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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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행복한 사람들: 자비와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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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29 ㅣ No.1230

[행복한 사람들] 자비와 용서

 

 

‘하느님은 자비와 용서로 정의를 넘어서는 분’(자비의 얼굴 21항)이시고 정의의 바탕은 사랑이다. 우리는 누구나 용서와 자비의 부르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용서와 자비는 회개를 전제로 하고, 정의와 자비는 서로 대립하거나 서로 모순된 실재가 아니다. 오히려 한 실재의 두 가지 차원으로 충만한 사랑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양립하여 발전한다(자비의 얼굴 20항).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하고, 정의는 언제나 사랑과 함께 해야 하며, 용서를 통해서 우리는 자비를 체험한다.

 

용서는 자비를 통하여 실천되는 가장 고귀하지만 가장 어려운 행위다. 자비는 자신에게 모욕을 준 사람을 용서함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44)고 하셨고, 주의 기도에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기를 청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15). 자비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마태 18,21-22), 즉 끝없이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것이라고 예수는 말한다.

 

예수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라는 호세아 예언자의 말씀(호세 6,6)을 인용하시며, 자비가 제자들의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시고 이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자비를 해방활동과 쇄신의 원천으로 여기셨기 때문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거부당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준수가 인간존엄에 대한 배려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시면서 율법준수보다 자비의 실천이 신앙의 핵심임을 강조하셨다.(자비의 얼굴 20항 참조)

 

인간의 친교는 끊임없는 실수와 결함 때문에 불완전하다. 고의적인 잘못이나 편견, 부정이 우리의 친교를 약화시킨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타인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마음은 매우 좁아진다. 그 작은 공간 안에서는 작은 문제조차 크게 보인다. 하지만 타인을 염려하는 마음을 갖는 순간 우리 마음은 넓어진다. 이때는 자신의 문제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별로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용서를 통하여 공동체를 재건하고 굳건하게 한다.

 

우리는 용서의 필요성과 가치를 잘 알지만 현실에서 우리에게 부당하게 상처를 준 이들에 대한 감정의 골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용서는 실제 삶 안에서 결코 쉽지 않다. 개인의 차원에서나 공동체 차원에서나 상처는 깊고 오래 간다. 나와 무관한 사람 사이에서 생긴 문제라면 용서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수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즉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친지에게서 받는 마음의 상처나 배신을 용서하기가 훨씬 더 힘들다.

 

우리는 보통 상처를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을 구별하면서 자신을 상처받은 피해자로, 상대방을 상처를 준 가해자로 여긴다. 상처는 언제나 쌍방적인 것이다. 형제의 눈 속의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기(마태 7,3 이하) 때문에 우리는 쉽게 겉모양만 보고서 남을 판단한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용서를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큰 수행이라고 말한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는 이렇게 가르친다. “용감한 사람을 보기 원하면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을 보라. 영웅을 보기를 원하면 미움을 사랑으로 되돌려 보내는 사람을 보라.” 용서는 자신 안에 갇힌 에너지를 밖으로 보내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는 데 쓸 수 있게 한다. 용서는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치료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다.

 

나에게 잘못했거나 상처를 준 사람을 이미 용서해 주었고 또 오래 전에 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상황이나 사건들이 생기면 내 안에서 그 사람에 대한 거부감, 선입견, 편견, 증오의 감정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이 완고해지고 예전의 상처가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 감정이 아픈 과거를 온전히 잊어버리기까지는 긴 세월이 요구되므로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기까지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진정한 사랑과 용서는 인간의 힘이나 노력만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 해 동안 평신도들과 수도자들의 피정을 동반하면서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용서하지 못해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피정, 세미나, 특강을 할 때엔 거의 언제나 강의 마지막쯤에 용서에 대해서 말하며 축복의 기도를 권한다. 내가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그 사람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축복을 비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   )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축복해 주십시오!”

 

아주 간단하고도 쉬운 기도이다. 하지만 막상 바치려고 하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기도 중에 누굴 제일 먼저 생각하며 기도하는가? 틀림없이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에게 가까운 사람들일 것이다. 한데 사랑하기 어렵고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위해서 이 축복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몇 번 혹은 며칠 동안은 어렵잖게 이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단시일에 변하기를 기대하지만 실은 축복의 기도를 드리는 그 사람 자신이 먼저 변화되기 시작한다. 기도를 바치며 마음 안에 거부감, 미움의 감정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상처가 치유되기 때문이다.

 

상처의 진정한 치유는 용서를 통해 자유를 체험한 사람에게 일어난다. 천천히 상대방을 이해하면서 용서와 치유가 이루어진다. 이해는 용서의 첫걸음이다. 용서는 단번에 되는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내적투쟁이라는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는다. 용서는 새로운 기회를 준다. 과거의 잘못을 들추지 않는다. 우리는 상처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고 또한 끊임없이 용서하는 법을 습득해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웃들에게 얼마나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며 살았는가에 달려 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한 사람이 진정 다른 이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느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는 정도에 따라 당신의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다른 이의 결점이나 잘못을 인내하고, 참아주고, 용서해 주고, 원수까지도 용서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달라이 라마의 말처럼 우리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큰 수행이 아닐까!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7년 가을호(Vol. 39), 정하돈 안나 마리아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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