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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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그리스도교 수도승의 삶의 전통에 바탕을 둔 명상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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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6 ㅣ No.357

그리스도교 수도승의 삶의 전통에 바탕을 둔 명상기도1)


1. 여는 말

여기 소개하는 명상기도2)는 어느 개인의 창안이 아니라 성서와 전통에 바탕을 두고 그리스도교 수도승의 삶 안에서 면면히 계승되어온 기도이다. “늘 깨어 기도하라”(루가 21,36)는 주님의 권고와 “끊임없이 기도하라”(1데살 5,17)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 따라 초기 사막의 수도승들은 마음에 와 닿는 짧은 성구(聖句)를 영혼의 양식으로 삼아 끊임없이 되뇌며 하느님의 현존 안에 늘 깨어 있고자 노력했다. 그 후 가장 애용되어 왔던 성구는 동방수도승들의 예수의 기도3), 서방수도승들에게 있어서는 현재 성무일도 도입구로 정착된 시편 성구4)였다. 짧은 성구를 되뇌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수도승들의 전통은 관상생활의 긴요한 부분이자 수행으로 정착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일정한 시간동안 집중적으로 행했던 수행이 명상기도이다.

이 명상기도는 오늘날 동방수도승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예수의 기도, 주로 미국의 트라피스트 수도승들이 행하고 있는 구심기도(求心祈禱, centering prayer)5), 금세기 위대한 기도의 스승인 베네딕도회 메인(John Main)6) 신부에 의해 주도된 명상을 총망라한 기도 방법인 것이다. 또한 이 기도는 불교나 힌두교 등 고등종교의 수행 전통 안에서도 유사한 방법으로 시행되고 있는 보편적 명상 방법7)이라 할 수 있다. 명상기도는 수도승 영성이 보편화되는 시대에 깊은 영적 삶을 추구하는 자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단순하고 평범한 기도로서 결코 신비롭고 유별난 기도가 아니라 참 사람(眞人)으로 살아가기 위한 평범하고 단순한 수행의 한 방법이며 순간순간을 소중히 지내며 하느님의 현존인 사랑 안에서 깨어 살기 위한 기도이다. 이 시간은 행함의 기쁨 (the joy of doing)을 누리는 시간이 아니라, 있음의 기쁨(the joy of being)을 누리는 시간이며 생각을 멈추고 침묵 안에 머무는 시간이기도 하다.

명상가는 소수의 영적 엘리트에게 해당된 명칭이 아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도달해야 할 본래 모습이요 모두가 그리로 불리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의 문턱에 선 현대는 새 문명이 잉태되기 위한 대 전환기로서, 머지않아 영성을 요구하는 시대가 열릴 것이며 그때가 오면 신자들은 신비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많은 이들이 깊은 기도생활과 영적 삶을 열망하고 있다. 물질주의, 금전 만능주의 시대인 오늘날, 많은 이들은 외적인 풍요와 편리함에 비례하여 극심한 영혼의 갈증을 겪고 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이 영혼의 갈증을 해갈시켜 주지는 못한다. 명상기도는 생명의 샘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요한 15,4) 생명수를 흡수하여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는 기도이다.


2. 명상기도에 경종이 되는 몇 가지 일화들

음식과 마찬가지로 영성 생활에서의 과식이나 편식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자명한 사실이지만 잘 잊고 지내기에 몇 가지의 경종이 되는 일화를 통해 명상기도에 과도히 치우치는 것을 막고자 한다.

예1) 두 갈래의 길8)

명상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집에는 그가 미련둥이라고 구박하는 머슴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새벽에 눈을 뜨면서부터 명상에 잠겨 밤이 깊을 때까지 계속하곤 했다. 움직이는 모든 몫은 모두 미련둥이 머슴 차지였다. 마당 쓸기, 변소 치기, 상갓집 문상하기, 마을길 울력하기 등 …. 명상가의 명성은 날로 멀리 퍼져나갔다. 나중에는 명상가의 기침 소리조차도 진리의 표현이 될 지경이었다. ‘선생님은 여기에서 심히 기침을 하셨다’라고 소개하면서.

명상가의 집 대문턱이 유명 인사들의 발걸음으로 닳고 닳으면서 미련둥이 머슴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날로 주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으나 머슴의 얼굴에서는 주름골이 더욱 깊어져 갔다. 마침내 명상가가 이 세상을 떠났다. 신기하게도 같은 시간에 미련둥이 머슴 또한 죽었다. 그런데 저 세상으로 들어서는 순간 명상가는 깜짝 놀랐다. 자기가 인도되어 가는 곳이 천만 뜻밖에도 지옥이 아닌가. 명상가는 발버둥치며 울부짖었다. “나는 진리 외에는 말한 적이 없다.” 그러자 곁에 붙어선 사자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아무리 진리라도 행하지 않으면 귀신 소리에 불과한 것일세. 그러니까 앞 생(生)에서의 자네는 귀신 소리 확성기였던 거야.” 사자가 천상을 가리켰다. “저기를 보게. 자네가 미련둥이라고 구박한 머슴이 천국으로 가고 있네. 그는 말한 진리보다는 행한 진리가 더 많았기에 천국으로 초대받은 것일세.”

예2)

양관 스님(1758~1831)9)이 원통사라는 절에서 스승을 모시고 수행 중일 때 그 절에서 30년을 두고 묵묵히 일만 하는 한 스님을 보고 큰 감화를 받았다. 그는 다른 스님들처럼 참선도 하지 않고 경전도 읽지 않고 오로지 밥 짓는 일과 밭일만을 할 뿐이다. 묻는 말에나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그는, 아침이면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물을 긷고 밥을 지으며 자신이 가꾼 채소로 맛있는 찬을 만들고 국을 끓인다. 대중이 선실에 들어가 참선을 할 때 그는 혼자서 넓은 식당과 주방을 깨끗이 쓸고 닦는다. 그리고 남들이 싫어하는 변소 청소도 자신이 맡아서 한다. 그리고 잠시 틈이 나면 밭가에서건 공양간에서건 그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 뿐 결코 허리를 바닥에 대고 눕는 일이 없었다. 바보처럼 여기던 양관도 뒷날 그가 진정한 수행자였음을 알아차리고 그의 덕을 기린다.

