙] 신흥영성 운동의 현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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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7 ㅣ No.204

신흥영성 운동의 현상 (5)

 

 

4. 신(흥)영성 운동의 피해 사례와 식별

 

1) 사례

 

신(흥)영성 운동에 대해 이론적인 고찰을 여러 번 하는 것보다 피해 사례 하나라도 면밀히 성찰하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한다.

 

딱 한 달 전 어느 자매님이 급하다면서 전화로 상담을 요청해 왔다. 경황이 없는 때였지만 한 영혼의 구원이 달린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만사를 제쳐놓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대했다. 자매님은 ‘단월드’에서 단학수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막 단월드 사범을 통해 고급수련을 하게 되면 건강, 사업, 영성의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는 유혹을 받고 있었다. 그만큼 성당에 대한 회의와 반감이 고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차근차근 문제를 짚어주고 다시금 신앙으로 돌아오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독려하였다. 자매님은 크게 갈등하던 터였지만 필자와 몇 번 대화하면서 놀랍게도 내 말에 따라주었고 얼마 뒤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신부님께 너무도 고마워 저의 마음을 글로 올립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6월 00일 오후에 신부님께서 저에게 친히 전화를 주신 것은 신부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저에게 주신 주님의 은총이었나 봅니다. 저는 참 오만하여서 ‘하느님의 뜻’이니 ‘주님의 은총’이니 하는 표현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혜롭지도 못하고 깨달은 바도 없으면서 그런 척하고 산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겪을 수 있는 오류는 아마도 다 겪은 듯합니다.

 

저는 ‘헬스도 에어로빅도 나한텐 맞지 않아. 조용히 품위 있게 단전호흡이나 하는 것이 제일 어울리지.’ 하는 착각 속에서 처음엔 정말 운동으로만 생각하고 단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들어 본당 보좌신부님께 의견을 물었더니, 순수한 운동이 목적이라면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전 절대 다른 사람들처럼 심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요.

 

하지만 안개에 옷 젖듯이 젖어든 듯합니다. 1월부터 5개월 남짓 단학을 하면서 몸은 명현(?)이라는 것으로 너무도 아팠고 마음은 무척 부대끼었습니다. 모든 것을 그냥 그렇거니 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듯하나, 의문을 가지면 가슴은 죄여오고 우리 본당신부님의 강론은 귀찮게만 들리고, 성서에 대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적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가 젊은 시절에 그토록 어렵게 읽었던 샤르댕 신부님의 저서(?)들이 너무 쉽게 읽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모든 책이 마치 명오가 열리듯이 이해되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도올(김용옥)의 강의에 심취되기도 하고 ‘아! 그래, 맞아. 진리일 수도 있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마음은 온갖 상념들로 가득 차서 ‘이러다 내가 미치지. 차라리 가톨릭을 떠나버릴까?’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단학) 그토록 집요하게 요구해 왔지만 그때마다 계속해서 거부해 왔던 ‘심성수련’이란 것을 허락하고 ‘예비수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단학의 사상인 ‘삶의 의미’라는 이승헌의 비디오를 예를 갖추고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원장이 저에게 속삭였습니다. “도우님, 21세기와 앞으로의 세기는 ‘사람이 신의 지배를 받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이 신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라고. 마치 무슨 최면을 거는 듯이 말입니다. 너무도 이상한 것은 그 당시에 아무런 저항하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거기에 대한 저항이 전혀 없었습니다. 주일미사를 마치고 오후에 남편과 함께 ‘트로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신화를 각색한 영화이지만 신이 지배하던 그 시대에 신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주인공 ‘아킬레스’가 “신은 없다.”고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 단학원장이 제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이 떠오르면서 머리가 쭈뼛해졌습니다.

 

마치 머리는 터질 것 같고 가슴은 답답하고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렵고, ‘미칠 것 같다.’는 말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말로는 그때 저의 상태를 다 표현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는 이상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차려야지.’ 스스로를 안정시키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과 꼭 통화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세 번째 ‘미래사목연구소’에 전화를 했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절박했습니다.

