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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의 해: 사제의 친교에 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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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30 ㅣ No.449

[경향 돋보기 - 사제의 해] 친교는 그리스도를 보여줌이며, 그리스도를 드러냄이다


사제의 친교에 대한 묵상

 

 

교황청 성직자성에서 1994년에 발표한 “사제의 직무와 생활 지침”은 사제의 신원과 영성, 친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제의 친교는 무엇보다도 사제의 모든 권한의 궁극적 원천이신 성부와, 당신의 구속 사명에 사제를 동참시키시는 성자와, 사제다운 자질을 갖추게 하는 목자의 사랑을 실천하고 완수할 힘을 주시는 성령과 이루는 것”(20항)이다. 따라서 “사제들의 생활과 활동은 사제이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의 삶과 활동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것이며, 바로 여기에 사제의 신원과 가치, 기쁨의 원천과 생활의 기초가 된다”(3항).

 

구체적으로 “사제는 교회와 세상 앞에서 늘 새롭고 항구한 구원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가시적이고 성사적으로 연장하는 표지로서 그 자신이 특수한 책임감을 가지고 삼위일체의 구원 활동에 깊이 동참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제의 신원은 말씀과 성사의 직무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말씀과 성사의 직무는 구원하시는 성부의 사랑의 신비(요한 17,6-9.24; 1코린 1,1; 2코린 1,1 참조), 당신과 함께할 봉사자들을 몸소 선택하고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사제적 존재(마르 3,15 참조), 한 신비체인 교회 안에 결합되고 아버지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무수한 하느님 자녀들에게 생명을 주는 데에 필요한 능력을 사제에게 전해주는 성령의 선물(요한 20,21 참조)과 본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사제는 성사적 도유로 부여되는 은총과 지울 수 없는 인호 덕분에 삼위일체와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되고, 이는 존재와 활동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사제는 이 선물이 모든 사람을 섬기려고 받은 것임을 깨닫고,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랑과 흠숭의 대화를 나눔으로써 친밀하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이 관계를 생활화해야 한다”(5항).

 

그러므로 “사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로서(in persona Christi capitis) 근본적 구원 행위의 교역자가 되고, 구원에 필요한 진리를 전파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성덕으로 이끌고 돌본다”(7항).

 

 

친교의 길은 복음의 길, 성령의 길

 

사제는 복음의 길 안에서 자기 없음을 보여줌으로 진정한 자기 있음의 자리를 명료하게 밝히는 자이다. 말씀으로서의 있음, 성령 안에서의 있음, 온전한 믿음 안에서의 있음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함으로써 모든 이로 하여금 하늘나라가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자이다.

 

사제의 친교는 일차적으로 성령 안에서 내밀한 내적 일치의 관계 안에서 성령과의 친교를 끌어올림이다. 참된 친교는 나와 너라는 상대적 개념의 벽을 허물고 너와 내가 뿌리내리고 있는 한 말씀을 알게 되고 나아가 절대적 한 말씀의 지체임을 깨닫게 될 때, 사랑은 그 자체로 서로의 생명으로 다가옴을 본다. 서로는 서로의 말씀으로 다가옴을 본다.

 

친교는 자연적 진리 안에서 스스로가 그의 본래적 길에 찾아들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가 아닌 인위적인 것들을 털어버림으로써 자연적 진리로 돌아감이기도 하다. 친교는 진정한 우주적 쉼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제에게 친교의 길은 다름 아닌 복음의 길이며, 성령의 길일 뿐이다.

 

 

자기 비움을 이루지 않고서는

 

알렉산더가 인도 원정을 떠나기 전에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나눈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은 것을 성찰하게 한다. 인도 원정을 떠난다는 알렉산더의 말에 디오게네스는 “인도를 정복하고 세계를 다 정복하면 무엇을 얻게 됩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알렉산더는 세계를 다 정복하고 나면 편히 쉬면서 인생을 즐길 생각이라고 답변한다. 그때 강가 모래 위에 편히 누워 일광욕을 즐기던 디오게네스가 “저는 아무 것도 정복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편히 쉬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자, 알렉산더는 “이제 여기서 되돌릴 수는 없소. 먼저 세계를 정복하지 않고서는 편히 쉴 수가 없소.”라고 답했다는 이야기이다.