예3)10)

어느 안식일 저녁에 한 탁월한 하스드가 코츠커에 도착하여 명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깨끗해진 느낌이었다. 바로 그 순간 회당 문이 벌컥 열리면서 렙멘들(유명한 라삐의 한 사람)이 뛰어들어 왔다. 들어오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감히 여기서 명상과 신비 따위로 자리를 어지럽히는가? 무례하구나!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하지 말라”

예4)11) 명상하느니 밭에 나가 풀 뽑는 것이 낫다.

위의 예들은 삶이 없이 일방적으로 치우친 명상기도의 위험을 지적한 현실성을 띤 일화들로 명상생활에 경종이 되는 가르침이다. 몸으로의 삶이 없는, 현실과 유리된 명상기도는 대지(大地)를, 성전을 더럽히는 위선적 행위일 수 있다. 주님 역시“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실천이 없는 삶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주고 있다. 사실 명상기도의 진위는 실천의 삶을 통해 입증되므로 현실이나 공동체와 유리된 자기도취의 기도는 아편처럼 지극히 위험하며 정신질환이나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 명상은 사랑과 유대감 중에 현실 속으로 스며들어야 하고, 현실에의 투신은 주님과의 친교로서의 명상기도를 더욱 열렬히 갈망하게 될 것이다. 영적인 것과 현실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영적일수록 환상에서 벗어나 더욱 현실적이어야 한다.12) 즉 삶과 명상기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3. 명상기도의 위치

요즘 갖가지 기도 형태가 유행하고 있다. 영적 삶에 대해 욕구가 커지는 그 만큼 수행 방법들도 다양하게 제공되고 있다. 영성생활의 대중화 현상은 시대의 추세이자 자연스런 현상이다. 노쇠해버린 서구 그리스도교가 동양 종교들의 영성에서 무엇인가 배우려고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선(禪), 요가, 단전호흡, TM 명상, 마인드 컨트롤, 단, 기공 등 온갖 명상법이 난무하며 라즈니쉬류의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뭔가 새롭고 신비로운 것을 체험하고 영적 삶을 추구하려는 뉴 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13), 얼마 전 떠들썩했던 휴거라든가 사적 계시의 범람과 이에 쏠리는 신자들의 생활도 이런 맥락에서 알아들어야 한다. 거짓 그리스도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이에 교회도 수차에 걸쳐 뉴에이지 운동에 경각심을 촉구한 바 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인 계시, 은총, 구속, 십자가, 고난, 죄, 부활의 파스카 영성이 빠지면 이미 그리스도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없는 그리스도, 고난없는 영광, 죽음없는 부활에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 미아가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교 전통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현실의 공동체라는 삶의 자리에 위치한 명상기도의 위치와 삶의 자리를 확인해야 한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는 외관상 세 공동체로 대별된다. 의식주의 해결 공간으로서의 가정공동체, 자기실현 및 생계 해결의 장으로서의 직장 공동체, 영적 충전과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장으로서의 교회공동체, 이 세 공동체 중 하나만 부실해도 생활의 균형이 무너져 영성생활은 불안해 진다. 건전한 가정, 직장, 교회생활의 균형이 잡히고 안정된 삶 안에서 건전한 영성생활, 명상기도도 가능하며, 이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현실 도피적 기형의 명상기도가 될 위험이 있다. 명상가 이전에 평범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수도원은 원내에 이 세 장(場)을 공유하고 있다.14) 원내에 성당(교회)이 있고, 일터(직장)가 있으며, 함께 모여 공동생활(가정)을 한다. 이 세 삶의 자리에 대응하여 내적 삶도 기도, 일, 성독(聖讀)의 세 요소15)가 균형을 이루며, 하루의 삶을 떠받쳐 주고 있다.

초대 교부들은 인간을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의 삼중적 존재로 고려하였다.16) 영혼에 활기를 주는 기도, 정신에 활기를 주는 성독, 육신에 활기를 주는 노동, 어느 하나 부족해도 전인(全人)이 못된다는 것이다. 영혼과 정신, 육신이 하나가 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받듯이, 기도, 노동, 성독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간다. 기도 없는 일만의 활동주의(activism)도, 일 없는 기도만의 정적주의(quietism)도 기형의 이단적 영성이다.

복잡한 삶도 기도, 일, 성독으로 요약되며 수도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인(全人)이 되기 위한 인간 삶의 필수적, 원형적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도원의 대다수의 개인 피정자들도 기도와 노동과 성독을 균형있게 배분하여 평범하게 실천할 뿐, 기교나 인위적 계획을 하지 않는다.17) 기도, 일, 성독18)은 삶의 리듬이자 영성생활의 리듬이고, 이 세 요소의 조화와 균형이 영성생활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명상기도의 위치는 분명해졌다. 가정, 직장, 교회의 세 삶의 자리에 충실하며 성실히 공동기도에 참여하고 노동하며 꾸준히 성독18)에 힘쓸 때 명상기도는 탈선하지 않고 제자리를 찾게 되어 영적 미아가 되지 않으며, 현실 도피적 명상기도가 되지 않는다.


4. 명상기도는 왜 하는가?19)

명상기도는 영성생활에서 주식이 아니라 간식20)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중요성은 심대(甚大)하다. 구체적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보겠다.

