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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5: 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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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09 ㅣ No.663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5) 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③


사제품 받은 요한 수사, 데레사 수녀를 만나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학생 수도원 원장으로서 학생 수사들을 지도하며 신학 석·박사 과정을 공부한 알칼라대학. 스페인 왕실에서 설립한 이 대학은 살라망카대학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대학이었다.


성녀 데레사와의 역사적 만남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63년부터 1568년까지 살라망카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학업을 마쳐갈 무렵이던 1567년, 살라망카 주교좌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첫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그해 여름, 고향인 메디나 델 캄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곳에는 두 번째 개혁 가르멜 수녀원 창립을 위해 제자 수녀들과 함께 와 있던 성녀 데레사가 있었습니다. 성인은 함께 사제품을 받은 친구 신부의 주선으로 성녀 데레사를 만나게 됩니다.

영성사에서는 당시 이 두 분의 만남이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자주 회자하곤 합니다. 두 분 모두 영성사에 큰 획을 남긴 대단한 영성가이자 교회박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두 분의 만남으로 인해 남자 맨발 가르멜 수도원 탄생의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됩니다.

당시 성녀는 관상적이면서 동시에 사도적인 자신의 이상을 함께 할 남자 맨발 가르멜의 창립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철저한 침묵과 고독 그리고 희생과 기도를 특징으로 하는 봉쇄 수녀원을 설립했지만, 성녀는 교회 가르침을 곳곳에 전하고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1000개의 목숨이라도 바칠 만큼 영혼 구원과 성화에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존여비 관념이 팽배했던 중세에 수도자가 된 여인들은 수많은 제약 가운데 봉쇄 수녀원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자신의 이상을 함께 나눔과 동시에 교회에 실질적인 봉사를 하게 될 남자 맨발 가르멜의 창립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반면, 요한 수사 같은 경우에는 사제품을 받을 즈음에 더욱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하고 싶은 거룩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가르멜 수도회에서 엄격한 은수 생활을 하는 카르투시오 수도회로 이전하려는 고민 중에 있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친구 신부는 요한 수사에게 성녀 데레사를 소개해 주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1567년 여름, 메디나 델 캄포의 가르멜 수녀원에서 두 성인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성녀 데레사는 그런 열정을 갖고 있던 요한 수사를 설득해서 남자 맨발 가르멜 수도원의 첫 번째 멤버가 되도록 부탁했고, 요한 수사는 그런 성녀의 계획을 들으며 성녀와 의기투합을 하게 됩니다.


개혁 가르멜 수도자가 되다

이렇게 해서 맨발 가르멜의 첫 번째 수사가 된 요한 수사는 성녀 데레사가 마련해 준 첫 번째 남자 맨발 가르멜 수도원에서 1568년 11월부터 생활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요한 수사는 기존 가르멜에서 사용하던 성 마티아의 요한이란 수도명을 버리고 ‘십자가의 요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성녀 데레사가 창립한 첫 번째 남자 수도원은 아빌라에서 멀지 않은 두루엘로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은인의 주선으로 희사받은 작은 집을 고쳐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성녀가 초창기 가르멜 수도원, 수녀원의 역사에 대해서 쓴 「창립사」 14장을 보면, 당시 몇몇 수녀들과 이곳을 보기 위해 방문하고 나서 받은 강한 인상과 감동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십자가의 요한을 비롯한 세 분의 초창기 맨발 가르멜 수사들은 엄격한 고행과 기도 속에서 온전히 세속을 이탈하고 주님의 법을 묵상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마을에 나가 강론과 성사 집전을 통해 영혼 구원과 성화를 위해 일했습니다.


알칼라 학생 수도원 원장 시절

점차 이들의 수도 생활에 대한 명성이 널리 퍼지면서 이들과 함께하려는 지원자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1570년 두루엘로 수도원을 폐쇄하고 이곳에서 가까운 만세라라는 마을에 희사받은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71년, 십자가의 요한은 알칼라라는 대학 도시에 창립된 새로운 학생 수도원의 원장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당시 알칼라에는 스페인 왕실에서 나라의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설립한 알칼라대학이 있었는데, 이 대학은 살라망카대학과 더불어 스페인의 당대 최고 대학이었습니다. 성인은 이 도시에 설립한 새로운 학생 수도원 원장으로서 알칼라대학에서 공부하던 학생 수사들을 지도하며 동시에 이 대학에서 신학으로 석·박사 과정을 공부했습니다.


아빌라의 강생 수녀원 지도 신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성녀 데레사의 생애와 겹치는 부분이 종종 나옵니다. 1572년 성녀 데레사는 장상 신부님들의 명에 따라 자신의 친정집과 같은 아빌라의 강생 가르멜 수녀원의 원장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성녀는 이 큰 수녀원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쇄신 작업을 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당시 알칼라 가르멜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던 십자가의 요한 수사를 강생 수녀원의 영적 지도 신부로 초대한 일이었습니다. 성녀는 요한 수사의 온화함과 영적 생활에 대한 깊은 지식이 수녀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72년부터 1577년까지 만 5년을 아빌라에서 살면서 150명이나 되는 수녀들을 영적으로 지도했으며 미사, 성사 집전을 비롯해 다양한 강의를 통해 수녀들의 영적 쇄신을 도모했습니다. 성인은 이곳에서 봉사하며 많은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10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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