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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프란치스코 교황의 위로: 아버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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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2-17 ㅣ No.637

[기억, 아남네시스] 프란치스코 교황의 ‘위로’ : 아버지 마음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많은 문제와 고통과 질병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과 영적인 위로를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2013년 4월 5일, 성녀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

살면서, 우리는 누군가 건네는 위로의 말에 위로보다는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 위로한다고 한 말이 위로가 아니라 되레 상처가 되어 아픈 가슴에 더 깊은 상처를 내는 경우가 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 5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실종자들의 이름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적혀 있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남는 것은 실종자 가족들의 깊은 슬픔과 국민적인 트라우마에 깊이 동참하였음을 보여주는 종합적인 단면이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의 끝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도로 그들의 아픔에 동행하며 ‘힘내라,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는 아파본 사람만이 안다.


위로부터 오는 참된 ‘위로’

히브리어 동사 ‘위로하다’는 말은 어근이 되는 ‘니함’에서 유래한 말로 ‘격려하다’, ‘독려하다’, ‘지지하다’, ‘용기를 주다’ 등으로 해석된다. 사역동사로는 ‘공포나 고통의 상황에서 한숨을 쉬게 하다, 호흡하다.’는 뜻이 있다. 인간이 존재의 심연에서 말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을 느끼며, 그래도 생명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호흡, 숨을 쉬어야 하는 것과 연관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반의어인 dis-consolate다. 이 말은 ‘절망적인’, ‘수심에 잠긴’, ‘슬픈’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한마디로 극도의 상황에서, 숨조차 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숨통을 열어주는 행위, 숨을 쉴 수 있게 도와주는 행위가 바로 ‘위로’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위로의 유일한 샘으로 성자와 성령을 통한 하느님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숨통이 막혀 죽지 않으려면 하느님과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 방법으로 회심(2코린 7,13)과 말씀(로마 15,4)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전(2코린 7,4.6)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희망의 원천’(로마 15,4)이자 궁극의 ‘위로자’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로 부자와 라자로의 일화(루카 16,25)를 들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초기부터 아무도 찾지 않는 곳, 죽을만큼 힘든 곳을 찾아 살아있으되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이들 가까이 다가갔다.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곳, 갈등과 고뇌가 인간 존재를 갉아먹는 곳을 찾아가 함께 있어주고, 들어주고, 아픔을 나누며 살아갈 길을 모색해 주었다.

2014년 8월, 한국에 머문 98시간 동안에도 체력의 한계를 넘는 일정 대부분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하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장애인, 새터민, 이주노동자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만나는데 사용하였다. 아픈 자녀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보듬어주는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 마음’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그분의 위로는 단순히 격려하고 칭찬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심연을 공감하고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형제의 곁을 떠나지 않는 데 있었다. 하느님께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절규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죄인들 사이에서 해방을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보여주신 ‘사랑’이 그런 것이었음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시대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직후부터 계속해서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로 사이를 순례하는 교회’(peregrinatio inter persecutiones mundi et consolationem Dei, 성 아우구스티노)는 상처 입고 죄에 물들어 하느님의 위로가 있어야 하는 사람들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나가는 교회’, ‘출발하는 교회’,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가 그렇고, 사목자들에게 “양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어달라는 주문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 · 사고는 오늘날 인류가 겪는 지도력의 부재를 알려주는 실마리가 되었다. 시끄러웠던 우크라이나 사태도 이면을 들여다보면 대통령과 집권 정당의 부정과 부패가 있었고, 세계 곳곳의 많은 지도자가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있거나, 강경하고 독단적인 정책으로 인류를 긴장시키고 있다.

영토 문제, 핵무기와 각종 전쟁무기 문제, 환경과 생태파괴의 주범으로 유수의 지도자들이 떠오르고 있다. 거기에 경제 불황이 몰고온 여파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어 삶에 대한 불안감은 날로 커지고 있다. 나날이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시대를 사는 것이다.

이에 반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 시절부터 사목자로서 청렴하게 살았고, 교황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서민들과 힘없는 이들에게 다가가는 행보를 이어왔다. 또 그의 소탈한 모습은 교회 안팎에서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고, 자본주의 시대 황금만능주의와 이익 지상주의, 빈부격차, 난민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발언함으로써 인류에게 따뜻한 지도자로 다가갔다.