1) 사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하여

30대까지만 해도 희망에 넘쳐 의욕적으로 생활하지만 40대에 접어들면서 환상은 걷히고 희망의 실체가 드러난다. 서서히 허무와 타성의 늪에 빠져들게 된다. 단조롭고 반복되는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며 때로는 향락에 젖어보지만 공허감만 남고 좀처럼 일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감옥이 따로 없다. 영적 출구가 없는 삶이라면 어디나 감옥이요 아무리 환경이 바뀌어도 얼마 못 가서 감옥이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활동 반경이 얼마나 될까? 정도의 차이일 뿐 일정한 범위와 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세상을 마칠 것이다. 여기에 명상기도의 필요성이 있다. 명상기도 시간은 감옥생활에서 영적 출구를 내는 시간이자 영적 숨통을 트여주는 시간이고 사막을 낙원으로 바꾸는 변형의 시간이다. 명상기도시 단조롭고 지루한 만트라21)의 반복은 그대로 사막 삶의 압축이다. 무엇을 ‘하는’, ‘채우는’, ‘모으는’ 삶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비우는’, ‘버리는’ 삶을 체득하므로 삶의 본질에 접근케 하는 가난한 자의 명상기도 시간이다. 화려하고 요란한 외적 삶이 아니라 평범하고 단순한 삶 중에, 깊이를 발견하여 평상심으로 살게 하는 기도이다. ‘一日是好日’(일일시호일) 즉 그날그날이 최고의 날임을 깨닫게 해준다.

2) 깨어 살기 위하여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깨어 사는 사람은 드물다.22) 대부분 잠들어 있거나 휩쓸려 살면서 ‘지금 여기’에 살지 못한다. 엉뚱한 생각과 분심으로 하루가 끝나도 무엇을 했는지 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많은 말을 하고 많은 말을 듣고 많은 것을 보았지만,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았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같은 사실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며,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도 아니고,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깨어 집중되어 있어야 보고 들을 수 있다.

명상기도 중에 체험하는 숱한 분심과 상상은 일상생활 그대로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명상기도의 수행은 분심 없이 깨어 집중적으로 살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모든 영성가들의 한결같은 권고는 ‘기도할 때는 기도만 하고, 일할 때는 일만 하고, 놀 때는 놀기만 하고, 먹을 때는 먹기만 하라’는 것이다. 분심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살라는 것이다. 대개의 사고나 병은 분주함과 복잡함으로 마음이나 에너지가 분산되어 있을 때 발생한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기에 단순화하여 ‘지금 여기’에 마음과 에너지를 모은다면 대부분의 사고나 병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깨어 사는 것은 긴장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순간에 충실하며, 투명한 의식으로 사는 것을 뜻한다. 옛 사막의 수도승들은 끊임없는 기도를 이상으로 삼아 실천했다. 만트라의 반복에 기초하는 명상기도는 바로 끊임없는 기도를 지향하면서 관상으로 인도하는 기도이다. 명상기도의 수행이 깊어지면서 만트라의 반복과 의식적 들음이 전 생활에 확산되어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깨어 있는 삶이 가능하게 된다. 막연한 결심과 지향만으로는 깨어 사는 삶은 공중누각에 불과하다. 규칙적이며 꾸준한 명상기도의 수행이 전 삶에 영향을 미치면서, 전 삶은 명상이 되고 깨어 있는 삶은 실현된다.

3) 결과에 초연하기 위하여

모든 종교는 그 궁극의 목표를 집착에서의 이탈에 두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발전을 위한 추진력도 되지만 동시에 불행의 화근도 된다. 이기적 자아가 문제이며, 이기적 자아의 포기 과정이 명상기도이다. 자기 생각, 자기 상상이 중심이 아니라 만트라의 반복이 중심이 된다. 명상기도 중에도 자아가 들어설 여지가 없어져 명상기도 5-6년이 지나면 감정의 동요 없이 화낼 수 있다고 한다.23) 결과에 초연할 수 있음은 과정에 충실할 때 가능하다.

구원, 은총, 체험의 열매들은 우리의 소관 밖이다. 믿음으로 말하면 우리 마음이 아닌 하느님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아무리 농사에 최선을 다해도, 일기가 고르지 못하면 좋은 결실을 내지 못한다. 마치 구원이나 은총, 체험을 획득할 수 있는 양,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쟁취할 수 있는 양자만하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며 인간의 분수를 모르는 소치이다. 씨뿌리고 가꾸는 노력으로서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는 그대로 믿음의 자세이자 명상기도의 자세이다. 사람의 눈에 성공과 실패, 발전과 퇴보이지, 하느님의 눈에는 그런 것이 없다. 씨뿌리고 가꾸는 노력에 충실했다면 그 자체로 하느님의 눈에는 성공이고 결과는 하느님이 책임지실 일이다. 과정에의 충실이 초연과 이탈의 삶을 가능케 한다. 명상기도 중 만트라의 계속된 반복과 의식적인 들음은 바로 과정에의 충실을 뜻한다. 갖가지 체험이나 은총을 기대하거나 집착함이 없이 끝까지 만트라를 반복하는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을 모든 영성대가들은 기적이나 신비체험보다 백배나 더 귀히 여겼다.24) 명상기도는 결국 이탈의 수련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메마르고 단조롭고 따분할 수 있다. 상상이나 생각, 추리, 분석 등 일체의 집착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4) 제자리를 깨닫기 위하여

공동생활이나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제자리를 벗어나 남의 자리를 침범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제자리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고질병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공동체에 속해 인간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고유한 제자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것을 잘 보지 못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알게 모르게 남의 자리를 유린하고 상처와 불화를 일으킨다.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영성생활은 힘들어지고, 비교와 경쟁, 무지로 인해 방황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기의 모습과 능력 및 적성을 살리지 못하고 너나없이 유행을 쫓고 일류를 선망한다. 명상기도는 감정과 욕망의 흙탕물을 가라앉히고 환상을 없앰으로써 본래의 제자리를 찾게 해준다.

