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연중 32 주일-가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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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11-13 ㅣ No.162

연중 32 주일 (가해)

          지혜 6,12-16    1데살로니카 4,13-18   마태 25,1-13

     1999. 11. 7.

 

주제 : 세상을 슬기롭게 살기 - 주어진 순간에 성실하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저마다 추구하는 행복을 어떻게 하면 가까이 데리고 살 수 있을까?  질문을 해봐도 속시원한 대답을 듣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생활 전체가 그 응답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은데, 순간마다 대답하는 내용들이 바뀌고 새로운 답으로 교체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들은 말씀의 골자는 ’축복 받는 사람으로 살수 있으려면...?’이라는 질문에 응답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어떻게 해야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고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지 잘 압니다.  그러나 체험으로 갖는 그 일들이 흔히들 만족할만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늘 그 자리에서 맴도는 듯한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적은 노력을 들이고 큰 결실을 찾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말에 긍정하지 않으시는 분이 있다면,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굳이 다른 이유를 말하라면, 우리가 노력을 들이되 잘못된 곳에 잘못된 방법으로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땅을 파서 물을 얻고 싶다면, 물이 나올만한 곳을 파야할 것입니다.  아무 곳이나 무턱대고 파면 시간낭비, 돈 낭비를 하는 것은 둘째 문제로 계산하더라도 허탈한 느낌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몰두해 살면서 우리가 가진 머리의 현명함을 이용하여 많은 일들에 대해서 먼저 계획을 세우고 방법을 찾습니다. 일의 앞뒤를 따지기도 하고, 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을 더 들이거나 덜 들이거나 재주껏 계산하면서 합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지나고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걱정을 많이 했다 싶은 일들도 앞에 닥쳐왔을 때는 많은 걱정을 하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갖는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사람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의 바닥이 보이는데도,  현재 갖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 명의 처녀들은 두 무리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축에 속하는 다섯 명과 지혜가 있어 현명한 축에 속하는 다섯 명의 처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의 결과를 미리 고려하면 미련한 방법과  슬기로운 방법 가운데서 후자를 택하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라던 혼인식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시작되겠거니..!’하면서 기다렸던 사람들에게 현실은 그들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허둥댈 수밖에 없었고, 그 허둥대던 일은 결국 그들의 눈앞에서 닫혀진 혼인식장의 문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무척이나 슬픈 일입니다.  ’목이 빠져라 눈이 쑥 들어가라’고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그렇게 기다렸던 신부들을 제쳐놓고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고 밖에서 문이 부서져라 큰 소리로 외쳐봐야 안에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슬픔은 그렇게 삶에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시간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다만 고집스러운 사람만이 현실을 올바르게 읽지 못하고, 자신이 편리한대로 해석하다가 낭패를 보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는 우리가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응답을 바로 하려면 사람이 이 세상에 출생하고 사람으로 사는 것의 의미는 어디에서 얻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요즘 현대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람이 단세포 동물로부터 진화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알맞은 대답을 할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이 세상에 출현했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도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인정한다면 그에 알맞은 대답을 하고 거기에서 말하는 정신대로 살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답을 주듯이 첫 번째 독서, 지혜서는 우리 삶의 출발점이 하느님께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응답합니다. 사람의 출발점이 하느님께 있음을 이야기하는 이론을 ’창조론’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만큼이나 귀중하다고 말하는 것을 학문적으로 규정하는 용어이지만,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사람이 하느님보다 낮은 위치를 차지한다는 이유 때문에 거부하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부해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은 따로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그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전하는 힘이 바로 ’지혜’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듣는 지혜는 우리가 만사를 제쳐놓고라도 찾아야 할 힘입니다.  출발점이 하느님이기에 그 힘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 활동은 다름 아닌 처음의 출발점으로 우리를 다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 번째 독서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때 ’부활’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선물은 우리 앞에 아무 때나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찾으시고,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하느님께 삶의 희망을 둘 때라야만 얻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우리가 받아들일 마음이 있어야만 찾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겠죠.

 

여러분은 일상생활을 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느 곳에 삶의 기둥을 세우고 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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