 

신부님과 마지막 통화를 하고 난 다음, 즉시 전화를 걸어 ‘나 단학 그만 하겠노라. 날 설득하려 하지도 말고 왜라고 묻지도 말고 그냥 이름을 지워주고 회비는 환불해 달라.’고 정말 무 자르듯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다음날 원장과 담판을 짓는 과정에서의 기 싸움에서는 제가 이겼습니다. 집요하게 수 시간을 설득하던 원장이 먼저 지칠 만큼 제가 단호할 수 있었음은 신부님께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너무도 답답하여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머리에서 무언가 시원하게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느낌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머리가 가벼워지면서, 저는 돌아온 탕자이며, 우리를 벗어나려 했던 한 마리의 양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미사 참례를 하는 동안 어지럽고 띵하던 느낌이 이상하게도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신부님, 이 모든 상황을 정확히 어떤 언어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음날 구역반장 교육이 있어서 미사에 참례할 마음으로 서둘러 준비하고 성당에 도착하니 고해소에 불이 켜져있기에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용기를 내어 제 경험 그대로, 단학에 심취해 있었노라고 말씀드렸더니, 신부님은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매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보속으로 묵주기도 5단을 하십시오.’ 하시더군요.

 

신부님, 분당만큼 단학회원 수가 많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셋 중의 하나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저는 단학을 하면서 그들의 말처럼 혼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황폐해 가는 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것도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말입니다.

 

신부님, 도움 주심에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사는 동안 평생 그 고마움을 기억할 겁니다. 신부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오만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노력하겠습니다. 요한의 셋째 편지 1장 2절의 말씀으로 신부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나는 사랑하는 그대가 하는 일이 모두 다 잘되어 나가기를 빕니다. 또 그대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신도 건강하기를 빕니다.”

 

분당에서 000 올림.

 

2) 식별

 

이 자매님의 편지 속에는 신(흥)영성과 관련된 가톨릭 신자들의 실태가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다. 대표적인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보기로 하자.

 

첫째, 인식의 부족으로 커다란 경각심이 없다는 점이다.

 

다행히도 자매님은 본당의 보좌신부에게 문의를 하였다. 하지만 보좌신부는 정보의 부족으로 오히려 허락 또는 권장을 해주는 셈이 되고 말았다. 내심 불안하기는 했던 자매님은 설사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신앙 정도면 ‘심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단 등록을 하였다.

 

참고로 말한다. 단월드에서 시행하는 단학수련은 신앙적으로 대단히 유해한 수련이다. 필자가 파악한 문제점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 단학수련의 창시자인 이승헌이라는 사람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마리아와 즈가리아(엘리사벳의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말한다. 물론 이런 내용을 그리스도인 초심자들에게 알려줄 리는 만무하다.

 

- 또 이승헌이라는 사람은 자신에게 ‘단군’의 영이 함께하는 신통력이 있다고 말한다. 상식이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죽은 사람의 영이 함께한다는 믿음은 ‘잡령’ 아니면 ‘악령’에 대한 믿음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필자는 무식하게 말하고자 한다. 이승헌은 ‘악령’ 들린 자이다. 그리고 그의 밑에서 ‘사범’ 노릇을 하는 모든 사람은 하수인들이다. 교묘하게 그리스도교를 파괴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왜곡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혼란스럽게 하는 적(敵)그리스도교 세력인 것이다.

 

- 고급 단계로 갈수록 그리스도교 영성에 크게 위배되는 밀교적인 예식이 있다. 이른바 ‘영기통’ 수련, 천부경 103배(이를 통하여 지도령을 만난다고 함.) 등은 채널링(=영매술)과 관계가 깊다. 또 소수 정예 멤버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옥문수련’이라는 것은 인도의 탄트라 요가에서 하는 섹스 수행과 한통속이다.