 

친교의 내용인 참된 평화와 쉼의 시각은 각자의 가치와 삶의 내용에 따라 너무나 다르다. 에고의 넉넉한 충족을 쉼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으며, 에고 만족의 결핍을 고통과 구속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마치 내가 세상 안에 속해있다고 간주할 때는 세상 안에서의 목적과 달성이 유일한 존재의 이유가 될 것이며, 그 원의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는 두려움과 불안에 스스로를 갇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내 안에 머문다고 깨우쳤을 때는 세상은 곧 은총의 선물이며, 더불어 숨 쉬는 사랑의 집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진정 무엇을 정복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이해하고 깨닫게 될 때 나의 존재성의 가치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친교는 일차적으로 자기 존재의 깊은 자각을 통해서 참진리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친교는 진리에로 열린 친교이며, 말씀의 친교이며, 성찬의 친교이다.

 

경험적 토대에서 모든 것을 통섭할 때 참자유와 쉼에 이른다고 보는 알렉산더의 관점과 나와 자연 그리고 세상에 대한 무분리성의 자각에서 통찰하는 쉼과 평화의 관점 모두가 참으로 소중하다. 하지만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없음의 자기 비움을 얻지 않고서는 참 평화와 쉼은 한낱 관념에 불과함을 깨우치게 함은 사실이다.

 

사제에게 친교는 현실적으로 사목현장에서 사목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친교의 길이 사목으로 구체화되고, 사목의 결실은 친교의 확대에 있으며 이는 곧 선교이기도 하다. 무엇이 진정한 친교인가? 무엇이 진정한 사목인가? 친교의 방법과 방안으로 나는 무엇을 고집하고 있는가? 사제로서 끊임없는 자성을 불러오게 한다.

 

모든 친교의 한 응시 한 길은 그리스도께 나아감에 있다. 친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심는 것이기에 친교 안에서의 자기 비움은 참친교의 길을 여는 지혜이다. 비움만이 친교의 방을 여는 것이며 성령을 모시는 참친교이기 때문이다. 비움은 스스로의 절대 무의 자리를 앎이다. 오로지 성령께서 성령의 길을 여시도록 정성스레 두 손 모음이 곧 비움이다. 그래서 친교의 결과나 여운에는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시작과 마침이 성령의 빛 안에서 완성될 따름이다. 친교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성령 충만한 자비의 숨임을 그저 받아모실 뿐이다.

 

 

친교의 주체는 오직 성령

 

친교는 순수한 복음적 행위의 길이기에 헌신적 자기 봉헌의 전례이기도 하다. 심어지고 움트고 자라나고 꽃피우고 열매 맺는 생명 표현의 변화는 인간에게는 변화무상한 삶으로 집약된다. 한 생명이 한 사랑이 그처럼 오묘한 섭리와 은총의 보살핌 안에서 끊임없이 사랑을 노래하게 함이 친교가 지니는 극치의 아름다움이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친교는 우주적 꽃을 피워내려는, 전체적 한 사랑을 깨우치게 하려는 성령의 어루만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친교의 주체는 오로지 성령이심을 온 믿음으로 고백해 드릴 뿐이다.

 

친교는 그리스도를 보여줌이며, 그리스도를 드러냄이다. 그 외에 그 무엇도 있을 수 없다. 덧없는 몸과 마음을 어루만짐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웃음으로 채워감은 더욱더 아니다. 영원한 빛을 빛으로 다가가게 하는 참믿음을 알게 함이며, 그 믿음의 자각을 위한 자기 내어줌이 친교를 통한 복음의 길이다. 성령은 마음이라는 도구를 쓰지 않는다. 성령은 마음이 타버린 믿음만을 당신 품에 안으실 뿐이다. 친교는 믿음을 통해 성령께로 나아감이다.

 

얼마 전 대구 가르멜 수녀원에 금경축 미사가 있어서 참석했다. 그곳 응접실 탁자에 놓인 소화 데레사 성녀의 ‘오늘의 노래’라는 짤막한 글이 있었다. 이 자리에 소개하고 싶다.

 

오늘의 노래

 

나의 삶은 한순간

지나가는 나그네

 

내 목숨 나를 스쳐

사라지고 마는 것

 

아!

