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사제의 해는 은총이요 숙제입니다(최창무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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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30 ㅣ No.446

[경향 초대석] 주교회의 성직주교위원회 위원장 최창무 대주교


사제의 해는 은총이요 숙제입니다

 

 

지난 6월 9일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주교회의 성직주교위원회 위원장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74세)를 만났다. 최 대주교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를 졸업, 1963년 6월 9일 독일에서 사제품을 받고, 1970년부터 가톨릭 대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94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되었고, 1999년 광주대교구 부교구장을 거쳐 2000년 11월 광주대교구장직을 계승하였다. 사제들이 경천애인(敬天愛人)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를 바라며, 사제의 해에 즈음한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과 인류복음화성 장관의 서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제의 해 제정 의의

 

교황님께서 아르스의 본당신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1925년 시성)의 선종 150주년을 기념하고자 ‘그리스도의 충실성, 사제들의 충실성’을 주제로 사제의 해를 선포하시며, 사제들의 영적 완덕을 향한 노력을 북돋우고 사제들 개인의 영성이 쇄신되는 해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죠. 제가 사족을 다는 듯해 송구스럽지만 뜻깊고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이른바 재속사제(교구 소속 사제)로서는 처음 성인이 되신 분이 아닌가 합니다. 수도회와 관련된 성인들이 많은데 본당신부가 성인이 되셨다는 것은 의미가 크죠.

 

특별히 덕을 닦거나 덕이 출중한 것보다 정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세상 속에서 사제직을 수행하는데 헌신한 모범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하신 것 같고요.

 

사제들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부름을 받아 그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죠. 과거에는 출가, 탈속이 강조되었지만 현대 사회의 특성은 세속성입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 사제직을 통해서 종합되고 드러나게 되는 교회의 기본 사명을 생각하라는 뜻도 있다고 봅니다. 사제 자신들은 물론 교회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해를 기념해야겠습니다.

 

 

사제들은 활동뿐 아니라 ‘존재 자체로도 중요하다.’고 하는데

 

힘 있는 말씀이고 기억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복음선포를 하려 했다.”(2코린 2,2-4 참조)고 말씀하셨죠. 사제직은 어떤 직업이나 활동이 아닙니다. 스콜라 철학에서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Agere sequitur esse).”고 했듯이 본질에서부터 활동이 흘러나옵니다. 사제직이 어떤 기술로 드러난다면 오만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믿지 않으면 내가 하는 일이라도 믿으라고 하셨는데(요한 10,37-38 참조), 기적이나 말재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행동이 왜 나왔는지, 어떻게 나왔는지 그 근원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상당히 소중한 깨달음이고 우리가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다들 활동에 너무 바쁜데, 우리 존재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제의 신원, 소명과 사명을 깨달은 체험

 

병자성사였습니다. 병자에게 성사를 베풀고 노자영성체까지 해드렸는데, 바로 내 품에서 임종을 하셨어요. 나도 그렇게 죽음을 맞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고해성사를 본 신자가 제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사죄경을 욀 때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고 해방을 맛보는 모습을 지켜볼 때도 그랬죠. 그건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긴 사제생활에서 회한이 있다면 미사성제입니다. 사제로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미사성제입니다.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를 단순히 반복하거나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리스도로서(in persona Christi)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내놓아야 하는 것인데, 어마어마한 일이죠. 그 신비 안에서 저도 영성체를 하는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송두리째 내놓아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죠.

 

특히 주교직을 수행한다고 하면 견진성사, 성품성사를 거행하는데, ‘행사’의 주례자로서 더 부각되는 듯해 아쉽습니다. 언제 어떻게 생을 마칠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처럼 운명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문득문득 합니다.

