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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가정사목] 나눔을 실천하는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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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2 ㅣ No.50

나눔을 실천하는 가정

 

 

시작하는 말

 

지금까지 세 차례([사목] 2, 5, 8월 호)에 걸쳐 미사 전례의 정신을 가정 안에서 어떻게 살아 있는 신앙 생활로 살려낼 수 있는지에 대하여 ‘성화되는 가정’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미사 전례의 중요 부분들과 연결지어 가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미사 전례 거행의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영성체’ 곧 나눔의 신비를 어떻게 가정 생활에서 살려낼 수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영성체는 그 자체가 나눔의 행위이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인간이 이웃과 어떻게 자신을 나누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지, 가정 공동체를 중심으로 몇 가지 관점에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부부간 나눔의 실천

 

성사로 맺어진 부부는 작은 교회인 한 가정 안에서 모든 삶의 바탕이 되는 원천이다. 날마다 서로의 사랑 안에서 혼인성사를 완성하도록 부름을 받은 부부에게 사랑의 나눔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특별한 소명이다. 부모의 역할에 앞서 부부의 역할 수행이 먼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사도적 권고 [가정 공동체]에서 “부부의 일치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적 보완성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전체적 생활 계획, 가진 것과 됨됨이를 나누려는 부부의 인격적 노력을 통해서 성장한다. 이 때문에 이 일치는 인간의 깊은 요구의 결실이고 징표이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이 인간적 요구에 유의하여 그것을 확신하고 정화하며 들어올리시어 혼인성사로써 완성으로 이끄신다. 그 성사 거행에서 오시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부부에게 사랑의 새로운 공동체의 은혜를 주신다. 이 공동체는 교회를 주 예수님의 신비체로 만드는 저 특수한 일치에 대한 살아 있는 진실된 모상이다.”(19항)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오늘날 회복되어야 할 많은 문제들 가운데 부부의 문제가 무엇보다 먼저 다루어져야 한다는 교회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고결한 소명을 지닌 부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내어 주셨던 것과 같은 나눔의 신비를 어떻게 서로 실천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요즈음 사람들은 부부 사이를 말할 때 사랑의 관계보다 서로의 손익을 따져 둘 중 누가 더 희생하고 봉사하는지로만 자신들을 바라보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대체로 배우자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사랑한다는 언어를 사용하는 시기는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대부분의 경우는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희생하고 봉사하며 양보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일쑤여서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인간은 서로를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인지라,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서약한 부부라 할지라도 늘 사랑하는 분위기 속에서만 살아갈 수 없고, 그 관계 속에 미움과 상처, 실망과 분노가 끼여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자신에게 돌아올 손익을 따지기보다 배우자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다면 더 나은 사랑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신비이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우리는 자신의 몸이기도 한 자기 배우자와 함께 몸과 마음을 나누도록 노력해야 하는 특별한 소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부부의 관계에 대하여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에페 5,28-29)라고 부부의 일치를 강도 높게 설명하고 있다. 여하튼 부부의 가장 큰 소명은 함께 나누며 살아가면서 서로 일치하는 사랑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보여 주는 데 있으므로 서로를 참되게 받아들이고 나누는 부부 사랑의 깊은 실천이야말로 성체 신비를 증언하는 삶이 아닐 수 없다.

 

부부 모임을 위한 미사에서 영성체 예식 때 부부가 서로 성체를 영해 주도록 해본 적이 있다. 사제에게 성체를 받아 자기가 영하는 대신 배우자에게 건네주었을 때 한 지체로서 사랑의 헌신을 위한 새로운 각오가 다져지는 특별한 체험이 되더라는 부부들의 소감을 들으면서 주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사랑 또한 마음속에만 담아 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표현하기 시작할 때 더욱 크고 깊어 가는 지속적인 힘이 생겨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어떤 형태로든 부부간에 자그마한 사랑의 나눔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그들의 가정은 분명 사랑의 작은 교회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겨났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M.E.’ 운동이나 교회 여러 분야에서 더 구체적인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부부의 참사랑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몸과 피를 다 내어 주셨던 구원의 신비가 바로 부부를 통해 가정 안에 피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2. 가족간 나눔의 실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 세계의 그리스도인 가정의 역할에 관하여 “가정 공동체의 성원들 사이의 관계는 ‘거저 줌’의 법칙을 따른다. 이 거저 줌은 각자의 인간적 존엄성을 가치의 유일한 기반으로서 존중하고 육성할 뿐 아니라, 진심으로 받아들임, 만남과 대화, 이해를 따지지 않는 협조 자세, 관대한 봉사, 깊은 유대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 내 성원들의 진정하고 성숙한 일치를 육성하는 것은 사회 생활의 기본적이며 특수한 교육이고, 정의, 존경, 대화, 사랑으로 특징지어진 좀더 넓은 공동체 관계를 위해서도 본보기와 자극이 된다.”([가정공동체], 43항)라고 권고하였다.

