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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4)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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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34

제4강의 :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5월 9일 오후)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오늘 이 시간 저희와 함께 하여 주시고, 주님의 성령으로써 저희 눈을 밝혀 주시고, 주님께서 저희에게 베푸신 한량없는 사랑을 깊이 깨달을 수 있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이사야서 49장 15절 후반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미가 혹시 잊을 지 몰라도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어서 "너는 나의 두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어떤 번역은 "나는 너의 이름을 내 두 손바닥에 새겨 두었다"고 말합니다. 같은 뜻을 좀 다르게 말한 것 같습니다. '너는 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 '너의 이름은 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 이 말씀을 잘 새겨보면, 결국 어떤 의미로 하느님께서는 나를 보지 않고서는 당신 손을 보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우리가 그분 가까이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이지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대단히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남편이 자기 아내를 알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내 이름을 당신 손바닥에 새겨두셨다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남편이 자기 아내를 알듯이 그런 깊은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나를 알고 계신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전 강의에 이어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는 단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부모·자식간의 관계나 또 어떤 연인 사이의 관계와도 비길 수 없는 깊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시는가? 그것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분이 친히 나를 의식하고, 나를 지극한 사랑에서 지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시편 139장을 보면 13절,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오장육부 만들어 주시고 어머니 뱃속에 나를 빚어 주셨으니,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런 놀라움을 느껴 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존재는 물론이고, 우리의 이목구비를 깊이 살펴보면 참으로 어느 것 하나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몇 해 전에 대전에서 엑스포(Expo)가 개최되었는데 그 대전 엑스포 전시장 안에 바티칸관이 있었습니다. 대전 엑스포는 첨단 과학 기술 엑스포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첨단 과학 기술 엑스포 전시장 안에 어째서 바티칸관이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도 처음에 바티칸관이 거기 있어야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엑스포에서 전시하는 것은 첨단 과학 기술인데 우리가 첨단 과학 기술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엑스포에 참여하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가톨릭'하면 오히려 과학 기술의 발전에 반대해 온 세력과 같이 생각하고, 그 대표적인 사례로 갈릴레오가 거명되는 그런 교회인데, 그런 교회를 대표하는 바티칸이 대전 엑스포의 한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참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첨단 과학 기술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과연 그것은 타당한 말이겠습니까? '첨단 과학 기술이 있을 자리에는 하느님께서 계실 곳이 정말 없는 것일까'하고 아주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면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자리는 분명히 있어야 하고, 또 오늘날 과학자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할 때 오히려 과학 발전은 더욱 건전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현대 과학 기술이 자랑하는 첨단 기술의 총아는 바로 정밀한 컴퓨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컴퓨터는 인간의 두뇌를 조금 흉내낸 것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첨단 기술을 만들어 낸 것은 과연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고, 인간의 두뇌입니다. 그리고 이 인간의 두뇌를 인간에게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과학 기술을 낳게 한 것이 인간이고, 그 인간을 낳으신 분이 하느님이라고 한다면,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였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계실 자리는 거기에 있고, 거기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술 문명이 아무리 발전했다 하더라도 사람의 기술이 인간 두뇌 그 자체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답니다. 사이버네틱스라는 책의 서문에 보면 그것에 관한 말이 나옵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경물리학자인데 그분의 말이 인간 두뇌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 두뇌의 모사품을 만드는데 소요되는 전자 세포만 해도 최소한 100억 개가 들어갈 것이고, 그 다음에 그 세포들을 나열하는 데 필요한 공간은 350km2, 넓이도 350km, 길이도 350km, 높이도 350km인 공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공간이 있어야 인간 두뇌를 나열하는 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신경 구조를 이루는 철심이 또한 수백km2가 필요하고, 그것을 작동하는 데 드는 전력은 자그마치 100억 와트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인간 두뇌라는 것이 참으로 엄청난 것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진정 세상을 지으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지배하라'고 인간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머리를 가지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 친히 지으신 우주의 신비도 벗길 수 있는 능력까지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과학 기술을 발전시켜 그런 정밀한 컴퓨터를 만들어 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 인간의 두뇌를 지으신 하느님, 인간 자체를 존재케 하시는 하느님, 또 인간이 벗겨도 벗겨지지 않는 우주의 신비를 낳으신 하느님께 비길 수는 없겠습니다. 참으로 오늘의 인간이 아는 지식의 총체를 말하자면 그것이 엄청나게 큰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파스칼(Pascal)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아는 지식의 총체는 알아야 할 지식의 대양에 비하면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시편 139장의 저자와 같이 다시 한번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을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신비들, 그저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찬미의 노래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어제 시작할 때도 인용한 그 구상 선생님은 『말씀의 실상』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 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유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웠고,

창 밖 울타리 한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 꽃도

부활의 시범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한 우주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그 신령한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고, 상징도 아닌 실상으로 깨닫습니다.

