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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가정사목] 고해성사와 가족간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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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2 ㅣ No.52

고해성사와 가족간의 고백

 

 

올해는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마지막 해인 '성부의 해'이다. 교회에서는 성부의 해를 봉헌하면서 특별히 회개와 사랑의 실천을 위한 고해성사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고해성사를 새롭게 인식시키고 더 나아가 고해성사에 대해 더욱 강도 높은 거행을 제시하면서 개인의 성화와 더불어 공동체의 성화를 통해 구원의 대희년 문을 열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교회로서는 대희년을 기다리는 오늘의 상황이 아주 희망적이고 우리에게 살맛을 주고 있다고 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우리의 가정을 보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기의 현장을 보는 듯한 경우가 많다. 사실 가족 서로간의 불신, 미움, 이해 부족으로 갈등의 심화가 새롭게 치유되어야만 대희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고해성사가 이 치유를 가능하게 하고 대희년의 의미를 우리에게 건네 줄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IMF 체제의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면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인간 가치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공동 사회의 윤리가 무시되는 양상이 자주 드러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이 자포자기로 자식을 죽이고 온 가족이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자주 보도되고 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식들이 너무나 손쉽게 헤어져 버리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것은 고통을 나누어 가지려는 차원이 아니라 함께 있으면 고통스러우니 차라리 헤어져 살겠다는 생각이다. 고통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질곡을 이겨내야 한다는 의지보다 우선 그 고통을 피하고 보자는 단순 논리에서 발생하는 불행스런 조짐이다. 헤어져 산다는 단순한 편리만 생각하고 그 결과가 낳을 상처와 불행은 생각하기조차 싫다는 배타적 논리가 앞선다.

 

오늘날 이혼 소송이 급증하고 또한 거리를 떠도는 남편의 수효도 늘어나고 있다는 통계는 우리들 가정도 경제 위기와 함께 도산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가정은 있으되 가족 공동체는 없어진지 오래다. 남편은 남편대로 가정을 등한시하고 가장의 권위만 내세운 채 의무는 잊어버린 지 오래 전이다. 아내는 아내대로 전통적인 아내와 어머니의 위치를 내던지고 한 여인으로서 자신의 생활을 즐기겠다는 자세로 변하고 있다. 이들 틈에서 자녀들은 탈선과 방종한 삶의 절정을 이룬다고 하겠다. 이를 빗대서 나온 다음의 이야기가 있다.

 

한 고층 아파트의 잘 사는 가정에 끔찍한 불상사가 생겼다. 부부 싸움 중에 격해진 나머지 남편이 그만 가스 밸브를 열고 방에다 불을 붙였다. 집안은 ‘펑’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불이 났고 옆방에 있던 아들 녀석은 말릴 틈도 없이 창문으로 뛰어내렸고 엄마와 아빠도 뛰어내렸다. 불을 피했지만 고층에서 떨어졌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 세 명이 하나도 다치지 않고 모두 무사했단다. 그 이유는 남편은 ‘제비족’이고, 아내는 ‘날라리’이고, 아들은 ‘비행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란다.

 

누군가가 ‘하느님께서 세우신 제도는 교회와 가정뿐이다’라고 했다. 가정이야말로 가장 복된 곳이며 이 땅에서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천국의 모형이다. 남편은 왕이며 아내는 왕비이며 자녀는 왕자며 공주이다. 그런데 오늘날 가정의 현주소를 살펴보면 그저 개인들만이 가정에 있을 뿐이며, 이 가정은 에덴 동산의 기쁨보다는 지옥에 더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부부간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가정, 자녀 문제로 염려하는 가정, 부모와 자녀 간에, 그리고 고부간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가정이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가정이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 가정의 문제인가?