 

이 거저 줌은 이미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베풀어 주셨던 은혜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적에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고 가르치신 명령이었다. 나눔의 신비를 드러내는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은 혈연 관계로 이루어진 가족 공동체 안에서 가장 잘 이루어진다. 가족은 그렇기 때문에 의지적이 아니더라도 쉽게 실천할 수 있고 그 어느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강한 사랑의 관계 속에 맺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 성원간의 관계가 무너져 이기적인 생활 태도로 자신들을 드러낸다면 서로 내어 주는 나눔의 신비는 사라지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 등의 온갖 이기적인 야심 속에 나눔 없는 삭막한 분위기가 되고 말 것이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하면서 살아간다. 완전히 독립할 수 있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때까지 자신의 자녀를 끝없이 헌신적인 노력으로 키우고 교육한다. 이것은 부모의 의무로서 당연하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 보면 의무감 이전에 인간 본래의 모습대로 그렇게 하도록 본성적으로 인간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어려워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는 가능한 한 자녀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며 자신들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한다. 팔순된 노모가 육순된 아들에게 길 건널 때 차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는 것을 보면, 부모가 죽으면 땅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자녀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같지는 못해도 무언가 부모에게 보답하려 애쓰며 사는 것이 바로 가족 안에 살아 있는 숨결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언하는 전례적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서로간의 밝은 웃음과 서로를 위하는 헌신적인 사랑이 가족 상호간에 자유로이 넘나들며 펼쳐져야 한다. 가정 안에 사랑이 넘칠 때 포근하고 행복한 분위기가 맴돌게 되며, 바로 그러한 정감 어린 모습을 서로 노력하여 만들어 가는 것이 신앙 가족들이 먼저 해야 할 삶의 실천이다.

 

요즈음은 서로 바쁘기 때문에 자신의 일만 챙기면서 살기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가족들의 자그마한 기념일들을 챙길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시작해 보면 별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의 날을 정해 놓고 가족 서로를 위해 사랑의 편지를 쓰는 한 가족을 지켜본 적이 있다. 그들은 한 주 동안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편지에 담아 표현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를 깨닫게 되면서 더욱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 갔다. 가족 서로에 대한 사랑의 편지가 마치 ‘사랑의 샘물’이 되어 가정 안에 사랑이 차고 넘치게 했고, 가족은 생일이며 축일, 기념일 등을 서로 축하하고 나누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또 거기에서만 그치지 않고 가족이 서로 시간을 맞추어 불쌍한 이웃 노인들을 찾아간다든지 생활비를 절약해서 다달이 사랑의 헌금을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가족의 생일, 결혼 기념일 등과 같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 되면 가족이 함께 모여 마음이 담긴 축하를 해 주고, 축일에 함께 미사에 참여하여 같은 주님을 받아 모시면서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으니 얼마나 복되고 은혜로운 삶이 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가정 안에서 이 같은 나눔의 실천은 서로 아끼고 다듬어 주며 힘이 되어 주고 말없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주 서로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녀가 어릴 때부터 부모의 마음을 통하여 전해질 수 있다면 어른이 된 후라도 어렸을 때 가졌던 나눔의 아름다운 추억을 더욱 어려운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넉넉함으로 커 가게 할 것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형제 자매들이 영성체로 함께 묶여 큰 고리가 되듯이, 가정은 작은 교회의 구성원인 가족들이 나눔의 다양한 실천으로 참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전례의 현장인 것이다.

 

 

3. 이웃 가족과의 나눔

 

“일치와 나눔의 체험은 가정의 일상 생활을 성격 지어야 하고 사회에 대한 가정의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기여를 대표한다.”([가정공동체], 43항)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우리 모두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뿐만 아니라 가족 외 다른 사람들의 이웃으로서 나누어야 할 특별한 소명을 상기시켜 준다.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아버지가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잔소리가 듣기 싫어 여지껏 키우고 돌보아 주신 할머니를 살해한 손자의 이야기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현실에서 흔들리는 가정을 말해 주지만, 사회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나누고 무엇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지난 여름 큰 수해로 수많은 이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한 가족이 휴가를 마다하고 수해 지역에 가서 수재민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복구 작업에 비지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시도다.’라는 성가가 절로 흥얼거려질 만큼 참으로 흐뭇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더욱이 한 개인이 아닌 한 가족이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시대 상황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이처럼 진정한 의미의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은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 주는가 하는 질문보다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 하고 묻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가톨릭 신앙인들의 맹점 중의 하나는 자기만의 신앙 생활에 익숙해 있다는 점이다. 성당에서 교우들이 함께 미사 참례하면서도 옆 사람에게 성가책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관심이 없고,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도 겨우 고개만 돌려 끄덕이고 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나누려는 넓은 마음보다 그저 자기 자신의 믿음 안에만 머물면서 주위의 형제 자매들에게 관심과 나눔이 부족한 모습이다. 물론 조용한 기도 중에 주님과 만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주위의 형제 자매 중에 나를 필요로 하는 이는 없는지 살펴보는 관심은 나의 기도를 살아 숨쉬게 하는 이웃 사랑의 더 큰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내 가족을 챙기고 돌보듯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같은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은 살아 있는 말씀이 될 것이며 나눔의 신비는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이다.

