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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유사영성 운동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인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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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7 ㅣ No.214

유사영성 운동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인의 자세

 

 

한국사목연구소에서는 지난 2004년 2월, 5월, 6월 세 차례에 걸쳐 ‘유사영성 운동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대안’을 연구한 바 있습니다. ‘유사영성’이란 단어가 생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디 ‘신영성’ 또는 ‘신흥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만, ‘새롭다’는 뜻으로 ‘新’이라는 명칭이 ‘좋은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목연구소 상임위원들은 ‘사이비 영성’, ‘유사 영성’ 등 여러 가지 단어로 저울질하다가 ‘유사영성’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또 주교님들께서도 승인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뉴에이지 운동’으로 대표될 수 있는 이 유사영성 운동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한미준과 한국갤럽, 2005년)를 통해 발표한 ‘크리스천의 교회활동과 신앙생활 분석’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 가운데 73.2%가 신앙생활의 이유를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라고 답변했습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의 이유가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웰빙’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옛적 할머님들께 ‘왜 성당 다니시냐?’고 물으면 답이 분명했습니다. “무엇하러 다니긴? 천당 가려고 그러지.”

 

어느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마음 편하고 건강하면 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본당에서 신부님들이 윤리나 인권을 위한 질책성의 강론을 하게 되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요? 마음 편하자고 성당에 왔는데 왜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냐는 것이겠지요. 분명 ‘예언직’도 신부님들의 한 가지 직무입니다. 이 직무를 수행하자면 구약의 예언자들의 활동이 그 모범이 될 것입니다. 그분들은 하느님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기도 하였지만, 필요하다면 매국노, 또는 배신자로 비칠 만큼 혹독한 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모르게 우리 사회가 유사영성에 빠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새로움과 매력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기성종교인 우리 교회가 그만한 매력과 기쁨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성이 필요할 때라고 여겨집니다. 

 

‘유사영성’이라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진짜처럼 보일 수 있는 유사품이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쉽게 속을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철저한 대비가 필요합니다. 유사품을 가려내려면 먼저 진품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유사영성 운동에 가장 많이 빠지는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들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천주교 신자들이 자신들의 확고한 정체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들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여 유사종교, 유사영성의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만, 좀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정체성 정립에 도움을 주고자 「건전한 신앙생활을 돕는 길」도 마련하였습니다. 

 

우리를 유사종교와 구별하게 해주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입니다. 마치 성호경을 그음으로써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모든 신경의 골자를 이루는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이 신앙이 유사품을 가려내는 기준이 됩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교회가 성서에 나타나는 하느님에 대해서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험, 그리고 성령체험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이론적으로 소화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교리입니다. 분명 삼위일체 신앙은 신비입니다. 인간의 지성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느님 신비는 인간의 지성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심을 알려줍니다. 이 신비는 오늘날 우리도 하느님과 부단하게 씨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이비 신앙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특징의 하나는 아주 쉽게 하느님을 알아듣고 믿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비가 이런 사이비 신앙의 태도를 벗어나게 합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하면서 그분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참된 신앙의 길임을 아울러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또 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우리가 추구하는 구원이라는 것이 상선벌악의 원칙에 따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수련하고 노력한 만큼 얻어지는 대가, 또는 죄가 없으면 받는 상(償)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구원은 ‘지금’ ‘여기서’의 웰빙 그 이상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새 번역 성경 1고린 2,9).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 ‘천당’,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되는 구원은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요 은총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교회는 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가 추구하는 일치의 원인이요, 모형이요, 그 바탕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교회헌장 2-4항 참조). 오늘날 남북이 하나가 되고, 부부가 하나가 되고, 우리 본당 공동체가 하나가 되고, 수도 공동체가 하나가 되고, 인류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세 위로 계시면서도 한 분 하느님을 이루시는 까닭입니다. 또 인류, 민족, 본당 공동체, 가정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그 기본 원리도 알려줍니다. 그것은 성삼위를 하나가 되게 하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하나임을 느끼는 부부, 일치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지름길을 기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육체적으로 살아가려면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영혼을 위해서 기도는 필수입니다.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세상을 올바르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하느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기도는 필수입니다. 무엇보다 기도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배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큰 기도는 바로 미사입니다. 미사는 모든 신앙생활의 정점이요 종합입니다. 사실 미사는 초대교회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대대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보존해 온 삶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통로이며, 모든 교회의 전통이 보전되어온 터전입니다. 

 

존경하올 주교님과 신부님들! 미사가 정성껏 봉헌될 수 있다면, 미사 안에서 신자들이 기도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면, 교회 공동체가 하나임을 느낄 수 있다면, 하느님 말씀을 귀담아들을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를 유혹하는 유사영성 운동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사가 정성껏 봉헌될 수 있는 은총을 함께 청하고 싶습니다.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으로 이 권두언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

 

[사목, 2005년 8월호, 조규만(주교회의 사무처장 · 신앙교리위원회 총무 · 본지 편집인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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