 

첫째로, 우리 아이들에 대한 교육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 요즘 아이들은 자기들밖에 모르는 극단의 이기주의자들이 되어가고 있으며, 어른들은 안중에도 없다. 예의 범절이나 상식이 없는 버릇없는 아이들이 많다. 개인적인 삶으로 공동체 의식이 없는 아이들의 문제가 오늘날 우리 가정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미사 시간에도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을 심하게 쳐도 그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아주 기특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러다가 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때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좋아만 한다. 아마도 무척 아플 것 같은데도 참는 것을 보면 가히 대견한 생각마저 든다. 보다 못해서 내가 아이를 나무라면 왜 아이의 기를 죽이냐고 도리어 내게 항변한다. 아이들의 기를 죽이면 주눅이 들어서 소극적으로 변하고 그렇게 되면 공부를 못하게 되는데 신부가 책임을 지겠느냐는 말투이다. 이렇게 애들을 키워서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아찔했다. 한 예화를 소개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길을 가다가 찐빵이 하도 맛있게 보여 빵 3개를 시켜서 아버지가 두 개 먹고 아들이 하나를 먹었다. 아주 맛있게 빵을 먹은 아버지가 “야. 배부르지?” 하고 물으니까 아들이 하는 말, “흥, 하나 먹고 배부르면 두 개 먹은 놈은 배가 터지겠다.” 하더란다. 아버지가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리 귀엽게 키운 자식이라지만 윤리가 땅에 떨어져 애비도 몰라보니 괘씸하고 화가 나서 버릇을 고쳐 놓을 양으로 “너 안되겠다. 종아리 걷어!” 하니까 아들이 하는 말, “그래, 쳐라. 네 새끼 죽지 내 새끼 죽냐?” 하고 반항을 하더란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병들고 자녀들이 반항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항하다가 안 되면 옥상에 올라가 떨어져 자살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녀들은 바로 나의 지나친 관심과 빗나간 사랑이라는 이름의 소유욕 그리고 오직 내 자식만이라는 그릇된 가치관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우리는 그 동안 공부를 잘하는 것을 최대의 효도로 생각하여 오직 성적에만 관심을 두고 살면서 공부만 한다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도덕 교육이나 인격 그리고 예절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우선 성서에서 부모에게 철저하게 순종한 자녀의 모범으로 이사악을 말하면서 우리가 자녀 교육에 대해서 실패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가장의 모범적인 태도이다. 이사악에게는 좋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있었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교육시켰는지 그 후손들이 자손 만대에까지 하느님을 공경하게 하였다. 그는 철저하게 순종하는 아들을 두었는데 이것은 그가 철저하게 하느님께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아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가능하지 않았던 아들을 얻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아들을 하느님께서 원하셨을 때 그는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순종하였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하게 순종하고 효도할 때 아들도 아버지에게 순종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모리아 산에 갈 때였다. 어린 이사악이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을 때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준비하셨다.” 하고 대답하였다. 세상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리는 신앙인의 모습에서 좋은 아버지 상이 나오고 그 자체가 자녀들에게 좋은 교양과 훈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자녀들에게 생활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은 아버지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사실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IMF 체제의 모진 시련은 아버지와 남편들의 위치를 많이 바꾸어 놓기도 하였다. 사실 그 동안 가정에서 가장의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통하였다. 아내와 자녀들의 군주로서 자리를 잡았고, 이에 대한 도전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이기적이고 비상식적인 언행을 합리화시키면서 가정을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주부가 더 이상 자기 남편의 모욕을 참으면서 살 수 없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남편이 자기를 전혀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주부의 하소연에는 우선 호칭부터 모욕적인 면이 상당히 있었다. 남편이 자기를 부를 때 “야! 이리 와 봐.” 또는 “병신같이 그것도 몰라?” 하는 등의 모욕적 언사를 다반사로 쓴다는 것이다. 만일 그 남편이 서양에서 그런 말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는 이혼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상당한 위자료 지불 때문에 쪽박을 차야 할 정도의 언어 폭력을 사용한 것이다.

 

사실 이뿐이 아니다. 자녀들과 이웃들 앞에서 자기의 아내에게 애정 표현은 고사하고 면박을 주는 말들이 남편들에 의해서 얼마나 자행되고 있는가? 이를 통해서 생기는 분노는 가정의 일상을 아주 피곤하게 만들고 급기야 다른 문제를 동반해서 이혼에 이르게 만들고 있다.

