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연중 03 주일-나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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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1-19 ㅣ No.183

연중 제 3 주일 (나해)

             

              요나 3,1-5.10    1고린 7,29-31   마르코 1,14-20

          2000. 1. 23.

 

제목 : 우리 인생을 소설로 보기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꽤나 추웠던 지난 한 주간이었습니다.  평안히 잘 지내고 우리는 다시 한 주간을 지낼 삶의 힘을 얻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추운 것은 반길만한 일이 못되지만,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농작물에 해로운 것들도 사라진다고 어른들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이 추위를 지내면서 기(氣)를 펴지 못했다거나 움츠러드는 생활을 했다면 농작물에 해로운 해충들과 비슷한 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을 하찮은 작은 미생물에 비교하려니 죄송한 느낌도 있습니다만, 비참하지 않을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이므로 이 말은 역설적으로 ’사람은 중요하다’는 소리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삶에서 아주 어려운 일을 당했지만, 잘 견디거나 이겨내고 나면 하기 쉬운 말로 우리는 ’인생은 소설 같다’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소설이라는 말 자체가 글쓰는 작가의 생각대로 이야기의 줄거리로 바뀔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에게 어려움과 곤경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그것을 헤쳐 나가게도 해 주며,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도 합니다.  또 한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을 향해서 하기 쉬운 말은 아니지만,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곤경이라는 것이 헤쳐나가기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 힘에 눌려 넘어지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것처럼 무거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이 내가 겪을 수 있는 최종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복잡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오늘은 연중 3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 사람으로 사는 우리가 얼마큼 도움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첫 번째 독서로 읽은 요나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삶에서 반복되지 않을 것만 같은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요나는 이방인의 도시 니느웨가 회개할 수 있도록 선포하라는 하느님이 주신 사명을 받고서도 일단 도망칩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 자신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하느님은 인간에게 엄청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던(4장 참조)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연중 2주간 평일에 읽었던 사무엘서에 나오는 사울과 비교해서 한가지 차이나는 것이 있다면 사울과 달리 요나는 ’엄청난 고생을 한 다음 재빨리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자기 생각대로 해석했던 두 사람이 맺은 삶의 결실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다시 살아난 충격에 놀라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러 간 사람 요나와, 끝까지 돌이킬 줄 몰랐기에 비명횡사(非命橫死)로 인생을 마친 사울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는 우리 인생에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충분히 반복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심성을 꿰뚫어보고 그 자비하심을 읽었기에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요나도 하느님의 일을 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그런 일들의 사정을 아는 우리는 요나와 같은 마음을 갖고 만족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반기실 모습은 ’잘못을 범한 다음에 마음을 돌이켜서 하느님 제가 죽을 죄를 지은 인간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스릴과 서스펜스는 없지만, 하느님의 뜻을 배반하고 멀리 도망치는 엉뚱한 길로 달아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가 올 미래를 모른다. 그 말은 정해진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엄청난 모험을 감행합니다. 아마도 곰과 호랑이로 살아가는 현실에 만족할 수는 없었던가 봅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하얀 종이에 우리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소설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길 수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팔립니다. 책을 쓰는 목적은 자신이 가진 좋은 생각, 아름다운 추억을 돈을 벌면서 팔자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7-80년 전의 인생을 채워가면서 그려놓은 그림에서 그 어느 누가 좋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쓰는 인생이라는 소설이 남에게도 남겨주는 것이 있으려면, 뭔가 가슴 뭉클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슬픈 것이든 기쁜 것이든 간에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명을 받았다가 우여곡절을 거쳐 다시 돌아서는 요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인생을 통해서 어떤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해야 하겠습니까가?

 

내가 신앙인이 된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선택’이었다고 가르치는 것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보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해변가에서 물고기 잡이에 정성을 쏟던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부릅니다.  그들을 부르면서 주셨던 약속은 한가지,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거나 손질하던 어부들이 사람을 낚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대단한 변신입니다.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첫 시작은 거창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른 신앙도 일희일비(一喜一悲)에 좌우되지 않고, 듬직한 삶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에게 약속된 미래를 확인한 다음,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른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우리가 간직하고 살면, 우리도 모르는 새에 삶의 모습이 달라졌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의 힘이고, 당신을 믿고 따른 이들을 안타깝고 가상히 여겨 징벌을 유예하시는 하느님의 특성입니다.

 

오늘은 연중 3주간의 첫날입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는 첫 날, 우리의 마음과 생각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할 수 있도록 새로운 자세로 오늘 이곳을 떠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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