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사제의 해: 주교와 사제의 성사적 관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30 ㅣ No.450

[경향 돋보기 - 사제의 해] 주교는 큰 신부가 아니고, 신부는 작은 주교가 아니다


주교와 사제의 성사적 관계

 

 

교리상으로는 주교직이나 신부직이나 성품성사를 통하여 수여된 직책이므로 유일한 최고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목권한에 참여하는 동일 직무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오랜 교회사에서 상당히 많은 기복을 경험한 복잡한 문제이다.

 

가톨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수석으로 하는 사도단 위에 세우시고 그들의 후계자인 교황과 주교단을 통하여 유지 발전하는 교회이다. 따라서 교황과 주교단 사이에 또한 주교와 사제단 사이에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는 논의될 여지가 있다.

 

‘주교와 신부들 사이의 성사적 관계’는 교리적으로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렵고 조심스러운 과제이다. 왜냐하면 신부는 주교들이 선임한 협력자요 보조자이면서 주교의 직무를 잘 도와주는 성직자로 처신하면 그만이지만, 실제로 어떻게 주교를 보필하는가에 따라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교회의 예언직과 사제직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주로 교회의 왕직과 사목권에 대하여 논하기로 한다.

 

 

공동체나 개인의 선익을 위한 사목권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하셨고,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에페 1,22-23) 하셨다.

 

교회를 통하여 만물을 완성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이 있다면 교회도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교회헌장도 이러한 전통적 가르침을 재확인하고 있다. “주교 축성은 거룩하게 하는 임무와 함께 가르치는 임무와 다스리는 임무도 부여한다”(교회헌장, 21항). “이 권력의 힘으로 주교들은 주님 앞에서 자기에게 속한 신자들을 위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판결을 내리며 예배와 사도직의 질서에 관련된 모든 것을 다스릴 거룩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교회헌장, 27항).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의 통치권을 가진 사람은 사도단의 후계자인 주교이며, 신부들은 통치권에 종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부들이 교도권과 신품권을 행사하는 문제가 주교의 통치권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이 사목권을 행사할 때에는 교도권이나 신품권보다 인간적인 요소가 작용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공동체에 대한 철저한 봉사 정신으로 권한이 행사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사목권에서 유래하는 교회법의 규정들은 결국 애덕의 완수를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공동체나 개인의 선익을 고려한 다음에 제도의 옹호나 질서의 유지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 점은 법률적인 적법성이나 윤리적인 타당성 이전에 교의적인 유효성의 문제이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문제없는 조처일지라도 그것이 애덕을 손상하는 것이면 사목권의 존재 이유를 부인하게 된다.

 

 

평신도들의 참여를 돕는 사목

 

역사가 증명하듯이 5세기까지 성직자들이 평신도에서 구별되는 특별한 의복을 입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특수한 계급을 형성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사목적 조처는 언제나 공동체와의 긴밀한 협의를 거쳐서 시행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관계되는 일은 모든 사람이 취급하고 인정되어야 한다.”는 말이 생겼다.

 

고대와 중세의 평신도들은 주교를 선임하는 일에도 참여하였고, 공의회에도 참석하였고, 지역교회의 규율이나 관습의 정립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평신도들의 이러한 교회 참여는 신법적 구조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생활의 일부이며, 사목권은 바로 교회생활을 더욱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므로 교회의 사목권 행사는 명령하는 자와 순명하는 자의 관계에서만 고려할 것이 아니고 공동체와 공동체에 봉사하는 자의 관계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교회헌장은 평신도의 위치를 재고하고 있다. “평신도들은 그들이 갖춘 지식과 능력과 덕망에 따라 교회의 선익에 관련되는 일에 대하여 자기 견해를 밝힐 권한이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럴 의무까지도 지닌다”(교회헌장, 37항).

 

성직자들은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의 품위와 책임을 인정하고 향상시켜야 한다. 기꺼이 그들의 현명한 의견을 참작하고, 신뢰로써 그들에게 교회에 봉사하는 직무를 맡기며, 행동의 자유와 여유를 남겨주고, 더 나아가 자발적으로 활동을 하도록 그들을 격려하여야 한다. 평신도들이 제기하는 계획과 요청과 열망에 어버이다운 사랑으로 관심을 기울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교회헌장, 37항). 교회헌장의 표현은 아직도 가부장주의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평신도의 지위를 재인식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교회의 본질적 구조는 군주적이거나 민주적인 것이 아니고 고유한 교회적인 것이지만 사목행정에서는 고대의 공동체 정신으로 돌아가서 평신도를 대거 참여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주신 성령의 카리스마를 존경하고 사목의 실질적 효과를 높일 필요가 있다.

