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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대중문화와 성: 낙태의 문화적 토대인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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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1 ㅣ No.890

[경향 돋보기 - 대중문화와 성] 낙태의 문화적 토대인 대중문화


왜 이런 연구와 강의를 하게 되었나?

청소년 낙태의 문화적 토대에 관하여 연구하고 강의를 하게 된 건, 대학 수업시간에 낙태를 경험한 여학생들을 종종 만나면서부터이다. 결석이 많은 여학생을 면담하면서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낙태 후유증, 대체로 하혈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행 청소년 출신도 아니고, 멀쩡한 가정에서 커서 4년제 대학까지 오는 학생들이 왜 이렇게 낙태에 쉽게 노출되는 것일까?’ 하는 것이 당시의 궁금함이었다.

낙태를 하려면 우선 임신을 해야 하고, 임신을 하려면 일단 성관계를…,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시대 청소년과 청년들의 통상적 연애 안에 성관계가 대체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낙태가 많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 연애에 성관계를 자연스럽게 포함시켰을까?’가 필자에게는 매우 절실한 의문이었다.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피임 교육이라는 대증요법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짚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의 주제넘은 연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제일 의심스러웠던 것은 대중문화였다. ‘성인식’(박지윤 노래, 2000년 발표)부터 지금의 걸그룹까지 지난 10년 동안의 대중문화를 점검했다. 알게 된 건 세 가지다.

첫째는, 기획사가 엄청나게 강한 성적 자극을 담은 문화상품을 대량생산해서 청소년들에게 대량소비시켰다는 점이다.

둘째는, 어린이와 청소년기에 소비한 문화상품 속의 왜곡된 성이 이들에게 무의식적 가치가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대한민국은 초고속 인터넷 때문에 세계 최고 수준의 포르노 소비국이며 또 대다수의 남자들이 포르노를 즐기고 있기 때문에 기획사에서는 대중의 이러한 욕망을 파악해서 포르노를 모방한 문화상품을 수없이 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필자는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성교육이 없는 나라가 아니구나! 문화와 예술의 형태로 배운다는 의식조차 없이 왜곡된 성이 완전주입식으로 학습되는 체계적인 성교육 시스템을 가진 나라가 우리나라이고, 올바르고 제대로 된 것은 누구도 가르치지 않는 곳이 우리나라구나! 그러니까 19세 이하 미성년자의 한 해 출산건수가 3,300건(건강보험심사평가원, 2008년) 에 달하는 것이구나!’

문화는 가장 강력한 교육 도구이며 문화를 통해서 내면화된 가치는 무의식적 행동의 토대가 된다. 그런데 우리 문화는 대중문화와 포르노가 서로 교류하며 성교육을 전담하고 있으니, 청소년 청년들의 임신과 낙태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고, 이건 모두 어른들의 책임이라는 것이 필자 연구의 핵심 내용이다.

여기까지는 진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강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처럼, 문화에는 문화로 대응해야 한다. 문화가 왜곡시켜 놓은 것은 문화로 바로잡을 수밖에 없다.

가장 우선적으로 깨우치게 하는 내용은 ‘생각 없이 대중문화가 알려주는 방식대로 살다 보면, 임신과 낙태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5분짜리 뮤직 비디오를 구조주의와 기호학적 방법을 사용해서 철저하게 분석한다. 뮤비 안에는 성적 흥분과 중독을 일으키게 하는 다양한 전략들이 사용되는데, 그것이 인간 무의식을 어떻게 자극하고 성의식을 왜곡시키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좋아하고 즐기더라도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또 그 내용이 무엇인지나 알고, 또 기획사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좋아하라는 것이 필자의 의도이다. 상당수의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화려한 겉포장에 속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들의 ‘일용할 양식’인 대중문화가 결국에는 심각한 질병을 일으키는 첨가제가 잔뜩 들어간 불량식품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일상에서 산발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의 통합적 의미를 알려준다. 성적 자극이 넘쳐 나는 대중문화, 대다수의 남성들이 좋아하는 야동, 통상적 연애 관계에 포함되어 있는 성관계, 그 결과로 이어지는 임신과 낙태, 이 네 가지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실체라는 것이다. 자신 또는 친구들이 겪고 있는 임신과 낙태가 결코 개인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문화의 문제이며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학생들은 필자의 강의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이후 학생들은 ‘정결의 가치가 훼손된 문화는 생명을 지켜낼 수 없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성 - 쾌락 - 사랑 - 생명 - 임신 - 출산 - 양육 - 부모 됨 - 가족 됨’이 본래 자연법적으로 하나인데, 대중문화는 ‘성과 쾌락’만을 결합시켰고, 그 이후의 과정은 모두 분리시켜 놓았기 때문에, 거대한 생명파괴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학생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115-116쪽 참조).

이후 강의 내용은 ‘정결의 가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와 자연법적으로는 하나인데, 대중문화가 끊어놓아서 우리 무의식에서 끊어져 있는 ‘성 - 사랑 - 생명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복원할까?’에 대한 것이다. 지면으로 강의를 대신하기는 어렵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성에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포함되기 때문에 성교육에는 선한 가치를 내면화시켜 주는 인문학 교육과 종교적 수련이 필요하고, 미디어 시대의 성교육은 생물학적 내용이 아니라,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인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를 길러주는 내용이 90%를 차지해야 하며, 콘돔 교육은 10%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 강의의 핵심이다.


왜 이런 연구를 계속하는가?

