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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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90

박종원 아우구스티노(1792-1840, 회장, 기해박해 때 참수)

 

 

'이선'으로도 불리던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는 서울 중인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입국 후, 회장직을 맡아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일에 헌신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피신했다. 피신해 있으면서도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며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주다가 피신한 지 8개월 만인 10월 26일 잠시 집에 들렀다가 체포되었다. 이튿날 그의 아내 고순이 바르바라도 체포되어 같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박종원은 포청에서 아내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했고 또 아내와 함께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냈다.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堂峴)에서 4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 고순이 (高順伊) 바르바라는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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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과 지옥을 마치 확실한 사실같이 말하고 제사는 헛된 예식이라 하여 저버렸으며, 천주를 충심으로 믿고 공경하여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음을 돌리지 않은 죄"라는 죄목으로 참수당한 박종원은 서울 중인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선'이라고도 불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가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불쌍한 죄인인 나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마땅하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분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평소에 순교의 뜻을 마음에 새겼다. 그의 성품은 온화하고 친절하였고, "대관절 아우구스티노가 성을 내는 것을 언제 보게 될까?"하고 말할 정도로 덕인(德人)이었다.

 

기해박해가 한창인 10월에 그의 아내 고순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형조판서는 부부를 함께 심문하여 잔인하게 고문하여 팔다리를 못쓰게 만들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그들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마흔 여덟 살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경향잡지, 199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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