또 수도승이든 세속인이든 누구나 외관상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나름대로 자신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맛보는 때가 있다. 변화가 없이 언제나 ‘그 모양 그 꼴’, ‘제자리걸음’이라는 자조 섞인 탄식을 하게 되며 인격적 성숙도 요원한 듯이 느껴진다. 칭찬이나 비난에 평온은 쉽게 무너지고 일순간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기도 한다. 이것이 과연 제자리걸음일까? 아니다. 분명히 내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명상기도는 이를 깨닫게 해주는 기도이다. 또한 명상기도를 통해 언제나 돌아올 수밖에 없는 제자리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더불어 애정이 깊어진다.

결론적으로 제자리가 어디인지 아는 것, 제자리걸음이 결코 똑같은 제자리가 아니라는 내적 깨달음25), 도피할 수 없는 제자리에 대한 깊은 자각과 애정은 명상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내적 여정은 환상에서 벗어나 제자리에 이르는 기나긴 깨달음의 여정26)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도와주는 것이 명상기도이다.

5) 뿌리내리기 위하여

뿌리내림은 관계맺음을 뜻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릴 때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영혼이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릴 때 튼튼한 현실의 삶은 가능하다. 나무가 땅속에서 물과 양분을 흡수해야 사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하느님께 뿌리내려 생명을 흡수해야 살 수 있다. 나무가 뿌리 뽑힐 때 죽는 것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께 뿌리 뽑히면 죽는다는 사실, 자명한 진리이다. 영혼의 뿌리는 믿음, 희망, 사랑의 향주삼덕이다. 영혼의 뿌리인 믿음, 희망, 사랑은 어느 상태에 있는가? 요즈음 부평초처럼 뿌리 없이 표류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동체 내의 제자리에 성실과 인내로써 뿌리내려야 하느님께도 뿌리내릴 수 있다. 뿌리내림은 보이는 외적 - 평면적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적 - 수직적 차원의 삶을 상징하며 넓이보다는 깊이의 삶에 더 관심을 갖는다. 단조롭고 제한된 제자리이지만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리는 내적 삶일 때 진정 자유를 누리게 되고 비록 외적으로 폐쇄된 공간일지라도 내적으로는 영원으로 열린 공간이 된다. 뿌리내림이 있을 때 봉쇄 관상생활도 가능하며, 관상수도승 뿐 아니라 내적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께 뿌리내림의 집중적 영적 수행인 명상기도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함께 살아도 사막이 되어가고 있는, 흡사 모래알 공동체 같은 외로운 세상이 되었다. 영혼이 살기 위해서 하느님께, 그리고 공동체 내의 제자리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명상기도의 꾸준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명상기도는 우리 존재의 중심(the center of our being)에 계신 하느님께 뿌리를 내려가는 내적 여행의 기도이다.

6)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하여

‘있는 그대로 본다’라는 말마디 역시 깊은 영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세상살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즉 착각, 오해, 편견, 환상 등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의 색안경을 쓰고 자기식대로 보기 때문에 생긴다. 자기의 감정 투사를 벗어나 맑은 눈으로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인간은 자기의 색안경을 벗어버릴 수 없는 숙명적 인간 존재가 아닐까 라는 회의도 들겠지만 명상기도의 꾸준한 수행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자기가 사라져 갈 때 가능하며 이것이 바로 사랑의 진면목이다. 열렬한 사랑은 분별의 토대라고 한다.27) 사랑과 겸손이 있을 때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미움에서 나오는 것은 판단이고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분별의 지혜이다. 사람의 체질, 성격, 취향, 성향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할 때 다양성 안에 일치, 조화, 평화도 가능하다. 획일화로 치닫기 쉬운 인간의 본능적 유형, 무형의 폭력은 사태만 악화시킬 뿐이다. 꾸준한 명상기도의 수행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삶의 진상을 보게 될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비워 가는 명상기도 과정 중에 자기는 점차 사라지면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드러난다. 그것이 사랑의 충만이요 공(空)의 실현이다.28)


5. 명상기도의 방법

1) 적절한 장소와 시간을 마련한다

영성생활 역시 집중적인 훈련으로서의 수행이 필요하며 장소를 마련하고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가능한 한 적당한 장소, 좋은 시간을 내는 것이 좋다. 육체를 지닌 인간 조건상 환경의 영향은 지대하기에 어느 정도 명상기도가 정착될 때까지는 적절한 환경마련이 중요하다. 이런 준비과정은 자기 포기 및 정성의 표현으로 명상기도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적어도 하루 한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한다고 생각하고, 하루 2회 아침과 저녁에 각각 30분씩 꾸준히 규칙적으로 명상기도를 바치는 것이 좋으며, 갑작스런 열심에 하루 몇 시간씩 바치는 명상기도의 영적 과식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구약시대에 맏물을 제물로 바쳤듯이 좋은 시간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 좋다. 식사 직후나 졸리고 피곤할 때, 걱정으로 산만할 때는 피하고 심신의 상태가 활기 있고 맑을 때가 좋다. 아침잠이 덜 깼을 때 커피나 차 한 잔 정도 마시면 정신을 맑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장소는 성당이나 경당, 기도소가 이상적이지만 한적하고 조용하며 너무 밝지만 않다면 어느 곳이나 좋으며 잘 정돈된 방의 십자고상 앞에서라면 더 좋겠다. 한 번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규칙적으로 꾸준히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며 가능하다면 개인 명상기도보다는 공동으로 하는 명상기도가 바람직하다. 서로 울타리가 되고 격려가 되며 일치감을 주기에, 좋은 기도 분위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규칙적으로 꾸준히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실시하는 명상기도의 습관이며, 명상기도가 익숙해지면 다른 장소나 다른 시간 중에도 쉽게 명상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2) 긴장을 풀고 편하게 앉는다

