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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전교회장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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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21 ㅣ No.552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전교회장의 길


성경은 조선인들에게 낯선 가르침이었다. 성경은 사막을 배경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사막이라곤 단 한 평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조선인들이 그 낯선 이야기들을 알아듣느라 노력했다. 게다가 선교사들은 우리말에 서툴렀다. 이 낯섦과 소통을 튼 이들이 회장이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공소회장, 전교회장, 여회장, 복사를 ‘교리교사(catechista)’라는 같은 단어로 불렀는데, 이들이 한 단위로 묶여 교회를 지탱하는 벽돌이 되었다.

한국교회는 평신도에 의해 이루어진 기적의 교회라고 한다. 그것은 단지 선교사 없이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이 아님은 물론이다. 선교사와 신자들 사이, 서구문화와 한국문화 사이의 차이를 먼저 소화하고 스스로의 색깔을 입혀 중개해 준 회장들이 있었다. 그 회장들 중에서 신앙의 자유가 오면서 확대된 제도가 바로 ‘전교회장’이다. 그리고 이들이 밟은 길은 바로 교회 성장의 동선이 되었다.


전교회장의 무게

대구대교구에는 교구 창설 때부터 전교회장이 있었다. 드망즈 주교는 전교회장에 의지해 사목했다고 할 정도로 전교회장의 무게가 큰 시기였다. 교세통계에는 선교사, 조선인 사제, 수녀, 전교회장 순으로 선교에 종사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또한 주교는 매년 교세를 분석하면서 그 성과를 전교회장과 연결지어 해석했다. 가령 1917~1918년 사이 부(夫, Ferrand) 신부가 노인들이 어린이와 같이 암기만 하고 있어 전교회장이 글을 배우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어른 영세자 수도 상당했고, 또 23명은 전교회장의 노력으로 영세하게 되었다는 등 효과도 공개했다.

전교회장은 본당신자나 공소신자들에게 교리교육을 시키는 사람이었다. 물론 비신자나 개신교 신자들과 토론하는 이들도 이들이었다. 그리고 선교사가 공소를 방문할 때 미리 나가서 맞을 준비도 했다. 1917년 드망즈 주교가 공소를 방문할 때 주교의 순회 전교회장인 정준수는 취주악대 등으로 주교를 영접하려다가 꾸지람을 들었다. 또 전교회장은 훗날 복음화가 성공될 지역에 미리 들어가 터전을 닦는 일도 했다. 1927년 대구교구에서는 주재용 신부와 이성만 신부가 사목을 하면서 육체적 정신적 고통만 당하고 별 효과를 보지 못하던 목포지역에 미래를 보고 먼저 전교회장을 파견하고, 집도 마련했다.

이러한 전교회장은 유급 활동원이었다. 당시까지 공소회장이나 교회 모든 활동이 봉사였던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더욱이 1927년 무렵에는 전교회장에게 더 많은 월급을 주기로 하고, 당시 12명이던 전교회장을 24명으로 늘리기로 했다. 전교회장 숫자의 증가가 바로 그들의 활동의 중요성을 설명한다고 하겠다. 1913년 대구교구 본당 수는 18개인데 전교회장이 5명이었다. 그러다가 1923년 그 숫자가 10명을 넘었고, 1926년에는 당시 조선인 사제 숫자와 같게 되었다. 이듬해 교구에서는 전교회장을 배로 늘렸고, 이후부터는 전교회장 숫자가 조선인 사제 숫자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1931년부터는 남성전교회장과 여성전교회장 숫자가 분리되어 파악되는데 아마도 여성회장 숫자가 적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1933년 드디어 남녀 전교회장 수가 26명으로 같게 되었고, 이후로는 여성전교회장 숫자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는 대세 전담 남성·여성이 생기고, 유급 대세 전담자도 나타났으며 또한 무급 전교회장도 나타나게 된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100여 명이 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만주사변 등의 전쟁 때 유급전교회장은 줄어드는 반면 무급전교회장이 증가한 사실은 아마도 재정형편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여성전교회장은 1914년경 한국 신부 2명이 자신의 본당에 유급 여자 전교사를 두어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소개로부터 시작된다. 주교는 여성전교회장 활용을 지침서에서도 말하고 있으니, 선교사들도 이를 고려해 보도록 권하고 있다. 이후 되재본당의 빠르드네(Parthenay) 신부는 여성전교회장이 15명의 냉담자를 회두시켰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경주나 하양같이 여성전교회장만 있는 곳도 생겨 나갔다. 그러므로 1927년이나 1932년 전교회장 통계가 갑자기 늘어나는 때가 여성전교회장이 대거 고용되는 때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유급대세전담자로 여성의 숫자가 남성을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보아 여교우가 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후로는 전교회장에 대한 언급이 한동안 공문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1972년 교구청에서 각 본당 신부에게 공문을 보내면서, “각 본당 수녀와 전교회장 및 산하단체장에게 참조하라.”고 되어 있는 기록과 1986년 전교지 수신의 참조인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교구와 전교회장