 

 

사제들에게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데

 

사제직을 처음으로 받아들일 때의 그 의식 가지고는 오래 살지 못하겠더라고요. 긴장해서 병이 나지. (웃음) 사제는 자신의 바람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되는 것이라 새로운 신원이고 새사람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 신부가 되잖아요. 사제직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계속해서 제거하여 자유롭고 기쁘게 사제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사제로서 연륜이 깊어졌다는 것은,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얻게 된 지식과 지혜를 통해서 인간적인 약점을 부단히 극복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제가 여러분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이 저를 부담스럽고 두렵게 하지만, 제가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저를 위로해 줍니다. 실제로 여러분을 위하여 저는 주교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전자는 직무의 이름이며, 후자는 은총의 이름입니다.”라고 하셨죠. 지나치게 위로와 존경을 받다 보면 권위주의에 빠질 수 있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서운하고 불편하게 느낍니다. 나에게는 존경을 요구할 권리는 없고 봉사할 권리만 있다고 생각하면 좀 더 기쁘지 않을까요?

 

 

성추문 등 오늘날 사제들의 위기

 

변명이 아니라 세상이 달라졌다고 보고 싶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확률을 좋아하는데 대부분의 사제들은 잘 산다고 인정하면서도 예외적인 것을 일반화하는 것이 현대의 생리인것 같아요. 과거에는 보호막도 많았고 여건상 좀 더 전인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현세대같이 모든 것이 공개되고 개인이 자유를 누리는 시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제 지망자가 나오는데, 사제들에 대한 기대가 커서 완벽을 요구하죠.

 

늘 조심하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시대나 다 어려움은 있죠. 농담 같지만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도 12분의 1은 잃어버리고 배신당했잖아요. (웃음) 교회가 피해를 본다고 느끼더라도 겸손하게 비판을 받아들이고 잘못이 있으면 당당히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는 치유능력도 가지고 있고 교회법도 가지고 있습니다. 처벌하고 제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악의적 비판과 매도는 온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사제들의 현실 참여, 사제들의 가난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죄에 물든 세상이면서 동시에 구원되어야 할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에서 구세주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제들은 더욱더 그렇죠. 사제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가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있잖아요. 그러니 사제들에게 걸맞지 않는 생활양식은 탐욕과 사치,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제가 심판자로서 남을 단죄하고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은 올바른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분노를 흉내 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세상에 투신하되 남을 저주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다 그런 건대 하면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자기 현상 유지를 위해서사는 것은 용서 못할 죄죠.

 

사제가 또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 편에 서야 한다고 하는데, 그건 가난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냥 가난하다면 무얼 편에 서요.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셨고 가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안다.”(필리 4,12)고 하셨죠. 그게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적인 가난은 인간을 비굴하고 비참하게 만드니까 극복해야 하겠지만, 쉽지가 않죠. 사제들이 스스로 가난한가, 얼마만큼 가난한가, 무엇을 포기해서 조금이라도 이웃의 가난을 덜고 있는가 반성해야 됩니다.

 

한국 교회에도 가난하거나 넉넉한 교구가 있지만 사제들은 대개 크게 아쉬움 없이 산다고 봅니다. 윤리신학에서는 물질의 필요에 대하여 생계유지, 품위유지, 잉여, 삼 단계를 말하는데, 한국에서는 품위유지비까지 받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러나 세계 교회로 볼 때는 의식주 자체도 어려운 곳이 많죠. 1960년대 우리 교회는 성직자들이 서양의 미사 예물을 가지고 살았는데, 지금은 우리도 세계 교회와 미사 예물을 많이 나누고 있어요.

 

우리 신부님들이 나름대로 너그럽게 희사하고 나누겠지만, 자기가 쓸 돈에서 나누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신부님들에게서 그 정신이 좀 더 보여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근검절약만 해서는 안 되고 그렇게 모은 것을 아쉬운 사람들에게 실제로 베풀어야만 합니다. 교부들도 단식으로 남은 것은 굶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하셨는데 그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사제들과 여성의 관계

 

1988년 마리아의 해를 지내면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내신 서한 “여성의 존엄”을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거기서 창조질서와 구원질서 안에서 남녀의 기능, 역할을 두고 말씀하셨죠. 인간의 성숙은 양성이 함께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제들에게도 동반자로서 멘토로서 여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바오로 사도가 잘 이야기했지만 사제는 여성들을 어머니같이 누이같이 여기는 관대함과 여유를 가지고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1티모 5장 참조). 가부장제도나 남존여비 사상은 극복되어야 하겠지만 여성과 남성은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도로서는 남성 독신자들에만 사제품을 주지만, 성사라는 것이 하나의 표지거든요.