서두르지 말고 느긋이 하라. 어떤 기대도 갖지 말라. 조급함은 금물이다. 명상기도는 100미터 경주가 아니라 묵묵히 걸어가는 도보여행과 같다. 그리고 눈을 가볍게 감아라. 심신의 긴장을 풀기 위해 간단한 준비운동을 하라. 가부좌 자세나 의자에 앉는 경우 목을 전후, 좌우로 흔들기, 돌리기, 어깨를 앞뒤로 돌려주기, 몸통을 전후, 좌우로 흔들어 주기, 가슴을 펴면서 심호흡 등 긴장이완을 위한 적당한 준비운동이 좋다. 스님들의 가부좌 자세가 좋기로 정평이 나 있지만, 가부좌 자세든 의자에 앉든 허리를 곧게 펴고 가능한 한 허리는 의자에 기대지 않으며 가슴을 가볍게 펴고 상체의 힘을 뺀다. 목과 허리는 바로 세우고 눈은 가볍게 감는다.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고 귀와 어깨, 코와 배꼽은 수직이 되게 하며 턱은 아래로 약간 당기고 머리끝은 천장을 떠받치듯 하고 입은 가볍게 다문다. 넉넉한 크기의 옷이 좋으며 꽉 끼는 옷은 단추나 혁대를 느슨하게 풀어 주라.29) 자세가 그릇이라면 마음은 물과 같다. 그릇의 위치가 불안정하면 마음이 흐트러지고 불안해 진다. 명상기도는 몸의 기도이자 마음의 기도이다.

3) 잠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한다

여기서부터 타종교 명상과의 분기점이 된다.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말고 고요히 있어라. 예수께서 “두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고 말씀하셨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마태 1, 23)이심을 믿으며 의식적으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잠기라. 하느님께는 주변이 없고 ‘지금 여기’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중심이시다.30)

‘의식적’이라는 말마디는 매우 중요하다. 영성생활 및 기도생활의 성패는 꾸준한 의식적 노력에 달려있다. 하느님 은총에 맞갖게 인간의 의식적 노력이 마땅히 필요하다. 우리가 하는 명상은 기술이 아닌 기도이며, 마음의 안정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주님께 바치는 봉헌이다. 독백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현존 안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는 시간이요, 고립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충만한 고독 안에서 주님과의 친교를 돈독히 하는 시간이다. 이런 바탕에서 비로소 그리스도교의 명상기도는 시작된다.

4) 주님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고백한 후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이것은 명상기도의 수행에 앞선 필수적 전제조건이다. 주님의 현존 의식을 깊이하는 데는 신 ? 망 ? 애 향주삼덕(向主三德)의 고백이 좋다. 성서의 언어는 대부분 사실언어가 아닌 고백언어이다. 고백은 영혼의 소리이다. 고백 실종의 시대! 바로 여기 현대인의 불행이 있다. 사랑을 고백했을 때, 고백 받았을 때의 행복감을 잊지 못할 것이다.

“주님!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만이 저의 희망이십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영혼 깊숙이에서 고백할 때 평화가 온다. 주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은 명상기도를 가능케 하는 동력이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이론에 밝아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정열이 식으면 명상기도는 의무적이고 기계적이 되어 버려 얼마 못 가서 도중하차하고 만다.

고백 후 주님께 도움을 청하라. 기도생활에서도 스승의 도움은 필수적이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영적 지도자의 빈곤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스승이 되어 주시라고 간청하라. 예수께서는 ‘이 세상 누구도 스승이나 지도자로 삼지 말라’(마태 23,10)고 말씀하셨다. 스승이나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고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며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헛되다’(시편 127,1-2)라고 시편저자는 고백했다. 명상기도는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은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겸손과 가난의 고백이기도 하다. “주님,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고자 하오니, 찬미와 감사와 평화의 시간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각자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상황에 맞게 드리는 것이 좋다. 명상이 깊어지면서 간혹 마경(魔境), 비경(秘境) 및 다양한 체험이 있을 수 있는데 이때 주님의 도움 없이는 곤경이나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 주님의 현존의식과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고백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기도는 주님께 단단히 닻을 내리는 명상기도의 전초 과정이다. 명상기도는 신 ? 망 ? 애 향주삼덕 없이는 불가능한 기도이다.

5) 호흡에 맞춰 일정한 만트라를 되뇌며 듣는다

이제 바야흐로 명상기도의 본격적 시작이다. 시작에 앞서 만트라 없이 호흡에 맞춰 열까지 숫자 세기를 하라. 30분간 만트라를 되뇌며 듣는 명상기도는 재미없고 시간 낭비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는 피상적인 선입견일 뿐이다. 여기서 명상기도의 핵심 요소들인 만트라, 호흡, 되뇌임의 반복, 들음의 가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만트라