 

얼마 전에 회갑이 넘은 할머니와 면담을 한 일이 있다. 남편과 이혼하겠다는 말을 하였다. 그 이유인즉 10대에 혼인하여 거의 40년을 남편에게서 폭행을 당하며 살아 왔다는 것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언어의 폭력뿐만이 아니라 술만 마시면 때리고 던지고 하는 등의 폭행을 당해왔고 그것이 팔자려니 생각하고 살아 왔지만, 이젠 더 이상 참으면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남편은 가정의 심각한 문제성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 이러한 습관이 절대로 죄악이거나 심각한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나라의 이혼률이 17%나 되었다고 한다. 하루 평균 일천 이백 쌍이 결혼하는데 이들 6쌍 중에서 1쌍은 헤어졌다. 이혼 중의 가장 큰 이유는 말한 바와 같이 모욕적인 폭언과 폭행이 주된 이유였다고 한다.

 

나는 남편들의 이러한 모욕적인 언행은 단지 개인적이거나 부부간의 문제 이전에 하나의 죄악이라고 본다. 이는 아내를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한 소유물로 생각하는 자세이고,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항상 모욕적인 언사를 일삼는 남편들의 태도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혼인의 신성함, 배우자에 대한 신의와 존경의 원칙에 정면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가끔 고해자가 분명히 이러한 문제점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절대로 고백하지 않는 것을 보면 우선 배우자의 인격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님께서 인생의 동반자로서 맺어 주신 배우자를 남편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껴 주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자신의 아내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고 존경하겠으며, 자식들은 과연 어머니의 지위를 어떻게 인정하겠는가?

 

고해성사는 바로 이런 경우, 자신의 부족과 습관적인 행위에 대한 반성을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큰 은총으로 주어진다. 우선 내가 배우자에게 외적인 상처를 입히거나 물질적인 손해를 준 것만을 성찰하지 않고 가정이라는 그리고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나의 행위를 성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가정에서는 나름대로의 문제들이 존재하겠지만 우선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가정의 비정상적인 호칭에 문제가 있음을 성찰할 수 있다. 요즘 세태가 그래서인지 가끔 보면, 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 부모가 자녀를 부를 때, 또한 형제들끼리의 호칭 등에 관해서 원칙이 사라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남편을 부를 때 ‘아빠’라든지 ‘오빠’라든지 ‘형’ 또는 ‘아저씨’ 등등의 경우가 있다. 이런 호칭이 남편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남편이 ‘아빠’나 ‘오빠’가 되어 아내를 딸이나 동생을 대하듯 해서 아내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사용하는 말과 행동들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라는 점을 먼저 깨달아야 하겠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일들이 이제는 역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많아졌다. 최근 명예 퇴직과 조기 퇴직으로 남편이 주도하던 가정의 균형이 깨지면서 남편에 대한 아내와 자녀들의 무시로 갈등을 겪는 가정도 증가하고 있다. 요즈음 사회 일각에서 ‘왕따’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학교에서만 이런 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가정에서 남편들이 그러한 상황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직의 아픔도 가눌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그들은 가족 속의 ‘타인’이 되어 버렸다.

 

아내는 남편의 무능 때문에 자신이 일선에 나서야 한다는 불만과 더불어 단지 물질적인 이유로 남편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동안 전통적 ‘아버지의 권위’가 가정을 지키는 버팀목의 역할을 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경제적인 이유로 흔들리면서 우리의 가정이 흔들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가부장 제도로서 가정의 붕괴는 자녀들이 자칫 무능을 이유로 부모를 경멸하게 되고, 가장이 마땅히 누려야 할 존경과 사랑은 휴지처럼 버려지는 심각한 사태가 우리 가정 안에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전반적인 가정의 문제점 안에서 나의 문제점을 인식해야 하며, 나의 개인적인 잘못들이 바로 붕괴 위기의 가정을 만들 수 있다는 인식과 함께 해결을 위한 진정한 노력과 가족간의 화해가 우선될 때 문제가 해결되고, 이는 ‘성부의 해’를 통하여 교회가 요구하는 고해성사의 새로운 역사가 될 것이다.