본래 전교회장은 블랑 주교가 1889년 ‘순회전교회장 양성학교’를 설립하고 두세(Doucet) 신부를 교장으로 세움으로써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교회장의 운영은 지역마다 편차가 큰 것 같다. 특히 드망즈 주교는 전교회장 제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성과를 널리 알렸다. 드망즈 주교는 1927년 인도 퐁티세리의 모렐 주교에게 대구교구의 전교회장 제도를 소개하고, 이에 모렐 주교는 그 내용을 외방전교회지에 소개하기 위해 서로 서신을 교환했다. 드망즈 주교는 개항이 이루어지고, 개신교가 들어와서 활발히 전파되는 것이 전도사의 역할이라고 파악했다. 또한 교우촌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격리되어 살아가는 신자들을 일일이 방문하고, 교리교육을 시키기 위해서는 전교회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활동을 중요히 여겨서인지 그는 전교회장의 월급을 40원 정도로 책정하기를 제의하면서 당시 교사 월급이 50원이니 많은 것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는 아마 전교회의 보조를 얻기 위해 밝히는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드망즈 주교는 1935년 『회장규칙』을 각 본당신부와 전교회장에게 발송하여 전교회장이 해야 하는 일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비신자, 아이나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이끄는 내용들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개신교 신자와 만났을 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또한 드망즈 주교는 전교용 홍보지를 만들어 전교회장들을 중심으로 이를 배포하였다. 그리고 교구의 소식을 전하거나 교구의 행사를 알리는 데도 전교회장의 도움을 얻었다. 그는 교세가 성장하고 약화되는 이유 중 중요한 요인을 전교회장에게서 찾고자 했다.

1935년 교구에서는 공소회장에 대한 신분증을, 이듬해부터는 전교회장에게 자격증(신분증)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신분증에는 주소와 성명 정도가 쓰이는데 그 내용 파악과 보고는 본당신부가 했다. 신분증은 회장 직책이 정지되면 취소되고, 직무가 끝나면 이를 반납해야 했다. 한편 “전교회장은 사무처장의 허락없이 바꾸거나 사직시킬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전교회장들은 다른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쳐야 하므로 일정한 교리에 정통하고 있어야 했다. 드망즈 주교는 서울과 같은 전교회장 양성학교를 가지지 못해서인지 초기에 주교가 직접 전교회장 피정을 지도했다. 그리고 전교회장 피정을 매년 2~3일씩 해야 되며, 그 내용은 본당신부가 짜도록 하면서도 주교가 권하는 내용이 매우 자세했다.

퇴강성당의 예전 전교회장 김춘태, 김종민 회장과 신동성당의 마백락, 김복덕 회장은 전교회장을 거친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왜관 감목대리구 시절 왜관수도원에서 약 열흘 간의 교리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받음으로써, 전교회장을 시작했다고 한다. 전교회장의 자격으로는 연령이나 학력 등의 특별한 제한은 없고, 본당신부의 추천이 중요한 요건이었다. 그 임기도 특별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어서 김종민 회장은 13년, 마백락 회장은 27년을 전교회장으로 활동했다. 김춘태 회장은 1년쯤 전교회장을 하다가 본당 사무장을 맡느라 전교회장직을 넘겨야 했다. 그런데 형편이 어려운 본당에서는 전교회장으로 임명하고 사무장 일까지 보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드망즈 주교가 40원으로 주장한 전교회장의 월급은 각각 달랐다. 이미 드망즈 주교 시절 구합덕 본당에서는 전교회장을 10원에 고용했다. 한국전쟁 때 군복무를 한 김춘태 회장은 당시 전교회장 월급이 육군 상사보다 적었다고 기억하고, 김종민 회장은 60년대 쌀 한가마 정도를 월급으로 받았다고 한다. 마백락 회장은 먹고 살 정도라고 대답하니, 그렇게 넉넉한 대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마회장은 같은 성당의 김복덕 여성 전교회장과 동시에 근무했다. 주로 성당 내의 교리교육은 여성 전교회장이 하고, 마회장은 공소의 교리교육을 책임졌다고 한다. 두 남녀 전교회장이 몇 십년을 거치면서 함께 일해서인지 아주 보조를 잘 맞추어 갔다. 이러한 사례에서도 남녀 전교회장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 속에서 전교회장들은 신자들을 찾아 나갔다. 이제는 역사가들이 예전의 전교회장들을 찾아 나선다. 전교회장들은 우리 교회사의 토대를 다진 사람들이었으며, 또한 교회의 생활을 파악하는 열쇠를 지닌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은 순수할 수밖에 없다. 내가 프랑스 파리에 있을 때 내 친구 한 명은 불교를 좋아했다. 토론하는 과정에서 선교란 그 종교가 역사 속에서 지어 온 실수를 털어버리고 초기의 말씀으로 새 땅에 뿌리를 내리는 일임을 깨달았다. 즉 선교는 어쩌면 새 땅에서 복음의 원뜻이 새로 출발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한국 초기의 교회사가 그렇게 아름다울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원뜻만을 전하러 다니는 전교회장의 마음들이 그렇게 맑았을 것이다. 우리 각자는 오늘의 전교회장일지 모른다.(도움 : 고 이사악 신부, 이 아브라함 신부, 이찬우 신부, 김춘태, 김종민, 마백락 회장)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10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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