만트라는 짧은 성구이다. 계속하여 되뇌일 수 있는 짧은 기도문들은 모두 만트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묵주기도시의 성모송, 동방수도승들이 애송하는 예수의 기도, 스님들의 나무아미타불, 힌두 수행자들의 옴(Aum) 등은 모두 넓은 의미의 만트라이며, 성서에 나오는 아빠, 예수, 마라나타(maranaqa) 및 시편의 짧은 성구들은 모두 만트라로 사용할 수 있다. 여러 고등 전통의 명상에서 공통적 요소가 만트라의 반복이며, 이것은 어느 종교의 독점적 유산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만트라의 반복은 단지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신?망?애 향주삼덕으로 충일되어 있는 마음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절대로 만트라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다. 만트라는 단지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의 고요에 이르게 하는 도구일 뿐이다. 구체적인 비유를 들면 만트라의 반복은 우리 존재의 중심에 계신 주님께 우리를 실어다 주는 우주비행선과 같고, 햇빛을 모아주는 돋보기처럼 흩어지는 마음을 모아주며, 계속 창공을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처럼 내적 여행을 가능케 하며, 수없이 솟아나는 잡초와 같은 분심과 망상을 잘라내는 예초기와 같은 것이다. 만트라는 전장에서 수없이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내는 병사의 방패와 같이 명상기도 중 악한 생각들의 침입을 막아준다. 절대로 서두르지 말고 느긋이 의식적으로 만트라를 부단히 되뇌며 듣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요와 침묵에 이르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천방지축 날뛰는 야생마와 같아서 만트라의 반복을 이용한 수련 없이는 분심 없이 명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유구한 명상전통이 입증하거니와 명상시 마음을 모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만트라의 반복 및 의식적 들음이다.

(2) 호흡

호흡이 불안정하면 마음도 불안하여 흔들린다. ‘호흡은 기도’라는 말도 있듯이 호흡을 통해 하느님이 계신 우리 존재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호흡을 통해서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되어 있는 인간 존재의 허약함과 가난을 깨닫게 되며, 호흡에 맞춰 만트라를 반복하는 중에 그대로 마음의 기도에 이르게 된다. 만트라를 호흡에 맞추어 고요히 반복하라. 구체적으로 ‘마라나타(maranaqa)’ 만트라를 호흡에 맞출 것을 권고한다.31) 한 번 정한 만트라는 바꾸지 말고 계속 사용하라. 나무도 자주 옮겨 심으면 뿌리를 더디 내리듯이, 만트라 역시 자주 바꾸면 명상기도의 진보가 늦어진다. 숨을 들이시면 ‘마’ 내쉬면서 ‘라’ 다시 들이시며 ‘나’ 다시 내쉬면서 ‘타’를 계속 반복한다. 인위적으로 호흡을 조절하지 말라. 여러 호흡법이 있지만 지도자 없이 혼자 하다가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평상시대로 자연스럽게 호흡하면서32) 이에 맞춰 만트라를 반복하면 충분하다. 거칠고 짧은 호흡도 점차 부드럽고 길게 될 것이다.

(3) 만트라 반복의 중요성

왜 따분하고 단조로운 만트라의 반복을 하는가, 시간낭비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반복 아닌 것이 있는가? 호흡, 심장의 박동, 걷는 것, 매일의 출?퇴근, 취침과 기상, 식사, 계절의 순환 등.

생명의 리듬이 반복이며 영성 실습의 기본요소가 반복이다. 반복의 묘미를 터득할 때 비로소 영성생활은 시작된다. 만트라를 반복하며 30분간 듣는 과정은 마치 단조롭고 메마르고 건조한 사막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명상기도는 삶의 압축으로 인생 여정을 상징한다. 의무적, 기계적, 타성적이 아니라 신?망?애의 열정을 지니고 항구히 만트라를 반복하는 인내의 과정이 명상기도이다.

삶 뿐 아니라 명상기도의 성패는 끊임없는 반복의 충실함에 달려 있다.

(4) 들음의 중요성

현대인들은 자기 의사표현에만 급급할 뿐 들으려 하지 않는다. 침묵할 줄 모른다. 명상기도는 일종의 침묵과 들음의 훈련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트라를 되뇌며 듣다 보면 저절로 침묵이 따라오고 심신의 긴장도 풀린다. 소음도 배경음악처럼,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흰구름처럼 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불교는 보는 것 즉 깨달음(覺)에, 눈에 중점을 두지만, 그리스도교는 말씀을 들음에, 귀에 중점을 둔다. 그래서 불교의 좌선에는 눈을 반쯤 뜨지만 우리의 명상기도에서는 의식적으로 듣기 위해 가볍게 눈을 감는다. 명상기도의 수행이 깊어지면서 침묵도 몸에 배이게 되고 듣는 습관은 일상생활에까지 파급되어 잘 듣게 될 것이다. 명상기도는 아주 간단하고 평범 단순한 기도이다.33) 별다른 기교나 창의가 필요치 않으며 단지 믿음과 열정을 지니고 우직할 정도로 꾸준히 실행하면 된다. 어떤 지름길도 요령도 없다. 명상기도의 핵심은 순수한 믿음이다.34) 마음을 느긋이 갖고 정성을 다해 아침, 저녁 2회 30분씩35) 호흡에 맞춰 만트라를 되뇌면서 의식적으로 들어라.

6) 명상기도 중 생각이나 상상이 떠오르더라도 즉시 원위치로 돌아가서 만트라 듣는 것을 계속한다

생각이나 상상, 분석, 추리, 체험에 집착하는 것은 금물이다. 탈선이다. 명상기도는 무엇을 얻는데, 신비를 체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준비하고 기다리는 과정일 뿐이다. 굳이 목표를 말한다면 마음의 순결이다. 생각, 상상, 분석, 추리, 감미로운 체험 등 집착의 유혹을 의식하는 순간 즉시 이탈하여 원래의 만트라를 되뇌며 들어라. 대부분의 명상대가들의 공통적 의견은 생각, 상상, 추리, 개념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머튼(Thomas Merton)36)의 경우는 생각이나 상상 없이 곧장 하느님께 도달하는 것이 자기의 명상기도라 하며 명상기도 중의 온갖 상상들을 일종의 우상으로 간주해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았다.37) 명상기도는 채우는 기도가 아니라 비우는 기도이며, 머리의 기도가 아니라 마음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포기의 수행이며 목표 없는 여행(The journey without goal)이자 지도 없는 여행(The journey without map)인 것이다.38) 온갖 정보와 지식, 스트레스에 찌들어 있는 현대인에게 자유의 숨통을 터주는 기도이다.