 

이러한 가정 문제의 해결은 서로를 개방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서로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함으로써 문제점을 고쳐 나갈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한 가정에 다음과 같은 참회 예절을 소개하여 실천하게 하였더니 지금까지 좋은 효과를 본 사례가 있다.

 

1. 시작 성가 - ‘오소서 성령이여’(가톨릭 성가 142번) 

2. 성호경 

3. 참회 인사말 (가족 중 한 명이 가족 참회 예절을 시작하면서 일정 기간 동안 자신들이 행한 일들에 대해 하느님께 통회하자는 내용의 요지를 말한다.) 

4. 통회의 기도 

5. 복음 낭독 - 잃었던 아들의 비유, 잃었던 양 한 마리 등 

6. 복음 묵상 - 2-3분 정도 

7. 발표 - 일정 기간 동안 가족간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해결하는 작업을 발표. 

8. 성가- ‘주여 자비를 베푸시어’( 515번) 등 

9. 신자들의 기도 - 가족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기도 

10. 주님의 기도 

11. 마침 성가 -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성가

 

이 가정은 이러한 예절을 통하여 부모가 자녀에게 정기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고, 언어적인 사랑의 표현과 스킨 쉽을 통한 사랑의 확인이 필요하며, 물질적 충당만이 사랑의 표현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사실 하루에 몇 번이나 자녀와 눈동자를 마주치고 있는지, 함께 서로를 위해 기도해 본 적이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신들이 얼마나 가족에게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에 대하여 상당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녀들을 교육하는 데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육에 사랑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자녀들의 감수성은 참으로 예민하기 때문에 자신을 향한 부모의 눈빛 하나만으로도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남편이 아내에게 애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인식하게 된다. 결혼한 후에 몇 번이나 아내의 결정에 대해 칭찬하였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사실 남편들은 칭찬에 너무나 궁색하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와 칭찬 한 마디는 가정의 일치와 나눔을 위해서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또한 아내도 남편을 무력하게 만들어 그의 남성상을 손상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서로에 대한 인식을 갖고 다음과 같은 가족간의 의사 소통에 대한 점검표를 만들어 각자의 태도를 살펴볼 수도 있다.

 

1. 나는 가족의 말을 듣는 중에 자주 묵살하는 경우가 있다. 

2. 나는 가족 성원에게 반대 수단으로 침묵을 보인 경우가 있다. 

3. 나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4. 나는 자기의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5. 나는 가족 성원에게 짐짓 겸손한 척 한다. 

6. 나는 감사의 표시를 못한다. 

7. 나는 위협적인 말을 한다. 

8. 나는 감정을 담아 목소리를 높인다. 

9. 나는 비판적인 말을 잘한다.

 

지속적인 참회 예절과 더불어 점검표를 체크하고 개선점이나 방법을 나누다 보면 서로를 인식하고 인정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결심한 것은 곧바로 그 주일에 고해성사를 통하여 다시금 그러한 잘못에 떨어지지 않도록 은총을 받아야 하며 이를 통하여 가족에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하느님과 이웃과 교회와 자신과의 관계를 화해하고 회복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통하여 가족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은 인간의 첫 공동체로 사회의 기초 단위이며, 자율적 결단에 의해 구성되어 불가해하고 항구적인 사랑의 공동체이기에 부부의 유대는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도 하나를 이루는 전인격적인 일치의 공동체이다. 나아가 자녀들은 부부 일치의 영원한 징표이고 결실이며 부부의 생생하고 불가분한 종합이다. 그러기에 가정이라는 특수성을 생각하면 가족 구성원의 문제와 죄는 우선 가족들 안에서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이 고해성사도 우선 가족들간의 참회 전례와 대화의 상호 노력을 기초삼아 이루어져야 고해성사의 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겠다.

 

[사목, 1999년 5월호, 임상만(서울대교구 화양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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