 

구상 선생님은 시편 139편의 저자처럼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자기 자신이 있다는 그런 놀라움을 깨달아서 손가락을 보고, 손가락이 열 개가 있다는 것, '어떻게 이렇게 열 개가 있는가', 이것부터 시작해서, 하느님 말씀, 곧 만유 일체가 하느님의 말씀에서 나왔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 139장은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 눈은 보고 계셨으며 그 됨됨이를 모두 당신 책에 기록하셨고 나의 나날은 그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습니다." 이 시편 139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내 존재, 내 생명, 내 인격의 근원이시고 바탕이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나를 지어주셔서, 나를 사랑하셔서 거기서 비로소 '나'는 '나'일 수 있고, 존재할 수 있고, 또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 아오스딩은 이런 하느님에 대해 묵상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 자신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사실 나 자신이 나를 아는 것보다도 더 나에 대해 잘 아십니다. 나보다 더 먼저 나를 아시고, 또 영원으로부터 아시니까, 더 먼저 아시고 더 깊게 아시고, 더 자세히 아시고, 더 완전히 나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다. 나 자신은 나를 완전히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 자신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나의 마음도 정신도 육체도 오장육부와 뼈마디 마디를 다 아십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참으로 아오스딩의 말씀처럼 나 자신보다도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인용하고 있는 시편 139장의 말씀처럼, 우리는 과연 이러한 하느님의 얼을 떠나서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새벽에 날개를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으로 나를 꼭 붙드십니다." 나를 꼭 붙드시는 그 손, 그 하느님의 손, 그것은 참으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손입니다. 안기부와 같이 감시하는 손이 아니고, 정말 사랑 자체이신, 사랑으로 나를 잡아주시는 어머니의 손과 같은 그런  사랑으로 나를 잡으시는 하느님의 손입니다.

 

요한 1서 4장에 보면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7절)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이 있고 또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줄기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의 줄기에서 나왔고, 물줄기 같은 그 사랑을 우리가 마실 때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1서에서는 또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를 말한 다음,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10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계명 중에 제일 중요한 첫째 계명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너희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계명,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보다도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에 의해서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구원되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참으로 사랑 자체이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다는 그것은 100% 진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해도 100% 완전한 사랑을 하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통계 수치로 잴 수 없을 지 모르겠지만, 많이 사랑할 때는 50% 정도, 연애를 하고 있는 연인들이 막 불이 타서 어찌할 바를 모를 만큼 사랑할 때는 아마 자기들 느낌은 100%가 넘는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는 아주 사랑에 미쳐버렸으니까 완전히 불타오를 것처럼 생각되고 100%가 넘는 것처럼 느끼는데, 그것은 얼마가지 못합니다. 그러한 인간적인 사랑은 시련을 만나게 되면 120%되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12%도 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사랑은 정말 완벽하기 때문에 100%, 우리를 정말 100%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 틸리히(Paul Tillich)라는 분이 있는데, 이 사람은 '믿음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The courage to accept the acceptance"(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께서 과연 부족한 우리 자신을 정말 사랑하실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하느님께서는 정말 당신 마음에 들만큼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만 우리를 사랑하실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인이 되어야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아마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아무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람도 완전하신 하느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완벽한 성인은 결코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못난 모습, 부족함을 다 아시면서도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시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면 왜 용기(Courage)라고 그랬을까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건데 거기에 무슨 용기가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랑의 손에 자기를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손은 우리가 측량할 수도 없는 깊은 심연과 같은 것입니다. 그 끝을 모르는 그런 심연과  같은 것이 하느님의 사랑인데, 그러한 깊고 깊은 하느님의 사랑의 바다에 자기를 완전히 내맡기고 띄워내리는 것,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하느님께 완전히 투항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완전 투항'이라고 하니까 꼭 전체주의 같기는 하지만 이 'total surrender'라는 표현은 영성 생활에서 가끔 언급되는 표현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분이 이러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아주 높은 곳에 올라가서, 우리 같으면 63빌딩 같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저 아래서 '나를 믿고 뛰어내리라'는 소리만 듣고 몸을 던지는 그러한 용기라고. 믿음이란 이처럼 캄캄한 어두움, 하느님 사랑의 바다의 캄캄한 어두움 속에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뛰어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저도 이 피정을 시작할 때 제가 그랬죠. 하느님 '저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저에게 믿음을 주십시오'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고. 왜냐하면 아무리 살펴봐도 그분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그런 신뢰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어떤 증거를 요구하면서 뭔지 모르게 하느님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살아가곤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고, 거기 완전히 투항하는 용기가 확실히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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