 

사제들에게 여성들의 물질적인 도움은 때로 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와 희생, 특히 여성들로부터 바른말을 듣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독신생활 습관 때문에 여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반대로 여성을 백안시하고 늘 경계해야 할 금기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은 육체 안에 살기 때문에 남녀관계가 늘 유혹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경건하게 덕을 닦는 데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도 가능합니다.

 

 

사제의 해를 풍요롭게 하려면

 

사제들이 수덕에 힘쓰는 것은 물론 함께 모여 가난한 이들을 배려한다든지 하는 표지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특별한 지향을 가지고 모여 기도하고, 교우들도 동참하면 사제의 해가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매월 첫 목요일은 성시간을, 첫 금요일은 예수 성심에 보답하는 희생과 기도를, 첫 토요일에는 성모님께 기도를 하는 첫 첨례 5, 6, 7의 관습을 재건시킨다면 좋은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주교들은 분기별로 한 번씩 영성모임을 합니다. 다들 바쁘니까 월요일 오후 4시에 모여 성체조배로 시작해 다음날 오전 10시 정도에 끝냅니다. 신부님들도 함께 모여 기도하고 사목직에 대해 애환을 나누는 영성모임을 태동시키면 좋겠습니다. 기도 동아리라고 할까요? 교우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드리는 본당들도 있던데 더 활성화되었으면 합니다.

 

사제의 해를 맞아 교황청 내사원에서 전대사 교령을 발표하였죠. 사제들 자신도 솔선수범해서 대사의 은총을 받고 이미 세상을 떠난 사제들과도 나누라고 하였는데, 교우들을 가르치면서 정작 사제들은 의식이 부족할까봐 성청에서 특별히 당부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죽은 사제들은 물론 여러 이유로 사제직을 떠난 동료들도 기억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교와 사제와의 관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원론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죠. 그런데 저는 주교직과 사제직은 별로 구별이 안 된다고 느낍니다. 다만 교구장직이 독특해요. 보좌주교 때는 참 신났어요. (웃음) 그러나 총대리는 달라요. 교구장처럼 행정 수반이 되거든요. 그래서 참 어렵습니다. 인사권도 갖고 있으니까. 서양에서는 꼭 주교가 총대리를 하지는 않습니다. 주교가 정말 사목직만 수행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주교단, 사제단 등 동료애를 강조하고 주교회의 등이 태동하면서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교구장과 교구사제 관계가 되면 좀 다르죠. 신부와 교우라면 괜찮은데, 본당신부와 본당교우라면 다르듯이. (웃음) 사제평의회도 그래서 두죠. 신부님들이 추천한 사제를 절반으로 두어 사제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으라는 겁니다.

 

최 대주교는 왜 사제가 되려 했냐고 물으면 “사제가 안 될 이유가 없었다.”고 대답한단다. 초등학교 때 가르멜 수도원 누나를 방문했는데 수녀님들이 신부 되라 하고, 안 되겠다고 하긴 싫어서. 그 후 짓궂은 장난을 하거나 게으름을 부리면 아버지가 “신부 될 녀석이 그러면 되냐.” 하고 꾸중하시고, 그렇게 살다보니 특별하거나 극적인 계기 없이 과정을 소화하고 신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사제의 해를 은총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고요.” 신학대학 교수 경력만 24년, 늘 교회의 단체생활만 해서, 군대생활 말고는 제대로 사회경험이 없어 아쉽지만, ‘내가 연약하니까 하느님께서 늘 비닐하우스에만 두시는구나!’ 생각하고 만족한다며 활짝 웃었다.

 

[경향잡지, 2009년 7월호, 글 배봉한 편집장 사진 이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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