이런 일을 2년 넘게 지속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필자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연구가 깊어지면서 본래의 전공과 학교 수업을 이 연구와 병행하는 것에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이 결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개인 피정을 했고, ‘부자 청년’의 비유를 묵상하며 필자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느님은 필자를 ‘부자 청년’이라고 하셨고, 필자는 ‘저는 부자가 아니며 가난한 학자일 뿐’이라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너는 부자 청년이다. 네가 서울대에서 박사를 한 덕분으로 네가 얻을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을 포기할 마음이 없으면, 너는 생명을 지키는 일을 온전히 내 뜻에 맞게 이룰 수 없다. 너는 나를 따르고자 하지만 재물이 많아서 따르기 어려워하는 부자 청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브라함을 묵상할 때는, 후손을 주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기 때문에 분쟁이 발생했다고 하셨다. ‘저에게 롯과 같은 요소는 무엇인가요?’ 하고 여쭈었고, 하느님은 지금 다니는 학교라고 알려주셨다. 하느님은 ‘더 이상 똑같은 생활을 반복해서는 근원적인 떠남을 할 수 없음’을 알려주셨던 것이다.

좋은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어서 자신을 높이려는 생각을 온전히 버리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온전히 소명의 길을 가는 십자가의 작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알려주셨다. 온전히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필자가 외치는 소리는 허공에 흩어지는 메아리가 될 뿐이며,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알려주셨던 것이다.

피정을 마치고 집에 와서 아내와 이 내용을 공감하며 나누었고, 그 다음날 지금까지 평생 봐왔던 전공서적을 박스에 싸서 창고에 넣었다. 떠남의 선언이었고,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비장한 순간이었다. 아내가 있고 딸이 있고 모셔야 할 부모님이 계신데, 이런 선택을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내를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피정 때 들었던 하느님의 부르심을 훼손하거나 외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구와 강의는 이렇게 1년 반이 넘게 지속되었고, 그 덕분에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재산을 팔게 되었다. 그래서 얻은 게 무어냐고 돈은 얼마나 벌었냐고 또 정말 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겠냐고 묻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지만, 언제나 간략하게 대답한다. 얻은 건 ‘생명수호에 필요한 포괄적 안목과 교육 방법론’이며 돈은 ‘번 것이 아니라 가진 돈을 거의 다 썼지만 필요한 돈은 앞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물론 납득이 될 만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생명의 문화를 정착시키려면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한가?

현대인이 경험하는 성욕은 정상적인 욕구가 아니다. 자본이 상품 판매를 위해서 수많은 성적 이미지들을 뿌려대고, 그래서 현대인은 과도한 성적 흥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작 그 사실을 우리만 모를 뿐이다. 우리가 사는 환경이 우리의 무의식을 규정하는데, 자본이 지배하는 도시문화는 즉각적인 욕망 충족이 마치 진정한 자유이며 행복인 양 가르친다. 이처럼 성의식이 왜곡되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생명을 공격하게 되는데, 우리 문화는 이 왜곡이 사회 구조와 맞물리면서 체계화되어 있고, 아이들은 이 안에서 크고 있다.

이 거대한 속임수를 꿰뚫어보고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자기 생명도 지키고 남의 생명도 보호해 줄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사람들은 컴퓨터가 주입해 주는 환상이 실제라고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주인공 네오는 그 환상을 깨고 실세계를 정면으로 인식하고, 사람을 건전지로 활용하는 매트릭스를 파괴한다.

단순히 생명이 소중하다는 당위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시대 젊은이들을 네오처럼 훈련시키고 싶다. 대중문화가 어려서부터 주입해 준 환상을 깨고 주체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을 노예처럼 예속시키려는 죽음의 문화에 저항하고, 새로운 생명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수많은 네오들을 키워내는 것이 최종 지향점인 것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의 임신, 낙태, 미혼모가 불과 10년 사이에 급증한 것은, 성을 내면화시켜 주는 문화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문학으로 대표되는 활자문화에서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영상문화로의 전환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문학청년’이 하지 않던 일을 현재의 ‘야동청년’들은 서슴없이 하기 때문이다.

임신, 낙태, 미혼모의 급증은 거시적 문화 변동의 결과, 성관계라는 문턱을 넘는 것이 매우 쉬워진 세대가 탄생했기 때문인 것이다. 거시적 변동을 간파하지 못하면 미시적인 대응만 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콘돔 교육과 순결 교육은 내용은 정반대이지만, 거시적 변동에 대한 미시적 대응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 환경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다. 문화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집요하게 성관계를 강요받는지 깨닫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큰 그림을 보고 생각이 바로 서면, 상당수의 청소년들이 대중문화가 유혹하는 길로 들어서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청소년들이 그래 왔던 것은, 대중문화는 왜곡된 성과 욕망을 줄기차게 가르치는데, 선하고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일 뿐, 그들이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교회와 사회는 이런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야만 한다. 선정적 방송으로 왜곡된 성의식을 심화시키는 기획사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규제와 처벌도 필요하고, 본질을 보게 해주는 교육이 주일학교나 학교교육에 접목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속에 억압되어 있는 선성을 끌어낼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더욱더 선한 선택을 하기 쉽도록 사회 구조를 디자인해 줘야 하는 것이 사회와 교회의 역할이다.

헤르만 헤세의 성장 소설 「데미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다시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소년들이 생명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려면 현재의 죽음의 세계를 그들이 깨뜨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줄탁동시의 협력이 요청된다. ‘알을 깨고 나오려는 이 투쟁’에 가톨릭교회가 큰 힘을 보태주었으면 한다.

* 이광호 베네딕토 - 낙태 예방 생명문화연구가.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경향잡지, 2011년 12월호, 이광호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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