처음에는 아무리 의식하여 만트라를 되뇌어 듣더라도 얼마 안 되어 분심 중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원위치에 돌아와 만트라를 되뇌며 들어라. 쉬운 듯하면서도 힘이 들며 시간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인내심이 필요하다. 여기서 용수철의 탄력을 비유로 들고 싶다. 누르면 즉시 튀어나오는 용수철처럼 영성생활도 탄력이 좋아야 한다. 칠전팔기, 백절불굴의 집요함이 있어야 명상기도를 배울 수 있다. 계속 하다보면 언젠가는 30분 내내 분심 없이 명상기도를 할 때가 올 것이다.

7) 불편하더라도 가능하면 같은 자세를 견지한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마음도 흐트러진다. 명상기도는 은총으로 가능하지만 인간의 끈기와 노력이 요구되는 수행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 극기와 절제의 부족이다.

8) 마침 시간이 되면 감사와 찬미기도로써 명상기도를 마친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친다. 이 기도는 주님의 은총으로 명상기도가 가능했다는 찬미와 감사의 고백이다. 명상기도 전 과정중 자세, 호흡, 만트라의 반복 등 타종교의 명상과 유사성을 지니기에 기도를 통한 고백으로 그리스도교적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명상기도가 끝나면 즉시 일어나지 말고 하느님 현존 분위기를 서서히 음미하면서 주님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고백한 후 몸을 전후, 좌우로 풀어주고 잠시 쉰 후 일어난다.


6. 명상기도의 적용

호흡에 맞춰 만트라를 되뇌며 의식적으로 듣는 명상기도를 생활의 여러 장에 적용할 때 끊임없는 기도의 실현과 더불어 하느님 현존 안에서 내적 평화와 침묵을 누리게 된다.

예) 천천히 산책하면서,
잠자기 전 누워서,
피곤할 때 편한 자세로,
불안하고 초조할 때,
기다리거나 쉬는 동안,
성체조배시,
영적 독서 전,
미사준비 시간.


7. 닫는 말

그리스도교 수도승의 삶의 전통에 바탕을 둔 명상기도는 수도승 뿐 아니라 신 ? 망 ? 애 향주삼덕의 열정을 지닌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하고 평범한 수행이며 끊임없는 기도 중에 하느님 현존 안에 사는 관상적 삶을 가능케 해주는 기도이다.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는 중에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리도록 도와주는 기도이며, 마치 목표 없는 여행, 지도 없는 여행처럼 자유의 숨통을 터주면서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이 우리 존재를 가득 채워주는 기도이다.

명상기도는 평면의 삶에서 깊이의 삶으로, 모으는 삶에서 버리는 삶으로, 채우는 삶에서 비우는 삶으로의 전환을 도와주면서 지금 여기, 제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리며 깨어 살게 하는 기도이다. 여기에는 지름길도 요령도 없다. 다만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충일된 마음으로 인내롭게 꾸준히 규칙적으로 기도를 바치면 된다.

(코이노니아 제21집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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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의 내용은 서울 베네딕도회 피정의 집 주최 ‘징검다리 모임’ 강좌 때 강의한 내용을 보완 정리했다. 『신학전망』 107, 1994년 겨울호에 기재된 바 있으며, 신학전망지의 허가를 받아 여기 실었다.

2) 종래의 상상과 되새김을 주로 하는 묵상(discursive meditation)과 구별하기 위해 묵상이라는 말마디를 피하고 명상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3) 9세기 이후 동방 수도자들에게 널리 애용되어온 예수의 이름에 초점을 맞추어 계속 되뇌는 기도문(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으로, 『이름 없는 순례자』, 최익철 역(가톨릭 출판사, 1978). 참조.

4) 성무일도의 도입구 “하느님 날 구하소서. 주여 어서 오사 나를 도우소서”(시편 70,1)는 동방 이집트 수도자들이 사용했던 기도문으로 가시아노 성인이 서방에 전래했다.

5) 일정한 기도말(prayer word)에 고요히 머물러 집중하므로 중심에 이르게 하는 기도 형태로, 그 대표적인 지도자로는 미국 성모승천 수도원의 트라피스트회 수사 신부인 바실리오 페닝턴(M. Basil Pennington)과 시토회 아빠스인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이 유명하다.

6) J. Main(1926~1982): 몬트리올 베네딕도회 수도원 창립자로 명상기도의 보급에 헌신했던 영국 출신의 베네딕도회 신부이다.

7) 보편적이라 함은 널리 오래 사용되어온 방법으로 안전하고 믿을 만하다는 의미를 함축할 뿐 ‘절대적’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명상기도 방법은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앤소니 드멜로 『하느님께 이르는 길』, 이미림 역(분도 출판사, 1988) 참조.

8) 정채봉, 『생활성서』(1993.3), 54-46.

9) 법정, “산방한담”, 『샘터』 1993. 8, 25.

10)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진리를 향한 열정』, 이현주 역(종로서적, 1985), 70.

11) 어느 수도원장의 강론 중에서.

12) 토마스 머튼(T. Merton)도 관상가들이 살아있는 실재와 유리될 위험성에 대해 누누이 경고한 바 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라는 사실에서 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장 영적이었던 예수는 지극한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겠다.