 

만일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런 점들을 알고 있다면 결코 신자들이 ‘운동 삼아’ 단학수련을 하는 것을 권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둘째, 수련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확신이 허물어지고 혼란에 빠진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사제들의 강론이 시시하게 들리고, 전례가 죽은 예식처럼 여겨지고, 가톨릭 교회의 주장들이 옹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저들의 주장이 대단한 대안이나 비전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신본주의 대신에 인본주의, 타율영성 대신에 자율영성, 한 종파 대신에 우주적 통합 종파 등등 거창한 말들이 너무 매력있게 들리는 것이다. 신(흥)영성은 종교 혼합주의적인 접근법 때문에 비전문가들에게는 거기에 통합, 통일, 완성이 깃들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우리는 뉴만 추기경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전체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전체를 거부해야 한다. 축소하면 약해지고, 절단하면 불구가 된다. 각 부분이 결합되어 전체를 이루므로, 어느 한 부분을 빼놓고서 전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발전에 관하여”, 『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 196면에서 재인용).

 

셋째, 사제들이 이를 식별하여 영적 지도를 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많은 사제들에게는 신(흥)영성의 실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그래서 심지어는 본인도 기수련을 행하기도 한다. 물론 단월드 지원에서는 사제들이 수련할 경우 매우 조심스럽게 대한다. 가급적이면 운동 차원에만 머물도록 하고, 적극적으로는 권장하지 않는다. 고급단계에 이르면 충돌이나 갈등이 생길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 사제들은 신자들이 어떤 문제 때문에 그리고 어떤 갈증 때문에 수련을 하려 하는지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이것 아니라도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제들은 알 필요가 있다. 교회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시달리며 신음하는 신자들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이다. 교회 내에도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여러 전문기관이나 단체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없다면 창조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예를 들어 성령기도모임은 위험하다느니, 자신의 구미에 안 맞다느니 할 것이 아니라, 잘 지도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치유의 손길이 시급한 영혼들을 위한 영적 체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키워주어야 한다. 성령기도는 개신교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복음적인 것이다. 복음적이고 가톨릭적인 것이다. 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개신교적이라고 거부하려 하는지 필자는 묻고 싶다. 그럴 권리가 과연 사제들에게 있는가? 물론, 부작용은 있다. 그리고 그 부작용들을 일소하고 지도해 줄 권위와 책임은 사제들에게 있다. 거부하고 금지시키는 것이 정답은 아닌 것이다.

 

넷째, ‘단학수련을 하는 사람 셋 중의 하나가 가톨릭 신자’라는 자매님의 말대로 많은 신자들이 빠져있다는 점이다.

 

실태를 좀 강조하느라고 ‘셋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신(흥)영성의 그물망에 걸려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여전히 성당을 잘 나오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성당을 나오기는 해도 어딘가 모르게 성당에서의 활동과 열성이 약해지고 특히 기도생활이 왜곡되기 십상이다. 전통적인 가톨릭 기도는 시시해서 안 하려 하고 주관적으로 명상을 하려 한다. 이러면서 점점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친교는 약화되어 가는 것이다.

 

정리해 보자. 사목자들은 신(흥)영성의 실태를 알 의무가 있다. 신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어떤 위험요인들이 올무가 되고 있는지를 모르고서는 결코 ‘착한 목자’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보호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21세기 사제들은 사목일선에서 뛰느라고 눈코 뜰 새 없겠지만 꼭 시간을 내서 교회 밖에서 전개되고 있는 영성적인 움직임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도 남에게 전가할 수 없는 자신의 사명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신자들은 목말라하고 있다. 신자들은 영적으로 불량 음식을 먹고 병들고 있다. 그래서 사제들의 얼굴만 바라보며 무언가 처방을,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고 있다.

 

주님께서 통탄하신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에제 34,5-6).

 

주님께서 역설적으로 호소하신다.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내 양떼를 쉬게 하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상처 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나도록 잘 먹여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주겠다. 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하리라”(에제 34,15-16).

 

[사목, 2004년 8월호, 차동엽(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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