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사순 3 주일 나해.....2006.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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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6-03-19 ㅣ No.688

 

사순 제 3 주일 (나해)

              탈출기 20,1-17     1코린토 1,22-25     요한 2,13-25

      2006. 3. 19. 무악재

주제 : 계명에 대한 사람의 자세

찬미 예수님.

우리 삶의 주변에는 수많은 법칙과 규정이 있습니다.  ①성당은 기도하거나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니 밖에서 움직이는 것과는 다른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도 있고, ➁어른을 만나면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이 동양에서 통하는 예절이라는 말도 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➂내가 되로 되어서 꼼꼼하게 주는 만큼 내 삶에서도 돌려받는다는 말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주변을 감싸는 법칙과 규정들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씀드린 법칙과 규정들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과 한 가지 자세로 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씩은 차선의 반대방향으로 운전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하는 행동은 다른 사람이 인내심을 갖고 무조건 이해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판단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올바른 일을 몰라서 지키는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은 예외로 대우받고 싶어서 올바른 것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참 문제이지요?  그것이 사실은 세상을 혼탁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에 사실은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사순시기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바라보는 자세에 따라서 그 의미와 효과가 다를 수 있는 ‘하느님의 법칙인, 계명’에 관한 것입니다. 


중학생 때에 처음 들었던 ‘법’이라는 한문의 글자는 물이 흘러가는 모양을 보고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 글자를 ‘물이 흐르는 모양’을 보고 만들었는지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글자의 원리가 그렇다고 알아듣는다면, 법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은 사람이 보기에 좌우로 제 멋대로 흐르는 것 같아도 일정한 체계와 순서가 있고 규정이 있다는 뜻으로 기억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 말을 먼저 떠올린다면,  오늘 탈출기 독서를 통해서 들은 하느님의 계명도 올바른 자세로 알아들어야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민족에게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나라의 멸망 때문에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하도 절실하여 필연적으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노예생활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의 자세는 상황에 따라서 패기도 사라지고 이민족의 체제에 순응하게 변해갔습니다.  그렇게 늘어지게 살았던 그들을 하느님은 선택하셨고, 파스카 축제를 거치게 했으며, 시나이산에 이르러 하느님은 그들에게 받아들이고 살아야할 계명을 주십니다.


법이나 계명에 대한 일반적인 자세는 좋은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지켜야 할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그 법을 부담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피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삶의 정신을 이야기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탈출기를 통해서 들은 십계명은 누구나 아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었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살아온 삶의 길이가 적지 않은 것 때문이고, 그것 정도는 지키고 살아야 세상이 올바른 꼴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법이나 계명은 역시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계명과 법칙에 대한 예수님의 열성이 오늘 성전정화사건을 전하는 요한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하느님께 다가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장애물이 되는 것들을 어떻게 쫓아내고 있는지’ 삶의 자세를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으로 성전에 있지 말아야 할 동물들을 쫓아내셨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성전을 지었지만, 그 성전이 하느님께 다가가는데 불편함을 주는 것이라고 판단하시자 과감히 헐어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하느님의 이 뜻에 대하여 흔쾌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가 현실적으로 당하는 어려움이 많다고 생각하거나 손해가 클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세상기준에서라면 옳은 판단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올바른 사람으로 나서는 길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현명하게 생각하고 편리하다고 말할 길을 내버려두고, 수난을 통하여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에 못박히는 어리석은 길을 택하신 분입니다.  2006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보다 현명하지 못해서, 예수님이 어리석은 길을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그 같은 일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이 생각하는 지혜보다 더 낫고, 나약해보이는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힘보다는 강하다’는 역설의 논리를 말씀하십니다.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어려운’ 말씀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코린토인들은 꽤나 똑똑했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를 앞세웠던 코린토 사람들은 오늘날 같은 자리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고 살 수도 있지만, 세상의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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