그가 2013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민중의 교황”이라며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고, 미국의 대중음악잡지 「롤링스톤」(2014. 1)이 “겸손과 공감의 대명사”라며 표지 모델로 선정한 것, 그리고 2014년 3월, 「포천」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 1위에 오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인류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2014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 삼종기도 후 훈화 말씀 중에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려 희망의 메시지를 이렇게 전하였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이사40,1). ‘위로의 책’ 이사야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유배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위로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을 가지고 내일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시대의 이사야 예언자가 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곳에서 간결하고 현실적이고 말씀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설교를 통해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되고 있다. 적어도 재임 직후 찾아간 람페두사에서도 그랬고, 한국 방문에서도 그랬다.

고통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불어닥친다. 암흑같은 시간을 지나고 견디기 힘든 시험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사야 예언자는 말했다. 이제 위로의 시간이 도래하였으니, “주님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40,11).

교황은 이것이 바로 당신의 창조물인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모습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들, 고통에 숨통이 끊어질 것 같은 처지에 있는 양들을 언제나 일대일로 대하며 그들이 내미는 절규어린 쪽지 하나조차 가볍게 대하지 않고, 비서에게 넘기지도 않았다. 모두 당신의 품 안에 고이 간직하여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야 하는 백성의 소중한 탄원서로 여겼다.

우리의 사회는 자본주의에서 밀려난 인간, 문명과 문화의 풍요 속에서 인간성의 빈곤이 난무하고,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대재난으로 우울증이 보편화된 상황에 부닥쳐 있다. 그런 속에서 ‘사람을 챙기는’ 인간다운 인간,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됨을 촉구하며 그리스도의지상 대리자로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힐링의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위로받은 자에서 위로하는 자 되기

2013년 4월 5일, 성녀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난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많은 문제와 고통과 질병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과 영적인 위로를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엄청난 고통에도 결코 평화를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이런 평화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어서 살 수도 팔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간청해야 할 하느님의 은사입니다.

이런 평화는 영적인 위로의 마지막 단계에 있으며, 기쁨의 탄성과 함께 시작됩니다.”라고 하였다. 현실이 그토록 아름답지만은 않은 세상에서 영적인 위로와 평화의 은총은 오로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기쁨의 탄성과 함께 시작된다고 한 것이다.

‘위로에 열린 문’(2013년 6월 11일, 성녀 마르타의 집 강론)이라는 표현에서 ‘위로’의 의미를 우리 마음에 하느님이 현존하시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두며,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나가라고 재촉하셨고, ‘재건을 위한 위로’(2013년 12월 10일, 성녀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라는 표현을 통해서는 단절되고 상처난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어떤 형태의 대화라도 하라고 촉구하셨다.

한마디로 교황은 이스라엘 백성을 챙기시는 하느님과 현실의 문제와 고통 중에 있는 인간에게 영적인 위로를 하시는 예수님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했다.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위로를 받고, 자신에게서 나와 교회와 함께 기쁨을 나눕니다”(2014년 12월 9일, 성녀 마르타의 집 강론).


위로자이신 성령님, 오소서!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체념에 빠진 사람들, 신뢰와 희망을 잃고 급기야 자신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정체성을 잃고 어디를 향해 질주하는지조차 모르고 맹렬히 달려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곳곳에서 ‘잠시 멈춤’이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런 상황을 반추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많은 상황이 위로를 주는 성령을 필요로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힘주어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의 현존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인도 필요로 한다고 강조한다. 존재의 의미를 되찾아주고, 자극을 주며, 생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분, 희망의 불꽃을 켤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며, 이와 더불어 성령의 위로를 받고 기쁘게 사는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과 영적인 위로를 남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우리부터 자신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황께서 걷고 보여주고 계신 낮은 자리를 얼마나 찾고 있는가? 혹시 그분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가? 교황께서 명하시는 가르침에 불편해하지는 않았는가?

이와 함께 이런 물음도 해봄 직하다. 고통 중에 있는 형제에게 한 위로가 주님한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척도에 따른 것은 아니었는가? ‘세상이 다 그렇게 한다.’며 내놓은 변장한 위로, 위선적인 위로, 땜질식 위로는 아니었는가?

새해, 하느님의 모든 양이 한마음한 몸이 되어 세상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는 ‘위로자’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 김혜경 세레나 - 로마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선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강의전담교수로 있다.

[경향잡지, 2015년 2월호, 김혜경 세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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