 

 

사목권의 행사에는 심사숙고가 필요

 

교회 왕직의 직접 대상을 취급하는 사목권은 인간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교회의 소리라 할 수 있기에 흔히 교회법적 권한이라 한다. 이 교회법적 권한의 결정이나 선언의 가치와 구속력에는 많은 등급이 있다.

 

교회 전체에 적용할 교회법의 기본 원칙이나 성사 집전의 원칙 등은 그것들이 하느님 예배와 인간 구원의 필요한 수단을 원칙 면에서 제시하는 것이므로 분명히 하느님의 보호를 받아 틀림없고 현명하고 유익한 것이며, 따라서 교인들은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이 반드시 가능한 최선의 결정이라는 보장은 없다.

 

부분적이거나 개별적 사항에 관한 결정들 예컨대 혼인소송, 지역 주교회의의 결정 등은 일반적으로 현명하고 유익한 것으로 인정하고 순명의 정신으로 수락하면 넉넉하다. 그런 결정들의 개개의 경우가 다 절대로 옳았다고 보장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와 사회와의 정교조약 같은 것은 가능한 최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인정하고 수락하지만, 그 내용의 각 부분에 대한 비판도 허용된다.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든가,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되지만, 역사적으로 달리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목적에서 보면 교회 왕직의 직접 대상은 교인과 교회적 사물이지만 인간 구원에 관련된 모든 사물의 종교적 윤리적 성격은 교회 왕직의 간접 대상이 된다.

 

교회 사목권의 직접 대상이나 간접 대상을 취급할 때에는 더 많은 노력과 심사숙고가 요청된다. 교회의 교도권이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공식적으로 교회의 판단을 밝히는 경우에는 무류권이 작용하고, 신품권이 정당하게 행사되면 사효적으로 은총이 주어지지만, 사목권의 발동에는 하느님의 임재를 전제로 하면서도 그 결정이 무류하거나 사효적으로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동으로

 

현대에는 교회 사목권의 간접 대상이 점점 확대되고 복잡해짐으로써 인간 활동의 거의 모든 분야가 교회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을 의미하는 만큼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창조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 목적은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 안에 완성되어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목적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의 승리로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고, 현세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통하여 종말적 승리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인 인간들의 생존 조건을 보면, 다른 피조물처럼 그의 존재와 능력과 목적까지도 조물주께 종속되어 있고, 다른 한편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어 지혜와 자유로써 이 세상을 관리하는 자격과 책임을 지고 있다. 인간이 자기완성을 위해서 지혜와 자유를 사용하여 이 세상을 관리하는 과정을 문명 건설이라 한다. 문명 건설에서 인간은 창조주의 섭리에 종속되면서도 상대적 자율성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 신학자 이브 더 몽서이는 “인간은 세상 밖에서만 달성할 수 있는 목적을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하여 추구해야 하고, 인간의 노력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목적을 인간의 노력 안에서 노력을 통하여 추구해야 한다. 여기에 인간의 역리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와 현세의 생활은 엄밀히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제조물이 아니고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인간은 자유로운 노력으로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 따라서 성장 도상에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동으로 성장한다.

 

따라서 물질과 세상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장애가 아니고 가치 있는 재료이고, 인간의 향배 여하에 따라서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면서 문명 건설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가 구세사를 만들어간다는 뜻이 있다.

 

인간과 사회의 완성은 역사성과 사회성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구세사의 추진력인 신앙도 본질적으로 역사적이요 사회적인 것이다. 따라서 신앙인의 구체적인 행동 규범은 완성을 향하여 몸부림치는 우주의 역사 안에 현실적으로 참여하여 우주사의 내용을 구세사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오천 년 교회사의 성공과 실패, 영광과 치욕도 불완전한 인간들에 의한 구세사 전개에 불가피한 조건들이다. 현실의 교회는 세상에서 초연해서도 아니 되고 현세에 흡수되어도 아니 되는 모순을 안은 채로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직의 3계단은 주교, 신부, 부제이지만, 각기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동일한 사제직을 향유하고 있으면서 그 권한의 한계가 다를 뿐이다. 그래서 주교 신부 부제는 고유한 반열이다. 따라서 주교가 큰 신부가 아닌 것처럼, 신부가 작은 주교가 아니다.

 

* 정하권 플로리아노 - 마산교구 몬시뇰. 프랑스 파리 가톨릭 대학을 거쳐,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창녕성당, 남성동성당 주임을 지냈다. 이후 한국사목연구소 원장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 광주가톨릭대학교 학장을 지냈고, 대구가톨릭대학교 학장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경향잡지, 2009년 7월호, 정하권 폴로리아노]



73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