주님 당신은 아십니다.

 

이승에서 당신을 사랑하기엔

오늘 하루뿐임을.

 

친교의 순간순간이, 만남의 순간순간이 얼마나 경이로운 빛의 순간들인가! 진정 무엇을 꽃피우기 위해 순간순간의 삶을 맞이하고 있는가? 성령과의 친교, 성령 안에서 이웃과의 친교가 아니겠는가! 크게 보면 삶도 죽음도 고통과 번민 그 모두가 성령과 친교를 위한 성령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과거의 경험적 기억 안에 새겨진 아픔과 쓰라림도 미래의 바람과 기대의 욕구도 친교를 위한 어떠한 준비도 될 수 없다. 스스로를 비워낸 ‘아멘’의 응답만이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 드리는 친교의 모든 것임을 깨닫는다. 소화 데레사 성녀의 “이승에서 당신을 사랑하기엔 오늘 하루뿐임을.”이란 말씀에서 진정한 친교는 성령의 선물이기에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심을 배우게 된다.

 

하늘을 담고 있는 ‘나’이기에

하늘을 노래함이 ‘나’이다.

 

땅을 밟고 있는 ‘나’이기에

만물을 사랑함이 ‘나’이다.

 

하물며

하느님은 ‘나’를 있게 하시니

하느님의 숨을 쉼이 ‘나’이다.

 

친교는 하느님의 숨을 쉼이다. 부어주신 자비의 숨을 하느님 자신에게로 돌려드림이 친교의 모든 것이라 묵상해 본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떠나게 하는 믿음에서

 

과거 교정사목을 하면서 40여 명 이상의 최고수(사형수) 형제자매를 만나뵈었고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픔을 지니고 있다. 그들 중에 상당수는 친교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형언할 수 없는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와서야 체험하게 된다. 바로 마음을 여윈, 마음의 모든 삶의 흔적들을 내려놓은 믿음 안에서 진리와의 친교, 바로 성령과의 친교를 체험하게 된다. 그들은 놀라우리만큼 거듭나게 된다.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경험하게 된다. 사제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줌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진실성을 찾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것은 사실이다. 진실은 늘 자기 없음을 아는 데서부터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바로 스스로의 내면에서 절대 무를 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용서와 참회를 명료하게 배우게 되고 그때 비로소 참 자유와 평화는 이미 내재해 있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세상과의 친교에서는 너무나 크게 실패했고 인간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 그러나 ‘나’의 무를 통해 ‘세상’의 무를 깨닫게 되었고, 성령 안에서의 무한한 자비의 친교를 알게 되면서 자신 안의 자유나 행복은 종이 위에 쓰인 말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사랑으로 떠나게 하는 믿음에서만 평화와 자유는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들의 친교는 얼마나 값진 것인가!

 

한 형제는 마지막 가는 길에 다음과 같은 힘찬 외침을 들려주었다. “여러분,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내가 예전에도 지금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성령 안에서 벗어던져야

 

가장 온전하고 완전한 친교는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를 성령 안에 벗어던짐에 있다. 있지도 않은 그림자와 같은 자신을 붙들고 살아온 세월의 삶들에 대한 허무를 깨달을 때, 이미 성령께서 사셨는데 왜 온전한 믿음 안에서 응답 드리지 못했는가에 대한 회개를 고백할 때, 성령의 친교는 찾아온다.

 

사제의 친교는 성령의 친교를 이끄는 데 있다. 그저 고요함에 머무는 자기 비움 안에 믿음은 즉시 성령의 친교 안에 성령을 모시게 된다. 성령은 온통 모든 것이다. 그분을 떠나선 그 무엇도 현존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그 깨달음도 성령으로부터 옴을 깨달을 때, 성령은 필요한 모든 곳에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려주심을 진정한 친교라 묵상해 본다.

 

사제의 친교는 그분으로부터 한시도 떠남이 없는 것이다. 그분만이 모든 것임을 그분께서 사심에 그분의 이름으로 머무는 것뿐이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9-13).친교는 오로지 성령의 몫임을 아는 데 있다. 친교는 끊임없는 말씀에로의 귀 기울임이다.

 

[경향잡지, 2009년 7월호, 김우성 비오(의정부교구 선교사목국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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