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술ㅣ교회건축
내가 뽑은 교회건축: 대전교구 신리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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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을 말한다] 내가 뽑은 교회건축 - 대전교구 신리성지 나는 교회건축 토착화의 한 이상적 모델로 박해시대 신리성지 모습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신리성지는 조선교구 5대 주교였던 다블뤼 주교가 1845년 이 땅에 와서 체포, 처형되기까지 21년 동안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하며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을 견뎌낸 한국교회 산실이다.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루카 위엥 신부 등 세 분은 함께 순교하기로 결심하고 같은 날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다가 다시 갈매못으로 함께 끌려와 처형됐다. 순교한 날은 다블뤼 주교 소원대로 마침 성 금요일이었다. 다블뤼 주교의 비서인 황석두 루카와 집주인인 손자선 토마스는 세 분과 함께 10칸짜리 한옥인 이 집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서 「한불사전」을 만들고 「달레의 천주교회사」 자료수집 등 작업을 수행했다. 이 다섯 분은 성인 반열에 올려졌다. 그에 앞서 다블뤼 주교는 「한국주요순교자약전」(1858년) 등 세 편의 비망기를 써서 파리로 보낸 바 있다. 위엥 신부 기록에 따르면 당시 신리지역은 400명 신자가 모여 살았던, 조선 땅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우촌이었다. 박해사건 이후 교우들은 모두 도망쳐 빈 마을이 됐다가 다시 교우들이 모여들어 이 건물은 오랫동안 공소로 사용됐다. 지금도 교우와 외교인들이 섞여 살지만 옛날에도 신앙적 분위기를 좋아한 외교인들이 함께 살았고, 이들은 교우들 도움으로 좀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이 한옥건축이면서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토착화의 모범사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교우촌'이라고 불리는 신앙공동체라는 사실 때문이다. 교우촌 공동체는 생활 자체로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다. 설사 외교인이 절반 정도 섞여 있다 하더라도 신리성지의 예에서 보듯, 외교인들도 좋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모범적인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토착화의 모범사례를 보건대 지금 비신자가 많은 일반인 마을에 성지를 조성하면서 구태여 비싼 토지나 건물을 매입하지 않고도, 즉 교구가 땅을 모두 소유해야 하는 성지를 꼭 조성하지 않더라도 외교인들에게 공동체의 일원으로 훌륭히 사는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생활화된 신앙공동체를 지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평화신문, 2013년 1월 6일, 김원(안드레아, <주>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0 2,30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