 

 

4. 본당 안에서 나눔의 실천

 

가정 안에서 실천된 나눔의 생활이 커지면 단순히 가족들에게만 머물지 않고 큰 단위인 본당과 사회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차고 넘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가정은 사랑 안에서 교회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인간과 세계에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 가정의 다른 과업은 사랑 안에서 인간을 형성하고 또한 그 모든 관계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여 가정 그 자체에 폐쇄되지 않고 공동체를 향해 개방되어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 의식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정의감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가정공동체], 64항)라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처럼 현대 세계의 그리스도인 가정의 역할은 단순히 자기 가정 안에서만 그 삶이 머물지 않고 밖으로 나아가야 하는 소명에 눈을 떠야 한다. 먼저 본당 공동체 안에서 나눔을 실천하면서 점차 사회적인 관계 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가끔 본당 안에서 서로 다른 가족과의 나눔을 위하여 소년 소녀 가장을 돕거나 병자들이나 노인들을 방문하면서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가족임을 느끼게 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가족을 본다.

 

어느 아버지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사회 복지 시설에 가서 봉사하고 싶다고 하자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주일마다 자기 차로 아들을 그 곳에 데려다 주었다. 그 곳에서 몇 시간을 봉사하고 돌아오는 아들의 환한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기특하고 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 차츰 그 아버지는 아들이 그렇게 기뻐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아버지로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내 어느 날 아들과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의사였으므로 그 곳의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고, 한번 두번 그러다 보니 한 달에 한 번은 가족이 모두 그 복지 시설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 가족이 다함께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찾아 나서는 일이 얼마나 큰 보람과 기쁨이 샘솟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본당이라는 큰 교회는 가족이라는 작은 교회가 여럿이 함께 모인 공동체이기에 작은 교회인 가정 안에서 가족이 얼마만큼 서로 친교와 사랑을 나누느냐에 따라 그 교회 공동체의 생명력이 좌우된다. 그래서 각가정이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이웃과, 아니면 서로 친분이 있는 가정만이라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듦으로써 작은 삶의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적극 권장하는 한 가지 방법이 본당의 구역 반 모임 또는 소공동체 운동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구역 반 모임, 소공동체 운동이 활성화되어야겠고 또 본당 안에서 가족들이 함께 야유회를 가거나 가정의 날을 만들어 본당의 다른 가족들과 서로 어울리면서 친교의 나눔을 갖도록 하는 것도 사랑의 나눔을 위하여 바람직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맺는 말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미사 전례의 주요 부분들을 가정 생활과 접목시켜 보면서 신자 생활 따로, 가정 생활 따로, 사회 생활 따로 신앙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일치되고 유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관점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미사 전례의 정신이 생활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가정 안에 무엇인가 전례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고, 말씀의 식탁을 마련하여 말씀이 늘 그 가정 안에서 살아 숨쉬도록 해야 하며, 가정의 활력소인 가족 기도를 통해 성가정으로 변할 수 있는 힘을 얻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의 깊은 나눔이 차고 넘쳐서 이웃 사랑의 강물을 이루며 세상을 향하여 힘있게 나아가는 사랑의 완성을 그려보았다. 이것이 바로 성찬례의 핵심인 사랑의 나눔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의 이러한 내용 전개가 억지일 수도 있고, 필자의 개인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목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신자들의 가정 생활이 잘 성숙하게 하는 것이 최우선인지라, 은총의 원동력인 성체성사가 성당에서만 거행되는 전례가 아닌 좀더 우리 생활 속에 살아 숨쉴 수 있도록 교회의 기초가 되는 가정 생활 안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다.

 

이제 회개를 촉구하고 애덕을 강조하게 될 성부의 해를 맞으며 준비하고 있는 2000년 대희년의 정신이 ‘되무르기’와 ‘삯쳐 주기’라고 말한다면, 지금 이 시대의 성찬례도 본래의 그 의미로 되물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가 주님께 제대로 갚아 드리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이웃과의 나눔 실천으로 서로의 삯을 쳐주는 본래적인 전례의 분위기로 되돌아가도록 노력하면서 모든 전례 거행이 살아 숨쉬는 신앙의 삶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고 본다.

 

[사목, 1998년 11월호, 하화식(춘천교구 사목국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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