13) 뉴 에이지 운동과 관련하여 정신세계사 출판사에서 많은 책을 내고 있으며, 많은 영감과 통찰, 자극을 받을 수 있으나 안내나 지도 없이 무분별하게 흡수할 때 신앙의 미아가 될 위험성 또한 상존한다.

14) 특히 한 곳에 정주(stabilitas)하여 사는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수도원 원내에 모든 필요한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원 뿐만 아니라 많은 관상수도원도 교회, 가정, 일터의 세 요소를 원내에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5) 베네딕도회의 삶의 양식은 기도, 일, 성독에 의해 뚜렷이 드러난다. 수도승의 삶을 떠받쳐 주는 세 기둥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16) 1데살 5,23 참조. “… 바오로 사도와 초대교회 교부들은 인간을 영과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서구사상에서는 삼중적 구조의 인간관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육체와 정신이라 하는 이중개념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인도에서는 삼중적 구조의 인간관이 항상 받아들여지고 있다” : 비드 그리피츠, 『동양정신과 서양정신의 결혼』정창영 역(깊이와 넓이, 1991), 89.

17) 자연(흙)과 노동에서 떠나 도시문명화, 비인간화 추세의 시대에 있어, 기교 없는 기도, 일, 성독의 단순한 삶의 양식이나 피정 방법은 인간성 회복에 크게 기여할 것이고 갈수록 각광을 받을 것이다.

18) 성독은 ‘영적 독서’로 번역하면 그 뜻이 약화된다. ‘聖書讀書’라 할 수 있으며, 대상은 주로 성서로, 말씀을 되새기고(meditation), 기도(prayer)를 바치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잠기면서(contemplation),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영혼과 정신과 몸이 하나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섭취하는 ‘全人的 讀書’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성서와 유리된 묵상, 관상은 생각할 수 없었으며 묵상, 관상은 성독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 다음에 열거하고 있는 명상기도의 필요성은 교과서적인 진실이기보다는 체험적 진실에 근거하고 있다.

20) 주식과 간식의 투박한 예를 든 까닭은 주객도치(主客顚倒), 본말도치(本末顚倒)의 현상을 바로잡기 위함이다. 공동기도 및 전례기도, 노동, 성독이 주식이고 명상기도는 간식일 뿐이다.

21) 만트라(mantra)는 명상기도시 계속 되뇔 수 있는 기도말로 다양한 성구를 택할 수 있다.

22) H. D. 소로우, 『숲 속의 생활』, 정성호 역(샘터사, 1987), 104.

23) Susan Walker, 『침묵의 대화』, 이영주 ? 권희순 역(고려원미디어, 1993), 332.

24) 기적이나 신비체험에 집착하지 않고 순수한 믿음을 지향하는 것은 종파를 초월한 모든 영성가들의 공통점이다: 솔랑쥬 르메르트, 『라마크리슈나』 정옥상 역(대원사, 1988), 162: “비밀스런 능력에 관심을 갖는 인간은 신의 임재 속에 살 수 없게 된다. 그러한 현상들이 네 안에 생겨나더라도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 비밀스런 능력을 획득하기는 쉽지만 마음의 순수에 이르는 길은 몹시 힘들다. 순수함을 소유하는 자는 종교의 진정한 모습을 안다.”

25)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진보에 있어 모든 단계는 제자리에로 귀환이다”(Every step in advance is a return to beginning): T. 그린, 『샘이 마를 때』, 성찬성 역(성바오로 출판사, 1991). 175 -176.

26) 홍신자, 『자유를 위한 변명』(정신세계사, 1993), 297; “나는 자유를 찾아 떠나고 또 떠났지만 지금 거의 제자리에 돌아와 있다. 제자리에 돌아오기 위해 30여 년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27) H. 뉴엔. 『제네시 일기』, 성찬성 역(성바오로 출판사, 1989), 43.

28) 길희성, “예수, 보살, 자비의 하느님” 『사목』168호, 1993, 1, 108: ‘空(공)은 사랑의 존재론적 개념이며 사랑은 空의 인격적 언어이다’라는 주장에서 불교의 空과 그리스도교의 사랑이 체험상 같은 실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29) 스님들의 좌선자세를 많이 참조했다. 이런 정평이 나 있는 몸의 자세는 인류의 보편적 유산이기에 명상기도시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30) 조셉 캡벨, 『신화의 힘』, 이윤기 역 (고려원, 1993), 181.

31) 메인 신부가 강력히 권고하는 만트라가 ‘마라나타’(maranaqa; 오소서 주 예수여: 1고린 16,21)이며, 여기 소개하는 명상기도법은 주로 메인 신부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32) 월폴라 라훌라, 『붓다의 가르침』, 진철승 역(대원정사, 1988), 105; 불교의 명상법에서도 평소와 같이 자연스럽게 호흡할 것을 권한다.

33) 영성의 진위(眞僞)는 평범성, 단순성, 개방성에 의해 드러난다.

34)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Amity (New york, 1986), 11.

35) 메인 신부는 아침, 저녁 2회, 각각 30분씩 꾸준히, 규칙적으로 명상기도 바칠 것을 권한다.

36) T. Merton(1915~1968): 미국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승으로서 동 ? 서양 제종교의 신비 전통에 정통하였으며, 종교간의 대화에도 크게 기여한 20세기 가톨릭의 대영성가이다. 번역된 책으로는 『칠층산』, 『동서관상』, 『마음의 기도』, 『명상의 씨』 외에 다수가 있다.

37) M. Basil Pennigton, Thomas Merton Brother Monk (Harper & Row, 1987), 160.

38) 목표 없는 여행, 지도 없는 여행이란 말마디는 하느님 섭리의 은총 하에 내적 자유를 누리게 하는 명상기도에 대한 적절한 비유이다.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5 기도와 전례, 2004년, 글
이수철 프란치스꼬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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